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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미학-이진경

수유너머웹진 2014.11.03 14:31 조회 수 : 49

관계의 미학

(니콜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 『관계의 미학』, 현지연 역, 미진사, 2011)


 

 

이진경/수유너머N 회원

 



마르셀 뒤샹 때문이었다고 해야 할까? 현대예술, 특히 20세기 중반 이후의 예술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범위로 발산해가는 과정을 겪고 있다. 비평가나 미학자들은 그때마다 사조의 이름을 붙이고, 그 사조들을 다시 하나로 묶어 어떤 공통된 수렴의 지대를 만들고자 하지만, 어느새 거기서 벗어난 것들이 출현하면서 이미 그렇게 묶인 것 안에서마저 그 이탈의 공명자들을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탈과 발산이야말로 현대예술의 본질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부리요는 이 책에서 이런 이탈과 발산을 자기가 제시한 하나의 개념으로 묶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야망 대신 현명함을 선택한다. 그에 따르면 예술적인 현상은 시대와 사회적 맥락에 따라 형태와 양상, 그리고 기능이 변화하는 게임이지 불변하는 하나의 본질이 아니다. 비평의 임무는 현재의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다(17) 그리곤 그는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시대와 사회의 예술에 관계의 미학이란 하나의 공통이름을 부여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관계가 직접적으로 경험되지 않을 뿐 아니라 스펙터클한 재편 속에서 소원해지는 사회”(13)라는, 기 드보르의 상황주의적 진단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 사회에서 스펙터클에 대적하는 길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새로운 방식을 생산하는 것을 통해서만”(153) 가능하다는 것이 관계라는 말을 골라 현대예술을 "하나로 묶어주는"(tenir ensemble) 표지를 삼는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관계 아닌 것이 어디 있느냐는 식으로 반문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거기서 관계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가능한 새로운 관계의 발명을 뜻하는 것이기에.


그는 예술을 우발적인 만남을 통해 목적론을 비판하고자 했던 알튀세르를 빌어 만남의 장이라고 정의함으로써(29), 이런 문제의식이 발딛는 어떤 대지를 만들어낸다. 그 대지 위에서 그는 예술은 공감과 공유를 생산하고 유대적인 관계를 낳는”(24) 것이 되고, 작품은 어떤 만남을, 가능한 어떤 만남의 약속을 제안”(51)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인간 상호작용의 영역과 사회적인 맥락을 이론적 지평으로 삼는 예술”(22)을 그는 관계적 예술이라고 재정의한다. 나아가 예술작품의 형식/형태조차 서로를 잇는 요소이자 역동적인 응집의 원리”(33)라는 점에서 지속적인 만남이라고 간주한다(31). 작품이란 상이한 것들이 움직이며 마주치고 만나는 교점이란 점에서 선 위의 한 점이다”(33).


예술적 실천이란 주체간 관계의 발명”(36)이라고 하면서 레비나스의 얼굴이란 개념까지 끌어들이는 것(37), 이런 점에서 뜬금없는 조합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예술적 실천의 본질을 더 정확히 표현해 주는 것은 탈자연화된 주체성의 새로운 창조”(160~161)로 이해되는 가타리의 개념인 듯하다. 부리요는 예술이란 비언어적 기호화과정이라는 가타리의 개념을 기존의 기존의 물신주의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명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미술가가 자신의 팔레트로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듯이 새로운 주체성을 창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160~161) 이러한 것이 가능한 것은 예술적 실천이 사회적 실험의 풍요로운 현장이자 행동의 획일화로부터 부분적으로 보호된 공간”(14)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뿐이었다면, 그가 말하는 만남과 관계의 미학은 사실 매우 모호하고 추상적인, 그렇기에 누구나 입을 수 있지만 누구에게도 잘 맞지 않는 크고 헐렁한 옷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예술의 정의란, 그가 비판하는 보수적인 쾌락의 미학’(110~114)을 제외한다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좀더 적극적인 규정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가 관계적 예술, 관계의 미학을 통해서 추구하는 새로운 관계란 단지 새로움 자체만으로 충분했던 20세기 전반기의 아방가르드주의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 새로운 관계가 새로운 주체성의 창조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주체성의 생산을 공동체화의 전망 안에서 재규정”(169)하는 것을 뜻한다. 즉 그가 예술에 기대하고 있는 가능한 관계의 창안이란 공동체화라는 말로 요약되는 어떤 방향과 내용을 갖는다. 그가 이런 방향을 잡고 나아가려는 것은 현금의 상황이 개인의 해방 아닌 인간 상호간 소통의 해방, 관계적 차원에서 존재의 해방이 더 긴급”(107)하게 요청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 좀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부리요는 예술을 사회적 틈이란 개념을 통해 다시 조망한다. 사회 안에 존재하는 이란 통합되어 있다고 간주되는 사회라는 통일체 안에 존재하는 어떤 균열을 뜻한다. 즉 상품화가 야기하는 획일화로부터 부분적으로 보호되는 공간이고 사회적 실험의 풍요로운 현장인 예술은 이익의 법칙, 자본주의 경제의 틀에서 벗어난 교환공동체”(25)를 뜻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이 틈의 개념을 맑스와 연결하는 것은, 단지 문헌적 사실성과 별도로 충분히 이유가 있다. 이런 틈의 개념이 공동체와 연결되는 것 역시 그러하다. 공동체란 가치법칙, 잉여가치의 법칙, 이윤이란 관념에서 벗어난 어떤 관계를 지칭하는 개념이고, 심지어 상품의 교환이 아니라 선물의 교환에 의해, 아니 교환 아닌 증여/선물에 의해 구성되고 지속되는 관계를 뜻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코뮨주의자라면, 뜻밖의 장소에서 코뮨주의적 사유의 동반자를 만나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블랑쇼에게 68혁명 때의 거리가, 혹은 시위대가 결집된 대학 같은 장소에서 거대한 공동체가 출현했다 사라지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의 출현을 목도했던 것처럼, 부리요는 예술작품이 관객과 만나면서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공유하는 전시에서 순간적인 공동체성이 만들어지는 특권적 장소”(28)를 발견한다. 그는 이를 잘 알려진 벤야민의 개념을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끌어들여 다시 만나게 한다. 알다시피 벤야민은 아우라를 아주 먼 것의 일회적인 나타남이라고 정의하면서, 기술복제가 일반화된 시대에 예술에서 이런 아우라의 상실을 포착한다. 하지만 그런 상실에 실망하기보단, 역으로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에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구성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찾고자 했다는 점이 벤야민을 하이데거나 루카치, 아도르노 같은 동시대의 다른 사상가나 비평가와 구별해주는 유별난 점이고, 그의 선구적인 반시대성이다.


