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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넘어서는 모두의 권리, 도시권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한상연 역, 에이도스)





지안/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국가에 대항하는 도시권

권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기보다 항상 발견된다. 그건 우리로 하여금 이런 권리가 있었어?”라며 놀라게 만든다. 권리는 누구를 대상으로 얻어내야 하는 것이며 누구에게 한정되는 것일까? 먼저 권리의 사전적인 의미에서 권리를 부여하는 힘이란 법적인 힘이다.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은 국가이고 법이다. 따라서 권리 투쟁은 국가에 대한 법적인 투쟁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권리가 법적인 것만을 향해 있는 걸까? 한편으로 누구의 권리라고 했을 때 그것은 범주화된 특정 개인들, 집단들의 권리다. 따라서 마치 권리라는 법적인 힘 밑으로 집단들이 쪼개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반란의 도시>의 부제(“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에 언급되기도 한 도시에 대한 권리개념을 처음 마주했을 때, 도시권 역시 그러한 권리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권리 투쟁이 국가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확실히 도시권은 국가에 대한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항하는것이다. 하비는 도시에 대한 권리가 집단적 권리라고 말한다. 이때의 집단이란 앞서 말한 개별적인 집단과는 다르다. 하비가 말한 집단이란 도시에 사는 모두를 의미한다. “도시권은 배타적인 개인적 권리가 아니라 집단에 초점이 맞춰진 권리이다.” 따라서 도시 문제는 모두의 문제가 되며, 하비가 인용하는 르페브르의 말처럼 혁명은 도시에서 일어나야 한다.”







자본이 구성한 도시에 대항하는 도시권

하비는 도시권이 공허한 기표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도시권의 의미를 창출하고 집어넣는가의 문제이기에 그렇다. 즉 도시권이란 어떤 의미를 집어넣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내재적인 가능성들로 가득해야할 텅 빈 기표라는 것이다. 오히려 비어있기에 우리는 적극적인 의미를 새겨 넣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도시권이 집단적 권리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모호하다. 가령 시골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시권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물론 시골 지역의 대부분이 도시화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하비가 도시권이 모두에게 공통된 문제이고 도시 문제가 보다 근본적인 혁명이 가능한 장소라고 할 때, 우리는 자본과 도시의 연관성을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연립주택이 많은 거리를 걸어갈 때와 브랜드 아파트 안의 거리를 걸어갈 때 느끼는 감정은 매우 다를 것이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경비원들이 지나다니고, 곳곳에 cctv가 즐비하고, 주민이 아니면 출입 불가능한 상점들이 있다. 브랜드 아파트의 거리는 아파트 소유자들의 소유물인 것처럼 느껴진다. 자본은 도시를 개발함으로써 공공공간이던 도시의 거리들, 공원들, 공간들에 힘을 행사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적으로 구성된 도시, 자본화된 도시의 모습을 일상적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자본에 의해 구성된 도시에서 도시인들은 그에 걸 맞는 삶의 방식을 취한다. 하비에 따르면 사실 도시 공간의 형성은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자본가가 쉬지 않고 생산한 잉여생산물을 흡수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 한다.” 자본은 언제나 새로운 시장을 필요로 하고, 도시는 자본의 필연적인 필요에 따라 탄생한 산물이다 따라서 자본은 도시화되었고도시는 언제나 자본화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본화된 도시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 역시 소비주의적인 삶의 방식로 바꾸어버린다. 우리는 좋은 환경에 집을 구매해 값비싼 가전제품들로 채워넣고, CCTV를 설치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권 개념을 통해 대안적 도시를 상상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도시의 물리적인 구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대안적 삶의 방식과 결부된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도시권은 도시가 실현하는 여러 자원에 개인이나 집단이 접근할 권리를 넘어선다. 도시권은 도시를 우리의 마음 속 바람에 가깝게 바꿔나가고 재창조할 권리인 것이다.”






 

