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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과 사건4] 아르케는 아페이론이 아니다

수유너머웹진 2016.10.07 09:51 조회 수 : 3761


해석과 사건 (4)

-아르케는 아페이론이 아니다-

 






박준영/수유너머N 회원








3) 아르케는 아페이론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바로 하이데거가 말한 바, ‘아르케는 아페이론이다라는 아낙시만드로스 해석이 위치지워진다. 하지만 이는 그 본래적인 정위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위치지워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을 크레온, 즉 필연으로 파악하는 데까지 나아갔으나, 애초부터 그것을 동일자로 파악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환원과정의 절반만을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오히려 플라톤에 더 가까워 보인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우주생성의 과정을 묘사하면서, ‘구형의 우주를 논함으로써 동일성의 테마를 중심에 놓기 때문이다. 구형이란 기하학적으로 자기완결적인 형태며, 이것을 플라톤은 최대의 자기 동일성을 지닌 것이라고 한다(33b). 이는 닮은 것(한결 같은 것)이 닮지 않은 것(한결 같지 못한 것)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존재’(ousia, 실체)와 타자성(theatron)이 덧붙여진다(35a).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F. 릭켄의 견해에 따르면, 존재(Sein)는 결코 사물이나 물성(物性; Dinglichkeit)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현실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때, “현실태”(Wirklichkeit) 개념은 현실화, 즉 현행화로서 작용함”(Wirken), “작용 중에 있음”(am Werke sein)이라고 할 수 있다(Ricken 2000, 241 참조). 그러므로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완전태로서의 구형에서 그 과정을 완결하는 것이라기보다 현실태로서의 작용즉 그 힘에 의해 이해되는 어떤 것이다. 플라톤이 우주생성의 과정이 하나의 완결된 결론으로 달려가는 것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가능태(잠재태)가 시시각각 간섭하고 있는 꼴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애초부터 플라톤이 무규정자를 적극적으로 사유했음에도, 그것을 동일자로 환원함으로써, ‘존재를 어떤 부동의 질서로 응고시키는 목적론적인 사유 구도를 견지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을 엔텔레케이아에 두고 그것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다루고 있지만, 가능태를 그러한 엔텔레케이아의 원동력으로 삼음으로써, 단일한 완전성으로 응고되는 사유 구도를 상당히 회피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라 하더라도, 이러한 사유구도가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에게도 무규정적인 아페이론이 아니라 규정하고, 비례를 계산하는 로고스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질료적인 아페이론보다 형상철학을 자신의 본령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페이론은 원동력이긴 하지만, 학문적인 로고스(정식화)의 대상으로는 부적당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철학사적인 부침 안에서 아낙시만드로스를 회고한다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구도는 형상(eidos)과 이데아의 편이었고, 이것은 둘의 정도의 차이를 논외로 한다면, 동일성의 철학에 더 가깝다.[각주:1] 하지만 아낙시만드로스 잠언의 본래 의미는 아르케=아페이론의 구도를 획득하기 이전에, 플라톤이 사유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더 적극적으로 도입했지만, 실패한 그 사유구도의 흔적을 담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흔적은 물론 연대기적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말하는 흔적은 해석의 흔적이며, 온전히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지만, 지금 우리가 그 흔적을 통해 아낙시만드로스를 조망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흔적을 통한 해석은 이와 같이 조망을 요청한다. 흔적 자체만으로는 해석의 적합성(adequacy)이 확보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차라리 해석은 가장 부박한 어떤 것으로 전락할 것이다.


결국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안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것이 이제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 이런 말 건넴이 하이데거-아낙시만드로스 사유 구도에서는 어떤 부정성의 방식, 또는 억압의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다. 즉 아페이론을 존재로 불러 모으는, 그래서 존재 아닌 생성이나 비존재는 흔적 없이사라져 버리는 그런 방식 말이다. 만일 우리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아낙시만드로스가 아니라 하이데거-아낙시만드로스의 계열만을 따른다면, 흔적 없음은 그대로 아페이론에 대한 우리 사유로 응결되었을 것이다.[각주:2] 후자의 계열은 하나의 형상화(figuration)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유에 어떤 사건을 발생시키지 못할 것이다. 오직 해석은 재형상화(configuration)를 완전히 거침으로써만 흔적을 잡아쥘 수 있게 된다.[각주:3]