반면 부리요는 아우라를 자유로운 연합이라는 맑스의 공동체 내지 코뮨주의 개념과 연결하여, 현대예술을 아우라의 귀환으로 특징짓는다(107~108). 그는 현대예술의 아우라는 자유로운 연합이라고 단언한다(109).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그 자유로운 연합이란 사라진 것이거나 있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그가 예술이란 새로운 가능한 관계를 창안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상품화된 관계를, 스펙터클에 가려 소원해진 관계를 지금 여기에 다시 불러내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을 게 틀림없다. 그것은 벤야민 말대로 아득히 먼 것, 사라지고 소원해져서 보이지 않게 된 것을 작품을 통해, 전시를 통해 지금 이 자리에 불러내는 것이다. 그 불러냄의 장소에 관객들을 모아들여 새로이 돌아온 그것과 만나게 하고 그것 안에서 만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로운 연합과 손을 잡고 되돌아온 아우라의 개념은, 애초의 의미와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뒤집어 사용한 것이지만, 벤야민이 들었다고 해도 결코 반대했을 것 같지 않다. 역으로 아우라의 개념을 통해 예술의 공간으로 되돌아온 자유로운 연합’, 즉 공동체는 아우라처럼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나타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어떤 지속의 시도나 조직화의 시도에서 벗어난 일시적인 관계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된다. 이는 그가 생각하는 자유로운 연합이 자본주의와 다른 관계를 조직하고 지속하고자 했던 맑스적인 것보다는, 68혁명에 대해서조차 그런 지속의 시도 없이 그 자리에서 소멸해버린 공동체를 선택했던, 그래서 무위의 공동체란 이름으로라도 어떤 지속적인 공동체의 가능성을 제안하지 않길 바랐던 블랑쇼의 그것에 가까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가 예술에 대해 기대하는 상생적인 관계(53), 협력적인 체계(46)대화를 위한 통로’(23)상호주체성과 상호작용성을 출발점과 종착지로 삼고 그것을 그들 활동의 주된 정보제공자로 여기는(79) ‘소통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의외다. 거기에 더해 수많은 상대와 수신자들과 협상의 궤적으로서 작품”(45)이라는 관념이나, 엘리트주의와의 대비 속에서 관객과의 협상”(103)이 전시나 작품의 분석적 개념으로 들어오는 것도 그렇다(“협상과 동거의 구축자로서 곤잘레스-토레스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 여기에 투명성이란 개념마저 더해지면(73~74) 그가 생각하는 소툥 개념은 소박하고 순진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반면 그가 직접 원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일시성을 통해 맑스적인 것과 구별되는 공동체란, 블랑쇼나 바타유가 그랬던 것처럼 소통조차 소통불가능성이 나타나고 소통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메시지의 전달로 정의되는 소박한 소통의 개념과는 반대편에 서 있다. 예술이라는 새로운 만남의 장에서 일시적으로 출현하는 가능한 새로운 관계로서 자유로운 연합이 이런 소통의 개념과 결합된다면, 그것은 지속성을 갖는 공동체의 개념을 굳이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바타유)밝힐 수 없는 공동체’(블랑쇼)와 같은 역설적 개념으로 대체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는 좀더 밀고 올라가면, 만남을 통해 예술을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에까지 도달한다. 사실 아무리 만나도 만날 수 없는 것, 혹은 단지 만날 수만 있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자유로운 연합또한 그런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만남을 통해 예술을 정의한다는 것은 아무리 만나도 만날 수 없는 것을 만나게 하는 장이라고, 단지 만날 수만 있을 것을 만나게 하는 사건을 통해 생각하지 못했고 보지 못했던 것을 향해 관객들을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감각과 생각을 변환시키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관객과의 사이좋은 협상이 아니라, 협상하러 온 관객을 협상불가능한 지점으로 끌고 들어가, 감각과 생각을 바꾸지 않고는 협상할 수 없는 세계와 만나게 해주는 것이 작품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우라란 아득히 먼 것이 관객들이 있는 전시의 공간에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기보다는 반대로 관객들을 그들이 감각할 수 없었고 생각하지 못했던, 소통은커녕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아득히 먼 그곳으로 끌고가는 것이라고 재정의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라면 여기에 더해, 지속적 관계로서의 맑스적 공동체마저 이처럼 지속불가능한 것을 통해 지속가능성을 찾는 방식으로 재정의하는 길을 찾고 싶다.


*본 글은 2012년 6월 [경향 아티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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