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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스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강 두 번째 강의





녹취 및 정리: 황호연 / 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정화스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강의는 총 5회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한 강 한 강이 한 편의 글이 되기에는 매우 긴 편이라, 독자분들이 보기 편하시도록 세분하여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이번 글은 정화스님 강좌 3강의 두 번째 부분임을 알려드립니다. 그 전의 강의는 이 웹진의 지난 글을 확인해주세요.












*정화 스님께서 강의 교재로 사용하신 책은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백석현 옮김, 야그 출판사, 2007년)입니다. 현재 절판되었고, 이 책을 개정해 다른 출판사에서 펴낸 책이 있습니다.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박성현 옮김, 심볼리쿠스 출판사, 2012년)입니다.

*강의를 직접 들으신 분들은 Ⅰ.『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와 Ⅱ.『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정동호 옮김, 니체편집위원회 감수, 책세상 출판사, 2000년), 그리고 그 외 번역본들 중 편한 것을 참고하셨습니다.

*녹취록에서는 강의 중에 언급된 위 책 두 권(Ⅰ,Ⅱ)의 해당 부분을 스님이 말씀 하신 것을 참조하여 재구성해서 옮깁니다. 페이지 표시는 가독성을 위해 옮긴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만 하였습니다.

* 페이지 표시의 예: Ⅰ번 책의 36쪽, Ⅱ번 책의 38쪽은 아래와 같이 표기합니다. -> (Ⅰ:36, Ⅱ:38)




<창백한 범죄자에 대하여> 강의 계속


그 다음, 근원적 가치의 최고의 정점이라고 이야기 된 것은 ""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가치가 절대적인 가치로써 무엇으로 말해질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었는데, 그 절대적인 가치를 담지하는 힘이 "어 죽은 것 같아. 사라진 것 같아."라고 되니까, 그런 가치가 사라집니다. 그렇게 총체적인 정점에 있는 가치가 사라지니까 내용적으로 뭡니까? 각 삶들이 가치를 가진 삶들로 됩니다.


나중에 니체가 노래하는 개인이라는 말을 합니다. 노래하는 개인이야 말로 깨어있는 개인이지요. 노래하는 개인,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신에서 악사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옛날에는 신이라는 이미지 속에 들어있었는데 그것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 각자의 삶 속에서 실현되지 않은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 근본적인 상태에서 에고를 넘어서려는 의지가 가치 있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신을 의심하는 것이 악이 되는 시기에는 자신을 넘어서려 하는 것도 악이 됐습니다. 사실상 국가나 힘 있는 사람은 자신을 넘어서려 하는 것을 못하게 하지요. 자기를 넘어서버리면 그 사람을 속여먹을 수가 없어요 허허.


옛날에 말했던 신의 자리에 요즘은 자본이 들어와 있는데, 자본은 그냥 힘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 그 자본이 말하는 감정의 덫과 인지의 덫 속으로 제가 들어가야만 그것이 나를 가지고 움직일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속에 내가 안 들어가버리면 그 사람이 아무리 자본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나 내일 굶어 죽겠어"라고 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바로 깨어지고 맙니다. 이처럼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힘이 정해준 자아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데, 19세기에는 신도 의심하고 있고,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는 것도 좀 약해지고, 옛날에는 자아를 원하는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원하는 겁니다. 교육받아서 만들어진 권력에 의해 살아진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의지"하는 것도 악이 됐습니다. 악이라는 것은 뭡니까? "내가 생각하도록 요구한대로 너는 생각해야 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특히 인도에서는 생각의 의무를 가지고 있는 종족이 따로 있지요? 브라만족이라는 종족은 신으로부터 생각하는 의무를 부여받았습니다. 반면에 브라만 족이 아닌 사람들은 생각하는 의무를 부여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브라만들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정해주는 겁니다. ’너는 이렇게 생각해." 라고 하면 그렇게 생각해야하고, "너는 이렇게 생각하지 말아"라고 하면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했던 겁니다. 자기의 딸보고 너희는 베다 성전을 볼 의무가 없으니까 보지 말라고 하면 딸은 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그렇게 결정하는 것이 신인데, 이 신의 소리를 대신 전해주는 사람들이 브라만인들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 스스로 생각하고 싶다고 하면, 옛날 같으면 저 공부 좀 하고 싶다는 말과 똑같지요? 그러면 그 때에는 그런 것들이 악이 됐지요. 그런데 니체 시대에는 공부하고 싶어요가 아니고,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하고 싶어요"라는 말들이 나오고, 이런 것들을 하면 사회 전체가 곤란해집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은 특히.


