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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과거, 혹은 과거의 구제- 이진경

수유너머웹진 2014.10.08 14:28 조회 수 : 6

 

두 개의 과거, 혹은 과거의 구제

(정혜윤, 『그의 슬픔과 기쁨』, 후마니타스, 2014)

 

이진경/수유너머N

 

 

 

흔히들 희망을 발견하는 곳에서 희망은 보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눈 있는 자, 무언가에 삶을 걸어본 자, 그런 식으로 삶의 비밀을 향해 손을 내밀어본 자들은 안다. 희망이 있다는 그 자리에 있는 건 사실 새까만 절망임을. 그것이 저리 환하게 반짝이는 것은 그게 가리우고 있는 어둠이 깊기 때문임을. 희망을 찾아 나선 이가 그 길의 끝에 있는 건 절망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심연을 본다. 피할 수 없이 그 심연 속으로 빠져든다. 허무의 심연. 삶을 걸고 찾아갔던 이라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심연이다.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있는 곳이 그런 곳이 아니었을까? 자동차가 좋았고, 자동차 만드는 게 좋았던 사람들, “사랑했던 연인들에 대해 그러하듯 차에게 말을 걸”(16)던 이 페티시스트들에게 공장은 단지 돈을 버는 곳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동료들이 있었다. 그런 애정과 욕망이 힘든 노동의 틈새로 흐르던 곳이었고, 그런 식으로 삶이 펼쳐지던 곳이었을 것이다. 파업 도중 단전된 공장에서 발전기를 돌려 도장공장이 망가지지 않도록 지켰던 것은 이 때문이일 것이다.


정리해고에 옥쇄파업으로 맞선 것 또한 모종의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만이 곤혹스럽고 억울하기까지 한 해고로부터 자신을, 그리고 동료들을 지켜줄 것이라는 희망에, 해고되지 않은 이(‘산 자’)들마저 가담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을 온통 다 걸었던 그 파업에서 그들이 본 것은 절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거대한 국가적 폭력으로 덮여온 게 아니라, 옆에서 생각지 못한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함께 일하고 함께 웃던 동료들로부터. “죽은 자들[의 파업] 때문에 산 자들마저 다 죽을 것이라는 회사의 소문 때문에, 혹은 회사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서 서로 새총을 겨누게 된 동료들(50), 그들에게서 느낀 배신감이 그것이다. “쌍차에서 해고된 이후 다시는, 살면서 두 번 다기 그런 고통을 받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은 바로 배신감이었어요. 신뢰가 깨지는 것이 제일 가슴아팠어요.”(35) 이 책에서 인터뷰한 26명 대부분이 호소한 고통이 그것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사람 마음의 밑바닥을 보았다(35). 심연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던 동료들의 마음 속에서 발견한 검은 어둠의 밑바닥. 그렇기에 몇몇 사람에 대해선 증오가 있었어요....사람들 많은 공장에서 공개적으로 복수하는 상상도 했어요.”(108)라는 말은 쉽게 공명을 일으킨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이들은 모두 이 절망을 살 속에서 체감한 이들이다. 희망의 자리에서 출현한 그 절망의 심연에 빠져들어간 이들이다. 해고와 파업 이후 자의반 타의반 죽어간 25명은, 이들이 빠져들어간 절망의 깊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지표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삶을 건 자들만이 빠져들 수 있는 심연이다. 삶을 진정 사랑한 자 아니면 결코 볼 수 없는 세상의 비밀이다. 그래서 일 것이다. 니체는 고분고분하기보다는 차라리 절망하라”(<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역, 책세상, 472)고 말한다. 어설픈 희망으로 위로받거나, 재빠르게 다른 장소로 눈을 돌려 다른 희망을 찾는 지혜보다는 절망의 선을 따라 그대로 따라가는 미련함이 차라리 낫다고 나는 믿는다.