하이데거를 통한 형상화 과정과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한 재형상화를 통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즉 아르케는 아페이론이 아니다. 오히려 아페이론은 아르케를 감싸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며, 설득되지 않은 잔여’(residuum)로 남아 수동성과 능동성을 향유한다. 이러한 나의 해석은 이 단편에 대한 상식적인 해석 뿐만이 아니라, 마치 하이데거가 제시한 잠언의 뜻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해석을 남김없이 볼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 해석의 또 다른 특징은 그가 아낙시만드로스 잠언으로부터 시간성을 사유할 때 드러난다. 잠언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χρόνος에 대한 해석에서 하이데거는 올바르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에 대한 해석이 현대적 사유에까지 습관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베르그송도 마찬가지로 지적하는 바인데, 바로 시간의 공간화라는 문제다.[각주:4] 이에 따르면 시간은 오직 그것의 연장에 따라 사유되고 또한 그것은 흘러가는 지금이라는 점들의 계산으로 사유된다(Heidegger 1981:2012, 185:120-21). 하지만,

 

χρόνος는 그리스어로 τόπος, 즉 그때마다 한 존재자가 속하는 자리에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χρόνος는 부적절한 시간(Unzeit)과는 달리 그때마다 호의적인 시간이요 베풀어진 시간이다. τάξις는 결코 지금-점들을 일렬로 배열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때마다 적당하고 알맞게 하며 베풀면서 안배하는 시간으로서의 시간 자체에 존재하는 할당하는 성격을 의미한다. 우리는 시간은 이다라고 말할 때 시간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때가 되었다’(Es ist Zeit)이고, 다시 말해서 무언가가 일어날 때이다라고 또는 무언가가 오거나 갈 때이다라고 말할 때 시간을 포착한다(Ibid.).[각주:5]

 

나는 여기서 하이데거의 시간 해석이 크로노스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비판을 유보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부적절한 시간과는 다른 시간은 크로노스라기 보다 카이로스(Kairos)라는 주장도 지금은 내세울 필요가 없어 보인다. 어쨌든 이러한 비판은 그의 존재와 시간2부와 더불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 제시된 하이데거의 해석은 그러한 비판과는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한다. 하이데거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시간, 즉 크로노스를 존재의 할당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호의적으로 베풀어진 시간이며, 매우 능동적인 특성을 가진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어떤 지금-점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 다른 말로 적기’(適期)로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를 하이데거는 통제된 겨를(Weile)”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곧 순응된 겨를이기도 하다. 무엇이 순응되는가? 현존하는 것들 즉 존재자가 순응된다. “그때마다의 현존하는 것들이 통제에 순응하고 서로 인정함으로써 그것들은 겨를의 할당에 호응한다. 그때 그때 존재에 있어서 시간에 호응하는 식으로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Ibid., 185:121), 이것은 하이데거-아낙시만드로스에게 매우 관건적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겨를이 됨으로써 현존은 존재의 본질을 형성하면서, “불응을 뿌리치고 (...) 유일무이한 통제자로서의 하나이자 동일한 것을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동일성의 구원 과정은 존재자 자신의 소거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바로 존재 자신이 행하는 소거며, 따라서 아페이론 자신이 크로노스를 따라 스스로를 소거하는 것이다. 이때 현존재는 자신의 시간성을 경험하는데, 이는 소거적인 떠오름의 방식을 통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소거는 통제의 강제적인 필연에 긴박된다. 왜냐하면 존재는 동일자로서 현출과 소거를 통제하고, 그러한 통제함이 강제적인 필연인 그런 식으로 현성하기 때문이다(Ibid., 123:187). ‘아르케=아페이론=존재는 이렇게 시간과 호응하면서, 동일자로 환원된다. 여기서도 남는 것은 바로 생성의 본래면목, 즉 잠재태로서의 운동-힘이며, 잔여 자체다. 이제 이 장에서 고찰된 아낙시만드로스 잠언의 전체 단편을 볼 차례다.

 

무한정한 것(apeiron)은 있는 것들의 근원이자 원소(stoicheion)[이다.] (...) 그것[근원]은 물도 아니고, 원소라고 불리는 것들 중에서 다른 어떤 것도 아니며, [물이나 원소들과는] 다른 무한정한 어떤 본연의 것(tis physis apeiros)이다. 그것에서 모든 하늘(ouranos)과 그것들 속의 세계들(kosmoi)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들[원소들]로부터 있는 것들의 생성이 있게 되고, [다시] 이것들에로 [있는 것들의] 소멸도 필연(chrēon)에 따라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신들의] 불의(adikia)에 대한 벌(dikē)과 배상(tisis)을 시간의 질서(taxis)에 따라 서로에게 지불하기 때문이다(DK12A9, B1).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그때마다의 현존하는 것에 대한 통제는 한계의 거부이다. (...) 그러나 그때마다의 현존하는 것에게 현출이 존재하게 되는 이것(동일한 것으로서의)으로 현존하는 것으로의 소거 역시도 현출하니, 강제적인 필연에 호응하여 그렇다. 말하자면 모든 현존하는 것 자체는 (그 자신으로부터) 적합을 내주고 또한 한 현존하는 것이 다른 현존하는 것에게 존중(인정)을 허락하는데 (이 모든 것이) 시간에 의한 시간적인 것의 할당에 호응하여 불응의 치유로부터 [이루어진다](Heidegger 1981:2012, 94:150).