이전에 유럽에서는 마녀사냥이라는 것이 상당히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책을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권력자가 가지고 있는 내가 정해준 대로 생각하라"는 이야기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놈을 찍어놓고 그 마을에 불길한 일이 생기면 그놈을 집어서 너 때문에 이런 불길한 일이 생겼어."라면서 그 사람을 범죄자로 취급해서 태워 죽이거나 무슨 일을 한다거나 했습니다. 당시에 마녀들은 그러니까 여기서 보면 뭡니까?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자아의 자유를 의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단이나 마녀로 취급받았는데, 니체 시대에만 하더라도 쉬운 말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아까 말한 대로 교육도 중요하지만 교육 가운데서 권력을 행사해서 상대를 억울한 상태로 몰고 가지 않는 일들이 가정이나 사회에서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네가 교육을 많이 받고 힘르 가져서 억울한 일을 당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기 보다는, 자신의 작은 생활 터전 속에서라도 억울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형태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행사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 됩니다. 그래서 사회 전체가 작은 그룹이라 할망정 그 상태에서 억울함을 당하지 않는 상태로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권력을 행사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손을 잡아주면서 함께 가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니체는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계곡 옆의 난간 같은 존재야."라고요. 계곡을 지나가는데 상당히 위험합니다. 어떤 계곡입니까? 하느님에 대해 의심하는 계곡, 자아를 원하는 계곡, 자신의 자유를 의지하는 계곡, 이 계곡을 지나가면 당시 사회는 어마어마한 위험이 도처에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니체는 어떤 사람보다 그런 위험한 계곡을 지날 때 "내가 너의 옆에 난간이 되어주겠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 짜라두짜가 초인이 돼서 너희들을 들어 올리거나 내리는 권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고, 옆에서 짚고 갈 수 있는 의지처가 되어 주겠다고 합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지팡이가 아니다."라는 말도 합니다. 아까 부모와 자식 사이, 후배를 교육 시킬 때, 권력에 대한 행사가 아니고 함께 손잡으면서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는 것 자체가 초인이 되어가는 것이고 자신의 자유를 실천해 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 7, ‘읽기와 쓰기라는 이야기입니다.(:63, :63) 그러면서 짜라두짜가 말합니다. ‘글 중에서 내가 사랑하는 글을 피로 쓴 글이지."라고. 피가 정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피로 쓴 글을 보통 사람들은 잘 이해를 못합니다. 낯선 피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해된 글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길게 보면 글쓰기를 망칠 뿐만 아니라 생각하기도 망칠거야."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해한다는 것은 각자 오롯이 서 있는 자신의 세계를 충분히 드러낼 수 없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도 없는 그런 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것은 정신 자체가 썩어 문드러져 고약한 냄새가 나는 글이지요. 이런 글로 우리 정신을 그렇게 만들지요. 요즘은 많이 사라졌습니다만, 제가 학교에 다닐 적만 해도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을 열심히 외웠습니다. 이때는 내가 교육 받는 것은 이 헌장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뜻한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역사적 사명을 지고, 낙타처럼 짐을 열심히 지고 누구를 위해서 가야하는 그런 글들을 머리에다 많이 쓰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글은 각자 가지고 있는 자신을 넘어서려는 것에서 보면 정신이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글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 글을 썼던 어떤 분이 그 시대의 유명한 철학자라고 그렇게 부르긴 하던데, 속으로는 많이많이 아팠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벗어나는 것을 내부적이며 외부적으로 들여다보면서 너 그러면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식으로 정을 준비하는 사람이 옆에 항상 있어서, 그런 글을 쓴 사람은 위험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옆에 있는 것은 사실상 내부적인 것도 있고 외부적인 것도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길에 대한 미래는 대단히 불안합니다. 우리의 불안이라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도 있습니다. 과거에 대한 회한,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인데, 이 둘 다 사실상 사람을 꼭 잡아 매서 힘들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말라고 여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회한이 많고 내다보면 불안한 것이 인생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뭡니까? 시간을 추측하는 것에 의해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익숙한 길과 이별한다는 것은 예측된 미래의 시간이 나에게 오지 않는다는 것인데, 사실상 우리 삶 자체는 어떤 경우도 예측된 대로 정확하게 온 적이 없습니다. 다만 예측된 대로 올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그 생각 속에서 자기가 안정감이라는 것을 느낄 뿐입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자신을 온전히 살려면 자신을 이루고 있었던 글을 온전히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어낸 사람은 위험한 길을 즐겁게 갈 수 있는 겁니다. 항상 옆에 있는 위험, 그리고 심술부리는 정신. 그런 것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천연덕스럽게 한 발을 걷는 사람이야말로 글을 잘 쓰고 글을 잘 읽는 사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익숙한 길은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죽음은 "내 안에 들어 있는 악마"라고 이야기합니다. 내 안의 악마란 중력의 영"라고 합니다. 이 영은 신령스러운 영인데, 이 영이 자기를 끌어당겨서 가벼운 삶을 살 수 없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을 외부적 악마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중력의 영은 우리를 무겁게 만들고 삶을 부자유스럽게 만듭니다. 반면에 자유로운 사람은 굉장히 경쾌하고 나비 같고 구름처럼 날갯짓 하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은 언뜻 보면 자기 삶을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미 필요 없는 짐들은 잔뜩 지고 있습니다.


