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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맑스꼬뮤날레 리뷰]

 

 

공산주의자는 어떤 ‘주체’인가?

- 최원, 「공산주의라는 쟁점: 바디우와 발리바르」

 

 

 

 

노 의 현 / 수유너머 N 회원

 

 

 

이 글은 제 7회 맑스코뮤날레의 첫 날 첫 번째 기획섹션이었던 ‘맑스와 정치철학’에서 발표되었던 글이다. 매우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진 발표와 토론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지는 못했지만, 글의 세부적인 내용과 현장에서 이루어졌던 토론의 방향으로 미루어보아, 애초에 이 글은 바디우와 발리바르의 세심한 비교라기보다는, 바디우의 주체화 이론에 대한 발리바르의 비판을 통해 발리바르의 주체 개념이 가지고 있는 함의를 좀 더 다뤄보고자 했던 듯하다. 여기서 바디우와 발리바르의 대립지점으로 도드라지고 있는 것은 ‘대표(representation)의 문제이다.

 

바디우는 (발표자의 표현처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개인숭배’라는 개념을 끌어와 주체화과정을 설명한다. 바디우는 공산주의를 하나의 ‘이념’으로 파악하는데, 개인들은 이 이념의 대문자 주체로의 동일시를 통해 능동적 역량을 획득하게 된다. 즉 여기서의 주체화란 이념의 작동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때 스파르타쿠스, 로베스피에르, 레닌 마오, 체 게바라와 같은, 수없이 많은 대중의 행동을 ‘대표’할 일자가 필요한데, 이러한 이름들을 구심점으로 주체화 과정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비로소 맹목성을 버리고, 역사 속에 투사되고 ‘사실’로서 제시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대표’를 통해 만인을 하나로 통합하고, 하나의 주체로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 바디우의 주체화과정에서, ‘개인숭배’란 위험하지만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와 그가 참석했던 포럼, "공산주의의 이념 2013".

이 발표는 발리바르가 왜 이 포럼에 참석하지 않았는가로부터 시작된다.

 

 

발리바르는 여기서 바디우의 ‘대표’ 개념 자체를 공격한다. 바디우는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다른 이념들과는 다른 진정한 이념으로서 특권화시키고 있다. 즉 주체를 종속시킴으로서 의존적이고 타율적으로 만드는 다른 이념들과는 달리,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주체를 절대적으로 자율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여기서 왜 공산주의가 다른 이념들과는 구분되는 ‘이념’인지를 설명하지 않고서는, 그로부터 발생하는 종속화의 문제를 피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반박한다. 이는 사실상 바디우의 ‘대표’ 개념이, 개인들 사이의 모든 거리를 지우고 그들을 분할 불가능한 하나로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그 이전의 슈미트와 같은 이들이 사용하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발표 이후 토론자(김상운)가 발리바르의 비판을 지적하며 던졌던 질문 또한 ‘대표’ 개념 자체를 다르게 사유하고자 했던 발리바르의 문제의식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보통 정치에서의 ‘대표’의 문제를 사유할 때 ‘대의제란 민주주의의 본령’이라는 다양성의 견지에서 사유하는 쪽과 ‘민주주의란 새로운 과두정이나 귀족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동일성의 견지에서 사유하는 두 가지 커다란 경향이 있다. 토론자는 이 두 입장의 긴장에 대한 사유 없이 ‘대표’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긍정적인 함의를 갖을 수 있냐고 반박한다. 이에 대해 발표자(최원)는 ‘대표’라는 개념에 대한 기존의 논의가 가진 이와 같은 구도에 반대하는 것이 발리바르의 입장이라고 대답하는데, 이 구도를 벗어나야지만 ‘대표’의 문제를 새롭게 사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갈등을 대표하는 공산주의자?

 

