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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 <미생>

수유너머웹진 2014.05.02 05:59 조회 수 : 6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

- 윤태호, 『미생』, 위즈덤하우스 




전성현/수유너머N 회원






나는 7차 교육과정의 세례를 첫 번째로 받은 사람이다. 내가 입학함과 동시에 철암국민학교는 철암초등학교로 개명되었고, 나는 사람들에게 초등학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우리에게 꿈의 중요성을 많이 가르쳐주었다. 당시 7차교육과정을 추진했던 이해찬 교육부 장관은 어느 연설에서 이제 학생들이 모든 것을 다 배워야 할 시대는 지났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시대의 관건이 하나라도 확실하게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할 수 있는 교육적 조건을 조성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수의 전문가를 키워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변화된 교육적 조건 때문일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유독 ‘꿈’이라는 단어를 많이 들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거나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는 것, 그래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 이러한 미래를 설계하는 것을 ‘꿈’이라고 할 때, 학교에서는 이러한 ‘꿈’의 중요성을 표어 만들기나 교장선생님의 연설, 열린 교육 등을 통해 우리에게 계속해서 심어주었다.

 


‘꿈’의 역설

중학교 때부터 이러한 ‘꿈’을 찾은 친구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는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말했고, 어떤 친구는 농구선수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런 꿈들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들은 많은 애로사항을 겪었는데, 그중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꿈이 공교육과 양립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친구 중 상당수는 고등학교 진학을 안 하거나 혹은 하더라도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은 남들과는 다른 길을 갔다. 하지만 문제는 그 길에서 ‘꿈’을 이룬 이들이 매우 소수였다는 점이다. 결국에는 이러한 예체능 계열도 승자독식인지라, 소수의 성공한 사람 혹은 천재적인 재능을 갖춘 몇몇 만이 부각될 뿐이었다. 나머지 대부분은 그 성공한 사람들의 경쟁력을 받쳐주는, 다시 말해 그 성공한 사람의 능력을 밝게 빛나게 해주는 후광에 불과했다. 내 친구들 중 대부분은 이러한 후광으로 그 분야에서 살다가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도피하듯이 군대로 떠나거나, 아니면 뒤늦게 수능공부를 시작해 대학에 들어가곤 했다. 그리고 그 애들은 나와의 대화중에 이런 뉘앙스의 얘기를 자주 하곤 했다. “꿈이 밥 먹여 주지는 않네..”

 


우리 시대의 자화상

이러한 내 친구들의 자조어린 모습과 『미생』 초반의 장그래의 모습은 참 많이 닮아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꿈을 이루기 위해 온 삶은 다 던졌건만, 장그래에게 남은 것은 취업하는 데는 거의 소용없는 바둑 기술과 속절없이 먹은 나이뿐이다. 다른 또래 친구들은 대학을 가며 미래를 설계하고 그 미래를 구성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자신에게는 미래를 설계할 기본적인 조건 자체가 아무것도 없다. 꿈을 위해 달려갔지만 결과적으로 꿈이 자신에게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계속 보이는 것은 스스로가 보기에도 한심한 자신의 모습 뿐.

 

열심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안 해서인 걸로 생각하겠다. 기재가 부족 하다거나 운이 없어 매번 반 집 차이 패배를 기록했다는 의견은 사양이다. 바둑과 알바를 겸한 것 때문도 아니다. 용돈을 못주는 부모라서가 아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자리에 누우셔서가 아니다. 그럼 너무 아프니까. 그래서 난 그냥 열심히 하지 않은 편이어야 한다.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세상으로 나온 거다.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뿐이다.(미생 1권 中)

 

장그래는 우리 세대의 아픈 뒷모습을 그 어떤 것보다도 절절하게 체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만 할 수는 없다. 절망한다고 해서 무엇 하나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먹고 살기 위해서는 ‘그들’처럼 살아야 한다. ‘그들’과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지만 결국 어찌 보면 ‘그들’보다도 못한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장그래이기에, 이제는 ‘그들’의 삶이 무엇보다 부럽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발버둥 치던 중, 장그래는 운 좋게(!) 대기업 인턴으로 낙하산 입사를 하게 된다.

 


결국 내 인프라는 내 자신이었다

장그래는 회사를 들어오면서, 회사를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시스템과 맞부딪히게 된다. 회사는 몇몇 개인들의 결단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오히려 회사를 지탱하는 것은 그러한 인격적인 것에 휘둘리지 않는 비인격적인 구조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비인격적인 구조인가? 채용시스템 같은 것이 그 예이다. 아무리 그 팀의 일원들이 장그래의 능력을 높게 쳐주어도, 학벌이나 스펙 등이 종합되어 나온 장그래의 점수가 낮다면 윗선에서는 그 점수를 근거로 그를 채용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 점수가 매겨지는 과정에서 같은 팀원들의 평가는 큰 변수가 아니다. 장그래는 고졸이다. 바둑밖에 한 것이 없기에 스펙은 당연히 전무하다. 장그래의 회사에서 고졸이 정규직이 된 경우는 없다. 그 회사의 시스템에 비추어 보건데 장그래는, 절대 정규직이 될 수 없다.




 

수많은 드라마들에서는 이러한 시스템을 초월해버리는 초인들을 제시하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초인에 수많은 시청자들은 대리만족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미생』은 그렇지 않다. 『미생』에는 초인이 없다. 결국 장그래는 회사로부터 퇴사 명령을 받게 되고, 팀원들로부터도 멀어지게 되며, 다시 자신의 일과 삶을 자신의 힘으로만 챙겨야 하는 상황으로 돌아오게 된다. “내 인프라는 내 자신이었다.” 결국 다시 장그래는 혼자가 된다.

 


『미생』은 무섭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만화에는 초인이 없다. 오히려 개인은 너무나 무력하다. 시스템 앞에서 장그래를 구원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난 이 만화가 좋다. 이 만화를 보며 느꼈던 주된 감정은 『슬램덩크』나 『시마 시리즈』와 같은 성장 만화를 보면서 느꼈던 감동이나 부러움 혹은 뜨거운 열정에 대한 갈망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무서움이었다. 언제 시스템으로부터 버려질지 모르는 우리들의 모습. 혹은 시스템으로부터 버려질 날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거기에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 그 자화상이 장그래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미생』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미생』을 보다보면 때로는 책장을 넘기기가 두려울 때도 있었다. 그래도 『미생』을 봤던 이유는 내 고민이, 내 외로움이, 내 불안이 장그래의 입으로, 행동으로, 눈빛으로 절절하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 감정이입이 당장에는 이 사회에 대한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할지라도, 난 이 감정이입을 통해서 기업이라는 시스템을 알 수 있었고 그리고 이 지식은 내게 시스템을 응시할 수 있게 해주었다. 미생을 통해 얻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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