아까 부모가 자식을 교육할 때는, 생물학적으로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때부터 이미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고 DNA를 여러 가지로 섞어서 물려줍니다. 그러면서 아울러 자기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익혀 살아가기 위해서 후천적으로 익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대부분 다 오픈시켜 줍니다. 이처럼 수십억 년을 지나면서 후손을 만들 때는 "너는 나와는 달리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다음 삶을 살 수 있어."라고 무의식적으로 전해지고 있으면서, 실제로 교육을 시킬 때에는 단순한 시간조차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짐들을 지면서 그 짐들을 후손에게 물려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무거운 짐을 감당하는 것은 언뜻 보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반면에 앞서 말한 대로 하느님을, 의심에서 넘어서 있고, 자신을 의지해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삶 자체가 이미 숭고해져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숭고해진 사람들은 더 이상 위를 쳐다볼 필요가 없습니다. 숭고해진 사람은 이미 땅에 발을 잘 내려놓고 산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위를 쳐다보면 앞서 말한 대로 없는 과거, 지나온 과거를 추상하거나 오지 않는 미래를 추상하면서 현재를 회한과 불안으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쳐다보면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삶의 지표로 삼으면서, 결코 잡히지 않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한 순간도 자신이 숭고해질 수 없습니다. 반면에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은 땅의 흐름과 함께하면서 매 순간순간 자신을 새롭게 자유롭게 살아가기 때문에 그 상태가 숭고한 상태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는 자신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에만 거기에 담고 갈 수가 있지요. 이렇게 해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삶을 중국 사람들은 "지도"라고 부릅니다. 도에 이르렀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해석을 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고, "최고의 도, 지극한 도, 궁극의 도."등등으로 이야기합니다.


어떤 선사가 제자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자네 궁극의 도가 무엇인지 아는가? 당연히 모르겠지요 허허. 혼자 자문자답을 합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지. 어렵지 않아." 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가려 선택하지만 말게."라고 합니다. 실제로는 무지하게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허허. 가려 선택하지 않는 다는 말은. 어제까지는 좋은 것이 오늘은 내 삶에 안 좋은 일이 되기도 합니다. 어제까지 안 좋은 일이 오늘은 좋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좋은 일을 오늘까지 담고 있으면, 오늘 일을 선택할 때 어떻게 선택합니까? 어제 좋았던 일을 가지고 오늘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미 그 선택이 아귀가 안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고 있는 짐 가운데 무엇인가를 뒤져서 "아 이것과 맞네?"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가려 선택하는 것"입니다. , 이것은 가려 선택하는 행위의 현재성을 말하는 게 아니고 가려 선택하는 행위의 이미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려 선택하는 것은 모든 생명들이 현재적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그 하고 있는 이야기가 현재성이 아니고, 이미 가지고 있는 짐 속에 든 표준을 꺼내서 좋다 나쁘다 하면서 좋은 것은 따라가려고 하고 나쁜 것은 안 따라가려고 하는 걸 경계하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지금을 자유롭게 살려면 잘 가려 선택하되, 그 가려 선택하는 내용이 짐 속에 들어있는 이미지가 아니길 바란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숭고해질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가려 선택하지 않는 그 행위가 숭고한 일이 되고 만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중력의 영은 우리에게 짐을 잔뜩 지워놓고, 우리보고 그 짐에 잔뜩 짓눌려서 죽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살래? 짐에 눌려서 죽을 것인가, 아니면 짐 밖으로 벗어날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감정과 인지의 분별성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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