절망에 정직하게 빠져드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강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슬픈 비밀을 알지 못하기에 힘차게 내달리는 건 용기가 아니라 눈먼 것이고, 그 비밀의 고통을 또 다른 희망으로 덮는 것은 두려움을 술로 지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차디찬 영혼, 노새, 눈먼 자, 술 취한 자를 두고 담대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두려움을 아는 자, 그러면서도 그 두려움을 제어하는 자, 긍지를 갖고 심연을 바라보는 자가 담대하다. 독수리의 눈으로 심연을 응시하고 있는 자, 독수리의 발톱으로 심연을 움켜잡고 있는 자, 그런 자가 용기있는 것이다.”(<차라투스트라...>, 472)


 

 


26명의 대담자들이 공히 보여주는 건, 이 용기다. 두려운 물리적 폭력 앞에 자신의 몸을 내미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끈기있는 것, 그것은 죽음과 이어져있는 저 검은 심연을 피하지 않고 대면하는 독수리의 용기였다. 물론 혼자서 5년의 시간을 그것과 대결하며 버티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이 그렇게 흘러넘치는 시간 아니었던가. 이들이 죽음의 선을 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옆에 있는 이들 때문이을 것이다. 배신감마저 공유할 수밖에 없었던 동료들, 가족의 시선마저 무겁게 만드는 삶의 무게를 견디도록 응원해주고, 동료들의 죽음 앞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던 동료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겠다고 외부에서 다가와 손을 잡아준 이웃들. 생활고와 갈등, 심적인 고통으로 떠났다가도 다시 되돌아오게 만드는 것, 그것을 그들은 흔히 책임감이란 말로 설명하지만, 그 말이 표현하는 것은 그들이 절망과 대면하고서도 살아가도록 만들어준 바로 이 동료와 이웃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이번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게 해 준다.


그러나 그렇게 희망의 꼬리를 잡는다고 해도, 그들이 통과한 시간은 잊고 싶은 것이었을 테고, ‘없었으면 좋았을과거였을 것이다. 이 책의 대담자들은 모두 솔직하게 말한다. 그날, 2009년 파업이 벌어진 그날을 잊고 싶다고. 절망한 이들이 어찌 그 절망으로 다가온 사건을, 그 시간의 고통 앞에서 웃을 수 있을까? 그리고 또 어찌 그 고통의 시간을 잊을 수 있을까? 그 다음해라고 다를까? “2010년은 잊고 싶은 해예요. 갈등이건 투쟁이건, 죽은 역사 같았어요. 갈등하면서도 별짓을 다했거든요. 전국순회투쟁도 하고. 그런데 정말 안먹히더라구요.”(133)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지난 5년간 해 온 건, 그 고통스런 사건을 반복하여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토록 잊고 싶다던 그 사건을 망각으로부터 구하려는 것 아니었던가? 5년전의 그 파업과 그 이후의 고통스런 시간, 그 속에서 죽어간 이들을 결코 잊을 수 없도록 쌍차라는 하나의 말 속에 압축시켜 넣으려는 필사적 투쟁이 아니었던가? 이 책은 이들 대부분이 모든 것을 적셔서 평범하게 만들어버리는 현재의 일상을 가로지르며, 그 과거의 시간을 반복하여 불러내고, 파업을 시작했던 그 시간으로 반복하여 되돌아가며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말은 과거의 구제라는 말이었다. 잊고 싶다는 과거를 반복하여 불러오고, 그 과거의 시간, 파업을 시작하던 시간으로 반복하여 되돌아가는 것, 그것은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빌면 그 과거를 구제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보인다. 과거, 이미 고통과 회한 속에 지나간 시간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을까?


과거의 구제는 과거에 대한 애착이 아니고, 과거의 긍정은 과거를 좋았던 시절로 추억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뿐이다. 과거의 구제는 오히려 스스로 만들어가는 미래의 시간으로부터 온다. 새로운 미래, 그러나 과거의 바로 그 사건이 없었다면 생각할 수 없고, 만들 수도 없었을 미래, 그것이 그 미래로 떠밀고 갔던 과거를 긍정하게 한다. 차라투스투라가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창조하는 자, 수수께끼를 푸는 자, 그리고 우연을 구제하는 자로서 나 저들에게 미래를 위해 창조할 것을, 그리고 이미 존재했던 모든 것을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구제하도록 가르쳤다. 사람들이 과거를 구제하고, 의지가 마침내 나는 그러하기를 바랐노라! 또한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랄 것이다라고 말할 때까지 일체의 그랬었다를 개조하도록 말이다. 나는 저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을 구제라고 일컫고는, 그렇게 하는 것만을 구제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차라투스투라...>, 327~28)

 


그런데 과거를 구제하는 그 미래는, 미래 이전에 온다. 긍정할 수 있는 미래를 만들어가는 현재의 실천 속에서 온다. 그 미래를 향해 주사위를 던지는 실천의 반복 속에서 어느새 변이의 선을 타기 시작한 신체, 과거의 시간으로 결코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끼는 변화된 감각, 잊고 싶은 시간의 고통 한 옆에서 피어나는 웃음들 속에 이미 도래해 있다. 슬그머니 다가와 더는 떼 놓을 수 없게 되어버린 새로운 자신 안에 이미 도래해 있다.


