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출신의 아우구스또 보알(Augusto Boal)은 극작가, 연출가, 연극이론가로서 한국에는 덜 알려져 있지만 남미, 미국과 유럽에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의 어느 연극잡지는 현대 연극의 거장을 “3B"로 표현하면서 브레히트(Brecht), 부에나벤뚜라(Buenaventura)와 함께 보알을 거론하고 있다. 보알은 남미의 상황 속에서 연극의 수동적인 존재들, 민중, 관객을 주체로, 배우로, 연극 행위의 변경자로 만드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남미에서 연극은 서유럽의 연극을 그대로 모방하여 배우들에게 유럽식 말투와 억양을 연습하게 하고 상연함으로써 제 1세계에 대한 동경에 부응하고 있었다. 보알은 서유럽적인 상황의 연극을 보고 즐기는 것, 남미의 상황과는 동떨어진 연극이 소비되는 현실에 강한 의문을 가졌다. 보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그저 관객에게 동일시를 통한 감정의 정화만 주는 연극, 흔히 이렇게 표현되는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모자와 함께 자신의 뇌까지도 벗어버리고는’ 완전한 무아의 상태에서 극중 사건에 몰입해 들어가게 만드는 식이나, 브레히트식의 생각만 하게 하는 연극에 반기를 들었다. 주관성을 지나치게 몰고 가는 프루스트주의 또한 반대하였다. 보알은 정적인 정서를 전시하는데 있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정서의 강물과 그 역동성을 창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고, 연극은 갈등, 투쟁, 운동, 변혁이며 단순히 마음의 상태를 전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연극은 동사이지 형용사가 아니기 때문이며 연기는 행동하는 것이고 모든 행동은 반응과 갈등을 낳는다.” 그는 연극이 관객을 행동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여겼다. 행동 그 자체를 원했다. 관객을 대신하여 어떤 인물에게도 대신 생각하게 하고 대신 행동하는 권한을 주지 않는다. 권한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몸소 주역을 맡고 주어진 극적 행동을 변화시키는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하고 변화가능성을 토론하도록 한다.
보알의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의 메소드는 웜업과 구체적인 실행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집단을 이끄는 조커가 진행을 하지만 여기서 조커는 리더나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자가 아니라 안내하고 신호를 주는 정도의 역할이다. 연극은 놀이와 신체 훈련으로 시작된다. 먼저 몸에 대한 작업으로 시작한다. 보알이 말하는 억압은 실제로 존재하는 억압, 아직까지 불편함의 원인이 되는 억압, 뭔가 바꾸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던 억압을 말한다. 몸에 대한 작업에서 일단 심리적 정서적인 원인으로 인한 몸에 대한 통제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시작한다.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몸은 기계화되고 자동화되어 있는 것이다. 오른손 우세가 왼손의 기능을 더 축소시키고 시각이 강화되어 있음으로 해서 다른 감각들은 둔감하게 되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밥을 먹고 걷고 말하고 눈빛을 주고 받는다. 이런 과정들은 너무나 자동적이여서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순간이 너무나 많다. 이런 자동화로 인해서 우리는 다른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더 몰두할 수 있게 기능적으로 최적화되어 간다. 신체에 대해서 알기, 근육 소외로부터 벗어나기.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몸이기 때문에 신체의 활성화를 위한 웜업들로 시작한다.