 

하이데거가 누락하고 있는 부분은 처음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였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우회한 지금에서는 그것이 결정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단적으로 아페이론은 아르케나 스토이케이온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오히려 아페이론은 그러한 원소들과는 달리 어떤 본연의 것, 달리 말해 무규정적인 본성(근원)’(tis physis apeiros)인 것이다. 무규정적인 근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수동성과 능동성을 향유하는 작용력과 수용력으로서의 힘-운동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올바르게 말한 바와 같이 근원이 없는 근원이다. 그것은 가장 적확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본문에 있는 그 단어인 생성’(γενεσις)이다. 원소란 무엇인가? 그것은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질서의 최초 상태, 즉 물, , , 공기다. 그것은 따라서 이러한 존재자들을 가능하게 하는 가능태며, 하이데거의 견해 안에서는 현출과 소거라는 그 크로노스적인 과정에서 소거의 힘일 것이다


나는 하이데거의 해석이 전적으로 옳지 않다고 논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이데거는 아페이론이 곧 아르케라는 아낙시만드로스 잠언을 축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오류를 범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외의 그의 해석은 매우 온당하다. 하이데거가 누락한 그 부분은 바로 하이데거 자신에 의해 교정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소거적인 떠오름이라는 말에서 소거과정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 그는 이러한 과정을 동일성으로 환원한다. 하지만, 소거란 물러남이고, 이러한 물러남의 머무름은 여기’(Da)가 아니라 너머’(Über). 그러나 이 너머는 어떤 초재적인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운동이 현행화하는 내적인 것의 평면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이 원소들의 생성의 근원이 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애초에 고대 헬라스 세계의 자연철학에 대한 설명과 해석에서 시작해서, 대표적인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를 거쳐, 아낙시만드로스를 우회하고, 다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 해석을 재음미하면서, 해석의 순환이 누승적으로 심화되는 과정을 지나왔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을 하이데거와 더불어, 또한 거리를 두면서 재해석했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를 다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이 글의 지금까지의 해석과정이 텍스트의 문자 그대로를 따라가기보다, 해석과 사건이라는 큰 틀 안에, 고대 세계의 사유가 가지는 어떤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해 음미와 재음미라는 소크라테스적인 물음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과정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흔적을 쫓는 과정이며, 그런 의미에서 연대기적인 과정은 아니고, 오히려 일종의 해석학을 위한 텍스트의 재배치와 순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질문은 하나 혹은 둘의 순환이 마무리되면 반드시 되물어져야 하다. 다시 묻자. 그렇다면 사건과 해석이란 자연철학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대립은 해석과정에서 단순하게 바라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철학사 내에서 차라리 길항의 의미를 함축한다. 그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의미에서 조우며 보다 논쟁적으로 봤을 때에 교전’(交戰, encounter)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교전은 내재적인 것과 초재적인 것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이 둘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로고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의 편에서 로고스는 단지 존재의 표지며, 헤라클레이토스의 편에서 그것은 자연(원초적 사태, physis)의 표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앞서 파르메니데스의 표지sēmata로 적었고, 헤라클레이토스의 표지herma 적시했던 것이다. 전자는 천체나 저기 먼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 전언이며, 후자는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며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하는 전언이다. 전자에게서 로고스는 인식의 대상이지만, 존재라는 확고부동한 대상을 통해 사유된다. 후자에게서 로고스는 하나의 원초적 사태로서 사건으로 경험된다. 이때 사유의 주체는 둘 모두에게서 현자또는 철학자이겠지만, 파르메니데스의 현자는 그러한 로고스의 표지를 비물체적인(asomata) 방식으로 알 뿐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감각적인 것은 오로지 오류의 원천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감각적인 것을 수용하면서, 안에서로고스와 더불어사유한다. 따라서 전자에게 로고스는 초재적이며, 후자에게 로고스는 사유주체와 대상이 구분이 불분명한 내재적인 평면에 있게 된다. 초재적인 상태에서 사건은 운동-힘이 아니라 대상으로 정립되며, 내재적인 상태에서 운동-힘은 애매모호한 기체(hypokeimenon)와 같이 무규정적인 상태에 근접한다.