자본주의적 도시 공간을 바꾸는 헤테로토피아 도시 공간 

권리는 국가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지만, 도시권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다. 그렇지만 르페브르와 하비 모두 도시권에 대한 요구가 목표가 아니라고 못 박는다. 도시권을 둘러싼 싸움은 체제를 전복하는 궁극적 목표의 중간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권이 특정 집단의 권리나 국가에 대한 요구사항을 넘어서는 이유는 그것이 탄생부터 자본과 결탁되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를 대안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를 겨냥하는 일이다. <반란의 도시>에서 하비의 문제의식은 <도시에 대한 권리>를 저술한 르페브르로 거슬러 올라간다. 르페브르는 헤테로토피아 개념을 말하는데, 그것은 지배적 공간과는 이질성을 보이는 차이의 공간이며 예측하지 못한 실천들이 터져 나오는 공간이다. 도시에는 온갖 실천들이 존재하고, 이러한 실천들은 순간적으로 헤테로토피아 공간을 만들어낸다. 하비는 도시를 이렇게 정의 내린다. “도시는 온갖 유형, 온갖 계급의 사람들이 서로 싫어하고 적대하면서도, 하나로 뒤섞여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삶을 살아가며 공유재(common)를 생산하는 장이다.” 도시를 이렇게 생성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도시야말로 정확히 헤테로토피아 공간을 구축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도시 내부에는 이미 무수한 실천이 존재하고 도시 자체가 다양한 대안적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도시를 대안적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을 것인가? 도시권이라는 공허한 기표는 어떻게 자본의 약탈적 도시 구성에 대항하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넘어서는 혁명적인 의미로 치환될 수 있을까?




"탁심 게지 공원"를 없애려고 한 사건으로 촉발된 터키의 반정부 시위의 모습이다. 




어떻게 도시 운동이 혁명 운동의 중점이 되는가?

미국 전국도시권연합은 모든 공적 공간은 접근이 가능해야 하고, 누구나 사회화와 정치 행동을 위해 새로운 공동 공간을 만들어낼 권한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도시가 어떻게 모두의 것이 되는 걸까? 공장 노동자로부터 만들어지는 노동생산물은 개인적 소유가 아니라 집단적, 협동적 소유물이 되어야 한다. 하비는 맑스가 노동생산물이 그것을 생산하는 집단적 노동자에 귀속되는 소유형태를 말한 것을 도시에 적용한다. 도시 역시 그것에 투입된 집단적 노동이 생산해낸 방대한 공유재이다. 따라서 도시에 대한 권리는 그것을 만들어낸 집단적 노동자들의 권리가 된다. 공유재로서의 도시는 도시에 대한 권리를 그것을 생산한 자들에게 돌려준다. 도시권이라는 공허한 기표는 이제 넓어진다. 법에 못 박아진 이미 존재하는 권리가 아니라 도시를 사회주의적 정치체로 재건설하고 재창조하는 권리이며 내재적으로 움직이는 권리이다.


그런데 도시가 자본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이 도시 운동이 혁명 운동의 중점임을 말해주기에 충분할까? 도시는 반란이 벌어지는 무대에 불과한가? 아니면 도시라는 특수성에서 반란이 벌어지는 것일까? 하비는 책 말미에서 반자본주의 정치에서 도시를 둘러싼 운동이 근본적인 혁명 운동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다. 이것은 계급투쟁을 본질적인 투쟁으로 보았던 기존 맑스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기존 맑스주의에 따르면 도시 운동은 파생물에 불과하다. 도시 운동은 체제 자체를 향한 운동이라기보다 개별적이고 특수한 문제를 거론할 뿐이다

그러나 하비는, 르페브르도 말했듯이 혁명의 주체를 공장 노동자가 아니라 도시 노동자로까지 확장시켜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연대를 말하는데, 그것은 노동자와 도시 구성원들의 연대이다. “노동자와 지역 주민 사이의 끈끈한 연대가 아미 존재하거나 신속하게 구축될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은 도시에서 결합한다. 도시라는 지역사회 공간은 맑스주의 안에서의 공장에서 발생하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사회적/정치적 연대 가능성이 발생한다. 이제 도시라는 공간 자체가 정치체가 된다.

 

국가와 자본을 넘어서는 도시권

앞서 말한 것처럼 권리를 사전적인 의미로 보았을 때, 권리를 요구하고 투쟁해야 할 대상은 국가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만약 국가가 적극적으로 권리 투쟁을 수용한다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될 것이다.때 권리는 적극적으로 구성되기보다 국가로 포섭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도시권이 국가 차원의 개량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것은 법, 경찰, 행정 같은 국가 및 공적 사회제도는 물론 모든 국가에 뿌리박힌 국가 시스템 그 자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보편적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도시권의 보장이 어떻게 국가에 대한 요구사항을 넘어서서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하비는 상위 정치체 내부에서 시민권권리의 세계는 계급투쟁의 세계와 꼭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국가를 넘어서는 도시권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도시에 대항하는 사회주의적 도시의 건설이 동행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하비는 사람을 정말로 자유롭게 하는 것은 도시의 공기라고 말한다. 매연과 온갖 화학물질의 범벅인 도시에서, 우리가 역설적으로 자유로운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투쟁할 수 있는 영역이 도시에 남아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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