장면의 주제는 함께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나와야 한다. 주제는 모인 사람들의 억압들에서 끌려져 나와야 비슷한 사회적 상황에 처한 관객들의 몰입과 관심을 끌어낼 수 있다. 보알은“억압받는 한 사람이 억압하는 한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이 억압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는가를 발견해내는 것이다. 이를 사회적 표현주의, 객관적 표현주의라고 하였다.” 배우들도 같은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이므로 억압들의 구체적인 경우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항의를 자극해 관객이 행동적으로 개입하도록 구성해야 한다. 억압은 제시된 연극, 이를 반모델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하는데 이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여기서 모델이 아니라 반모델인 것은 모델이라는 말에는 “따라야 할” 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은 “논쟁해야 할” 반모델인 것이다. 그 중 한 가지 방식을 살펴보면, 주인공이 다른 사람의 신체를 이용해서 4개의 장면을 몸으로 조각하여 나타낸다.몸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각각의 인물들은 정지된 자세로 있는 상태에서 한마디 대사를 한다. 관객은 추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 장면을 이렇게 시작하여 각각의 장면을 상연한다. 이제 관객은 언제든지 “스톱”을 하고 장면에 개입하여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극의 흐름과 결말을 바꿀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관객은 결코 진정한 의미의 관객,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보알은 관객이 그들의 의견을 무대에서 민주적이고 연극적이며 구체적인 방법으로 보여줄 수 있는 존재이고, 설사 그들이 주변에 머물러 있고, 거리를 두고 그저 바라만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반응 역시 이미 하나의 선택이며 참여인 것으로 보았다.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으려면 관객은 반드시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것을 결정해야 한다. 그것이 이미 행동이다. 또한 관객이 극의 흐름을 그만의 방식으로 바꿀 때도 반드시 해결책이 제시될 필요는 없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방법들을 제시할때 어느 것도 옳고 그른 것은 없으며 제시된 방법들을 토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의 목적은 보다 나은 나와 우리를 만드는 것이지 남보다 앞서려는 것이 아니다. 토론과정에서 관객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행동을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지난 금요일의 작업이 생각난다. 사람들이 하나씩 들어오고 원으로 둘러서서 한 사람이 움직임을 시작한다. 밤새 경직되게 굳어 있던 근육들을 일깨우고 서먹하고 어색한 가운데 웃기도 하면서 거대한 움직임과 소리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한바탕 놀고 극 역할 연습을 한다. 움직임 속에서 때로는 비구조적인 역할연기들이 나오곤 한다. 원숭이의 역할, 뭔가 이야기하는 사람, 그저 움직이는 사람,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사람 등 등이 나온다. 주요 작업으로는 관계도 그리기를 하였고 나를 중심으로 한 관계를 종이에 나타내 보았다. 남자는 네모로, 여자는 동그라미, 관계가 좋다면 직선, 안좋다면 꺽은선, 무관심하다면 점선으로.. 나를 중앙에 놓고 주변에 가족, 친구, 직장 등의 인간관계를 배치해본다. 이를 바탕으로 무대에서 의자로 중요인물을 배치하고 그 또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주로 마음 속에 품었지만 밖으로 내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 이 날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전하였다. 극적 행동을 한 후, 미래에 꼭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그 만남을 예측하며 해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원래의 예상과 달랐다고 하는 사람, 그 인물을 마주하며 느낌이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였다는 사람, 뭐 꼭 말로 해야 하냐는 사람 등등. 그저 막연히 느낌과 생각만 갖는 것과 행동 속에서 나타낸 것을 다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관객의 행동과 변화를 목표로 하지만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리빙씨어터가 관객의 행동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서 벌였다던 “생간”을 관객들에게 던져서 피범벅이 되게 하고 관객의 머리채를 잡고 쥐흔드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민주적이고 평화롭고 자발적으로 그들의 행동을 끌어낼 수 있다.
연극은 행복이어야 하며, 연극을 통해 우리 자신과 시대에 대해 배울 수 있어야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우선 그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연극은 앎의 형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연극은 우리가 미래를 그저 기다리고 있기보다 그것을 건설해 낼 수 있도록 돕는다.
행동! 행동만이 나의 삶을,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림 이미지 연극을 만드는 과정
금요일 토론연극의 내용을 플레이백 씨어터 공연의 마무리로 표현해본다면, 배우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엇갈려 걷는다. 빈공간을 찾아서.. 서서히 발걸음을 옮긴다. 한 사람이 멈추었을때 다른 배우들도 동시에 일시 정지한다. 그 한 사람이 서서 관객을 향해서 말한다. “옛날 옛날에 남동생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픈 이가 있었습니다.” 다시 배우들은 서서히 움직여서 발걸음을 옮긴다.
다른 한 배우가 서서, “옛날 옛날에 여동생에게 마음을 전하고픈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시 한 배우가 서서, “옛날 옛날에 상사에게 답답한 심정을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시 한 배우가 서서, “옛날 옛날에 남동생에게 알지 못할 나랏말로 마음을 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시 한 배우가 서서, “옛날 옛날에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고픈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시 한 배우가 서서, “옛날 옛날에 팔씨름 하다가 져서 업어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시 한 배우가 서서, “옛날 옛날에 엄마에게 마음을 전해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시 한 배우가 서서, “옛날 옛날에 딸에게 집안의 가풍을 가르쳐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두 모여서 손잡고,
여기 모인 우리, 우리들의 이야기, 잊지 못할 사람들, 잊지 못할 이야기...
<참고도서>
아우구스또 보알(1985). <민중연극론>. 민혜숙역, 창작과 비평사
아우구스또 보알(2003). <배우와 일반인을 위한 연기훈련>. 이효원역, 울력
헨리 토러(1989). <아우구스또 보알.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 김미혜역, 열화당
<사진>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금요일 토론연극 웍샵 자료사진
구글 아우구스또 보알의 자료사진
글 / 놀이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