여기서 자연’(physis)은 무엇임(whatness)으로서의 본질’(essence)로서 사유되기도 하고, 이것임(thisness)로서의 어떤 특개성’(singularité)으로 사유되기 시작하는 과정에 있다. 아낙시만드로스에게 이 사유의 시작, 즉 그 원초적인 상태는 바로 아페이론이며, 잠재적인 무규정자로 드러난다. 아페이론은 비존재에 다가가는 것이며, 그것은 곧 카오스의 상태에서 크로노스의 경로를 따라 시시각각 출몰하는 힘-운동이다. 하지만 그것은 질료적이며, 그렇다 하더라도 감각되지 않고, 추론된다. 여기서 카오스는 비존재의 상태이면서 비시간성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출몰과 소거, 또는 더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생성은 곧 어떤 애매모호한 지대로부터, 분할가능한 명석판명한 지대로의 우주적 생명의 드러남이자, 자기-제작(auto-poiesis)의 전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는 시간성이라는 차원에서 어떻게 길항하는가? 그것은 매우 심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즉 크로노스는 여기서 비존재와 존재를 가르는 표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료적인 차원에서 헤라클레이토스가 로고스를 정신적인 대상으로 경험한다면, 파르메니데스는 로고스를 통해 존재라는 형상적 차원을 인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시간성은 생성의 평면이냐, 존재의 평면이냐가 아니라 운동-힘으로서의 잠재태인가, 아니면 그것이 표현되는 현실태인가라는 문제를 가리키는 것이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생성을 배제하는 파르메니데스와 생성을 적극적으로 끌어 안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유 이미지는 각각 하나는 현실태로서 하나는 가능태로서 시간성을 경계로 사건을 경험하거나 인식하고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둘은 각각의 초재적이고 내재적인 평면에서 서로를 돕지만, 다시 서로에게 반발하면서 현출하고 소거되는 그 사유 이미지를 나누어 갖지 않겠는가?


자연은 그래서 카오스에서 로고스로 생성하면서, 생성 자체를 존재와 더불어 향유한다. 이때 존재는 현행화되는 지상의 왕이며, 생성은 지상의 왕의 권위를 가능하게 하면서, 자신을 사라지게 만들지만 그러한 소멸로 인해 똑같이 지하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일단의 해석과정을 여기서 멈추고 질문들의 해결을 뒤로 미룰 것이다. 나로서는 이 과정을 단번에 주파하고자 하기보다, 다시 어떤 현상학적인 훈습(이 논문의 II)을 우회함으로써 해석과 사건의 또 다른 측면을 바라볼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남겨진 철학사적 과제는 들뢰즈와 리쾨르를 살피면서 다시 자연스럽게 부각될 것이고, 그것은 그때에야 비로소 완연한 질문과 대답으로 형상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상학적인 훈습과정을 거치기 전에 한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분석의 전제로 남겨져 있던 해석자체의 철학사적 의미를 묻는 것이다. 과연 해석’(ἑρμηνεία, interprétation) 또는 해석하다’(ἑρμηνεύειν, interpréter)를 우리가 이토록 무책임하게 사용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에 따라 사건이 다시 어떻게 채색되는가? [계속]





  1.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성’(tauta)에 대한 논의의 차이를 분명하게 사유해 보는 것은 매우 힘든 작업에 속한다. 이 둘 모두가 ‘차이’보다 ‘동일성’을 우선적인 어떤 것으로 보았고, 이것을 통해, ‘차이’와 ‘타자’를 환원했다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텍스트 내에서 짚어 보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이 난점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오히려 플라톤에게서 더 심한데, 이에 관해 논하는 그의 아주 중요한 텍스트인 『파르메니데스』가 아직 충분히 해석되어 있지 않기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 현대철학에서 아페이론에 대한 관심은 아마도 시몽동이 불러일으킨 영향사 안에서 관찰될 수 있을 것이다. 시몽동은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 김재희 역, 그린비, 2011, 이하 EO, 페이지수는 한국어판)에서 본성(nature)이라는 말은 어떤 더 근원적인 것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고 논하면서, 이것은 인간 안의 인간성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서의 아페이론이며, 개체로서의 인간은 이 자연스러운 고유한 매체를 사용하면서 발명한다고 말한다(EO 356, 강조는 인용자). [본문으로]
  3. 문제는 이 과정이 존재론의 평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이다. 플라톤은 이에 대해 어떤 암시를 주고 넘어가고 있다. 앞서 인용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구절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4. 베르그송에게서 ‘시간의 공간화’에 대한 비판은 그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참조. 이 중요한 텍스트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본문으로]
  5. “Von woheraus aber der Hervorgang ist de, jeweilig Anwesenden auch die Engängnis in dieses (als in das Selbe) geht hervor entsprechend der nötigenden Not; es gibt nämlich jedes Anwesende selbst (von sich aus) Fug, und auch Schätzung(Anerkennung) läβt eines dem anderen, (all dies) aus der Verwindung des Unfugs entsprechend der Zuweisung des Zeitigen durch die Zeit.”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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