발리바르의 ‘대표’ 개념은 그의 주체 이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네그리는 발리바르에게는 “맑스만 있고 레닌이 없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이 비판에 담긴 것은 그에겐 국가를 어떻게 장악하고, 주권 권력으로 조직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 즉 혁명적 주체의 국가 권력 장악과 변화에 대한 로드맵이 없다는 지적이다. 글에도 나타나 있듯, 발리바르에게 혁명적 주체로서의 ‘공산주의자’란 프레드릭 제임스의 ‘사라지는 매개자’라는 개념을 빌려, 과정 속에서 소멸하는 형상을 갖는다. 하지만 발표자는 정확히 이 부분이 발리바르에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발리바르의 기획에서 ‘P.T 독재’라는 맑스주의의 오랜 전략, 즉 주권자로서 노동자계급을 조직해내고 이를 통해 국가를 소멸시킨다는 이행전략은 폐기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하나의 권력으로서의 주체를 생산할 필요가 없다. 바디우에게는 필수적이었던 ‘주체화를 위한 대표’라는 역할 또한 사라진다. 대신 발리바르가 ‘대표’ 개념에 부여하는 역할은 ‘갈등 그 자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갈등은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대표되어야한다. 때문에 정치에서 대표의 문제는 공적공간 안에서 어떻게 갈등을 대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발표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주권적 권력이 하나의 주체 혹은 집단에 의해 장악되지 않은 공간을 사유했던 마키아벨리의 논의를 참조한다. 그는 주권적 권력의 분점과 갈등을 통해 누구도 독점하지 못하는 공적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는데, 발리바르에게서 발견되는 것 또한 이런 공간에 대한 문제의식이라는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와 칼 맑스의 <공산주의당 선언>

 

 

그렇다면 이때의 주체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발리바르는 맑스의 <공산주의당 선언>에 등장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적으로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 정당들 중에서 가장 단호한 부분, 언제나 운동을 추동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부분이다”라는 문장으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공산주의자의 형상으로 확장시켜나간다. 맑스의 문장 속 공산주의자들의 ‘단호함’은, 발리바르에게 와서 ‘그들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한 단호함’이라는 측면이 강하게 부각되는 듯하다. 즉 조직의 내부로부터 문제제기를 감행하고, 다른 조직과의 관계를 문제 삼으며, 그를 통해 하나의 조직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조직의 안팎을 넘나드는 여행하는 자가 바로 공산주의자라는 것이다. 이들은 조직 내외부의 갈등을 분석하고, 조직 간의 언어적 차이들을 번역해냄으로서, 갈등을 지워버리는 것이 방식이 아닌 “갈등 속에서 연대를 생산하는 자”들이다. 때문에 발리바르가 제시하는 공산주의자들은 뚜렷한 정당의 형태, 숭배받는 개인의 형태로 대중들을 대표하는 ‘일자’의 형상이 아니라, 각각의 상황 속에 개입하는 매개자의 형상을 띤다. 공산주의자는 도처에, 그다지 드물지 않게 활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디우의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대한 발리바르의 비판은 그 스스로에게는 어떻게 적용 될 것인가? 물론 발리바르는 ‘대표’의 개념을 바꾸어 냄으로써 바디우 식의 ‘일자를 통한 주체화’와 그에 따른 난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공산주의란 하나의 이념’이라는 바디우의 해석에 맞장구치며, 공산주의자란 현재의 세계를 부정하고 다른 세계를 실현하려한다는 점에서 모두 이념주의자/관념론자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라는 이념과 발리바르의 주체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 갈등을 대표할 수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역량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여기서 발리바르는 기존의 주체화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기보다는, "주체" 개념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론 발리바르의 주체 이론을 통해 사유해야 할 것은, 이것이 어떻게 기존의 주체화를 대체할 것인가보다는 이러한 주체성 개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전략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일 것이다. 그렇다면 발리바르는 이 상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려나가고 있을까? 동일성이 아닌 갈등을 통한 연대를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어진 다른 세션에서 스피노자의 공동성과 그를 통한 공동의 역량을 이야기하는 한 발표자에게 “스피노자의 공동성 개념에 담긴 갈등이나 세력관계는 집합적 역량을 사유할 때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물었던 것 또한 발리바르를 통해 최원이 고민하고자 하고 있는 바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제 7회 맑스코뮤날레의 팜플렛. 너무 상큼했다 *^^*

 

 

이번 코뮤날레의 주제가 “다른 삶은 가능한가: 맑스주의와 일상의 변혁”라는 점에서, 발표를 듣는 내내 발리바르는 여기에 매우 잘 어울리는 이론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바디우와 비교해봤을 때, 계속해서 진리를 담보할 ‘결단’을 요구당하는 그의 비장한 주체보다는, 복잡한 갈등으로 가득한 현재 상황에서 출발하지만, 그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들을 만들어나갈 것을 요구하는 발리바르의 주체가 현재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의식을 던져주기에 더 적합한 듯하다. ‘어떤 주체를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어떤’ 주체라기보다는 어떤 ‘주체’에 방점을 찍어 새롭게 사유해볼 만한 기회를 제공하는 이론가. 발리바르의 사유에 이런 관점을 가지고 좀 더 꼼꼼히 접근해본다면, 그 글의 난해함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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