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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훌륭한 말과 글이 아주 많습니다. 풍성하게 운영되는 여러 다른 웹진과 블로그의 글들에서부터, 아카데믹한 격식이 오히려 그 가치를 가리고 있는 학술논문에까지, 수없이 많은 좋은 글들이 있습니다. 글만이 아닙니다. 인터넷에서 부쩍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된 강연과 발표에서도 보석 같은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수유너머N이 추천하는 말과 글]에서는 도처에 흩어져 있는 훌륭한 말과 글을 모아, 추천의 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권하려고 합니다. 

-코너 소개-



사회운동의 미시적 조건들





만세/수유너머N 회원





오늘 [수유너머N이 추천하는 말과 글]에서는 사회운동의 미시적 조건에 대해 설명하는 강연과 논문을 소개하려 합니다. 사회운동은 우리 사회의 성격을 크게 바꾸는 주요한 동력이었습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왕 없는 통치의 시대를 열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은 현실 사회주의라는 실험을 시작하게 만들었습니다. 한국에서도 1960년 4.19 항쟁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종식시켰고, 1987년 6월 항쟁은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많은 사회 운동의 결과물입니다. 


 이런 사회운동이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하고 예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앞으로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왔고 바뀔지 알아보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설명은 많은 경우 거시적 조건에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주로 거대한 경제적 시스템의 변동이라든가, 정치적 억압의 구조라든가 하는 요인들로 사회 운동을 설명해왔다는 말입니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구조적으로 착취 받고 있기 때문에, 그에 반하는 노동운동이 증가할 것이라는 맑스주의적 분석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거시적 요인에 기댄 분석은 여러 중요한 성과를 보여 왔습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회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 있습니다. 소위 ‘미시적’ 요인들로 분류되는, 사람들 사이의 구체적 관계나 믿음 같은 것들입니다.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요인들이 많은 사회 운동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상황이 적지 않습니다. 동일한 구조적 억압을 받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저항 운동을 시작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것들은 구조적 압력 외에, 구체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여러 미시적 요소에 주목해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데렉 시버스(Derek Sivers)의 “어떻게 운동을 시작하는가?”(How to start a movement) 라는 이름의 강연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3분 정도 되는 강연에서 시버스는 최초의 추종자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뭔가 지금의 질서를 벗어난 일을 하는 최초의 리더는 혼자 있으면 그저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일 뿐입니다. 하지만 최초의 추종자가 생기게 되면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며,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리더가 됩니다. 시버스는 리더 뿐만 아니라, 최초의 추종자도 운동이 일어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기에 리더 만이 운동 시작의 중요한 원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시버스는 한 사람이 있을 때와 두 사람이 있을 때, 그리고 세 사람이 모였을 때의 미세한 차이에 주목함으로써, 운동이 일종의 임계점을 넘어서는 동학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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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의 연구결과들은 사회운동을 설명하는 전통적인 구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요인에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서형준·이재열·장덕진이 쓴 “신뢰의 유형과 정치참여: 5개국 비교를 중심으로”(Type of Trust and Political Participation in Five Countries: Results of Social Quality Survey)라는 논문은 특히 신뢰라는 요인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신뢰의 수준과 유형은 거시적인 구조적 압력 못지않게 사회 운동의 발발과 진행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 영향은 각 개인의 사회운동 참여 결정에서부터 사회운동의 방향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합니다. 예를 들어 참여 결정에 신뢰가 미치는 영향을 살펴봅시다. 사실 사회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경제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 현명한 일은 아닙니다. 사회운동의 결과로 얻게 되는 과실은 사회운동에 참여하나 그렇지 않으나 누릴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에 가능하면 나는 비용을 들여 참여하지 않고 과실만 누리는 것이, 즉 무임승차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 뿐만 아니라 타인도 어떤 일에 불의를 느끼고 기꺼이 나설 것이라는 신뢰가 있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사회 운동의 발발과 진행이 크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논문은 공개되어 있습니다. 아래의 링크를 따라가시면 PDF 파일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영어로 되어 있어서 조금 아쉽습니다만, 논지가 명료하기 때문에 영어 실력이 그리 좋지 않아도 읽는데 큰 무리는 없습니다.

(http://isdpr.org/isdpr/publication/journal/DS42-1.htm)



 해당 논문은 한국 사회의 신뢰 수준과 유형을 다른 국가들과의 비교를 통해 드러내는 한편, 신뢰의 유형이 정치참여의 양상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은 불신의 비중이 가장 크며, 기관신뢰와 대인신뢰가 각각 22.7%, 7.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독일 같은 선진국과 비교하면 크게 낮은 수준이지요. 




그림  “Type of Trust and Political Participation in Five Countries: Results of Social Quality Survey,” Development and Society, Vol. 42, No. 1, p. 12.에서 발췌. 



 논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신뢰는 여러 유형의 사회운동 참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은 이전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논문은 여기서 더 나아가 신뢰의 유형을 일반 신뢰, 기관 신뢰, 대인 신뢰로 나눕니다. 그리고 각각의 유형에 따라 더 활발하게 일어나는 정치참여를 추적합니다. 결론만 간략히 말씀드리면, 기관 신뢰를 강하게 가지는 경우 투표나 대 정부 발언 등으로 정치참여를 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 대인 신뢰를 강하게 가지는 경우 대 정부 발언은 물론 서명운동이나 시위 및 파업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사회 운동의 양상이 국가 별로 왜 다른지를 설명해주는 주요한 결과가 됩니다. 예를 들어 기관신뢰가 강한 한국 같은 경우는 투표나 대정부 발언 등이 강하게 나타나겠지만, 대인신뢰가 강한 이탈리아 같은 경우는 시위나 서명운동으로 사회운동이 표출될 확률이 큽니다. 이는 신자유주의라는 유사한 질서가 전 세계를 휩쓰는 오늘날, 왜 국가들 사이에서 사회 운동의 양상이 다른지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통찰입니다.  


 사회운동은 이 세상을 바꾸어왔고, 앞으로도 바꿀 것입니다. 그 동학을 이해하는 것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시버스의 강연과 서형준·이재열·장덕진의 논문은, 여기에 접근하는 색다른 시선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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