공장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개인주의적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했고, 일할 때도 혼자였다는(194~95), 화장을 공들여 하는 유제선은 공장으로 돌아가자며 싸웠던 오랜 시간의 한자락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내가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그것이 나의 일상일까? 내가 일상이라고 믿었던 그것이 정말 돌아가고 싶은 일상일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혼자 밥 먹고, 혼자 운동하고, 혼자 청소하고 혼자 일하고 혼자 책읽고....그 생활로 못돌아갈 것 같아요....‘내가 정규직화 걸고 싸우고 있는데, 정규직 돼서 쌍차 돌아가면 뭐할 건데?’ 갈등이 많고 목적이 불분명해졌어요....정말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가?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돼요.”(199) 스스로에게 던지는 이 질문,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를 묻는 이 질문과 더불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새로운 미래를 살게 된다. 그에게 과거는 이 새로운 미래에 이어진, 결코 지울 수 없는 사건이 된 것이다.


자동차를 만드는 프로젝트 H-20000을 하면서 가장 많이 웃었다는 고동민은 이런 생각을 더욱 분명하게 말한다. “저는 H-20000야 땀 흘리면서 일하는 게 너무 좋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런 일 하려고 공장에 들어가야 하나? 나는 새로워졌는데, 나는 공장에서 일할 때 느꼈던 그런 부품화된 사람이 아닌데, 훨씬 자유롭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는데....그런데 전에 일했던 그 모습 그대로의 공장에 들어가야 하나?’”(231) 공장에 돌아가자며 5년을 싸운 지금, 그는 이제 공장에 안 돌아가도 된다고까지 말한다. 오해가 걱정되었는지 부연한다. 그 말은 그런공장, “영혼 없는 그런 공장이라면 안 들어가고 싶어요. 우리가 기계처럼 여겨지는 그런 삶을 더 살고 싶지 않아요.”란 뜻이라고. “저는 새로운 사람이고 싶어요. 지난 5년 동안 있었던 일을 잊지 않는 새로운 사람이고 싶어요....이 경험들이 내 남은 평생을 관통하면서 살아있으면 좋겠어요.”(232~33) 하여 다시 공장에 돌아간다고 해도 이제 그는 다르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 나처럼 꿈꿀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걸 공장에 들어가서 보여주자.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어내자합리화하지 않고선(232)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말은 다르지만 회사 다닐 때는 옆에 대림자동차 해고투쟁자살자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몰랐다며, 자신만의 생활을 생각하며 살던 그때를 상기하는 이갑호도 마찬가지다. “자기 일이 아닌데도 내 걱정해주고 신경 쓰고 그런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때문에 이제는 다르게 살고 싶다고 하니까. 그간의 투쟁을 하면서 얻은, “주위에 늘 누군가가 있다. 따뜻하게 말 거는 사람이 있다는 깨달음 때문에 힘든 투쟁을 놀 듯이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체험 때문일 게다(230).


말을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지만, 또한 말할 때도 사람마다 다르게들 말하지만, 대부분의 대담자들에게서 느껴지는 감응은 이런 것이다. 해고 이전의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지난 5년간의 활동은 이미 그들을 그 5년과 다른 과거로 밀고간 것이다. 심연을 응시하며 절망과 대결하던 그들의 미련하기 짝이 없는 투쟁은,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도 전에 이미 과거를 충분히 구제한 것이다. 아니, 그런 만큼 사실 이미 그들에겐 새로운 미래가 시작된 거라고 해야할 것이다.


하여,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은 이성복의 시구를 이 책의 첫머리에 명구로 달았어야 한다고 느낀 나의 감응을 그저 외람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성복,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남해금산>)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4.5.18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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