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철학.예술 :: 철학과 예술 분야의 리뷰입니다!


 

  

 하이데거는 시인을 일컬어 존재의 거처를 지키는 파수꾼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왜 스스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존재의 터, 텅 빈 그 자리의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시쓰기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수행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시를 들여다보는 일은 나와 더불어 세계의 본질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 됩니다. [풍문으로 들은 시]에서는 2000년 이후의 출판된 한국의 좋은 시집들을 한권씩 소개하려 합니다. 풍문으로만 들었던 시를 읽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코너소개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는 에코

-김행숙, 에코의 초상, 문학과지성사, 2014

 

 

 

 

하얀/수유너머N 회원 

 

 

 

 

 김행숙 시인은 1999년에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4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3), 이별의 능력(문학과지성사, 2007), 타인의 의미(민음사, 2010), 에코의 초상(문학과지성사, 2014). 김행숙은 시쓰기를 삶의 운동, 사랑의 행위이라 말하며, “이 말썽 많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줄곧 써오고 있다고 한다.

 

1.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

  입은 내부와 외부를 매개하는 징검다리 같은 것이다. 당신은 입으로 음식을 섭취해 내부로 흡수하고, 입으로 누군가와 키스를 나누며 이야기도 나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내부에서인가 외부에서인가. 말의 자리는 어디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난감해진다. 그것의 표면적 위치는 입이지만 그것의 원인이, 결과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내부와 외부의 교감만이 말을 탄생하게 한다. 내부와 외부가 교감하는 자리, 말의 자리인 그곳으로, 입으로 김행숙의 에코의 초상은 우리를 둘러앉게 한다.

  입은 아직은 침묵하지 않은 침묵을/침묵으로 들어가는 입구를/입구에서 조금만 더,/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기다리고, 끊어질 것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람”(존재의 집, p.12)이며 세계가 변했거나, 내가 바뀌었거나, 보이던 게 안 보이고, 안 보이던 게 보(연못의 관능)”이는 연못이자, 존재의 비밀이 침묵으로서 저 너머에 두고 있는 문이다.

 

피오트르 우클란스키, <무제>

입은 내부와 외부가 교차하는 자리, 말들의 자리다.

 

2.증식하는 타자들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슴 속에 일렁이는 말들을 잠궈 둔다. “무역회사에 다니다가, 보험회사에 다니다가, 집에서 노는 친구”(연못의 관능, p.22)는 입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며 들끓는 말들이 비밀로서 유지되길 바란다. 두통에 시달리는 아담말하면, 안될 것 같은 말만 자꾸 생각나서 침묵”(아담의 농담, p.19)한다. 하지만 정상적인 ""가 비밀로 가둬둔 ""는 자꾸만 증식한다. 아담의 잠옷에서는 그녀는 스스로 행복한 남자라 생각하는 그에게 짐승이라 말하며 떠난다. 그녀는 보았지만 그는 보지 못했거나, “뒷모습을 기억하고 앞모습을 망각하”(젊은이를 위하여, p.48)고 싶었기에 가둬둔 짐승. 그녀가 짐승이라 말했던 그것은 라는 같은 옷을 입었지만 나를 뚫고 출현하는 것이다. ‘는 이렇게 들끓고 있으며, 차이나는 것들로 이루어진다. 나라고 확신하는 입에서 나오는 말 앞에서, 이 말이 누구의 것이냐고 질문하는 난감함, 이는 라는 동일성의 토대가 차이나는 것들이라는 우주 안에 서 있다는 증빙일 것이다.

  “공기처럼, 가스처럼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퍼져나가는 가스처럼, 퍼져나가는……목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 멀리 퍼져나가는……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도시가스공사의 메아리, p.53) 공기와 가스처럼 를 살리면서도 보이지 않는 그것의 목소리. 이 차이나는 것들, 혹은 이 목소리를 우리는 타자라고 부르자. 이때 타자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아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그것은 라는 것이 출현하기 이전에 우리이자 의 토대이다. ‘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침묵 속에, 망각 속에 머물러 있는 타자를 어떻게 불러낼 것인가. 이것이 김행숙이 마주한 물음이다.

 

 

세바스티안 베이니크, <Doublefaced No.21>

수많은 타자들, 그것이 존재의 집이 아닐까.

 

  타자는 의 토대이자 가 보지 못했거나 외면하여 망각한 앞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이는 의 죽음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는 나의 죽음과 더불어 서 있다. 이 죽음을 보는 것, 담지하는 것은 타자일 터이다. “우리가 모두 통증에 연결되어 있다면, 통증이 우리의 중앙관제시스템이고 시민들의 폐활량이고 침묵의 지평선”(아담의 농담, p.17)으로, 이 죽음을 목도한 고통이야말로 우리로 연결한다. ‘와 함께 걷는 죽음을 목도했다는 이유로 타자는 고통의 공동존재로서 우리가 된다. “너에게만 보이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내 거울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좁은 문, p.81)

 

  입술들의 물결, 어떤 입술은 높고 어떤 입술은 낮아서 안개 속의 도시 같고, 어떤 가슴은 크고 어떤 가슴은 작아서 멍하니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 같고, 끝 모를 장례 행렬, 어떤 눈동자는 진흙처럼 어둡고 어떤 눈동자는 촛불처럼 붉어서 노을에 젖은 회색 구름의 띠 같고, 어떤 손짓은 멀리 떠나보내느라 흔들리고 어떤 손짓은 어서 돌아오라고 흔들려서 검은 새 떼들이 저물녘 허공에 펼치는 어지러운 군무 같고, 어떤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꿈에서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영원히 보게 될 것 같아서 너의 마지막 얼굴 같고, , 하고 입을 벌리며 아, 하고 입을 벌리는 것 같아서 살아 있는 얼굴 같고, -「에코의 초상」 전문

 


3.시간의 지평에서 만나

  서로의 죽음을 마주한다는 것, 고통을 목도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김행숙의 시집은 이런 비극미만으로 가득하지 않다. “원하지 않는 것 속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네”(젊은이를 위하여, p.48), “무엇인가를 찾는 이야기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이야기가/같은 이야기라면”(허공의 성, p.96)과 같은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김행숙은 타자의 죽음을 다른 시간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자 한다. 가령 철길에서와 같이 가능성의 차원에서 유유히 흐르던 시간을 구성하고자 한다. 그것은 철이 철길이 되지 않았을 때의 여러 방향에서 탄생되는 인생들, 혹은 밤에, 나무에 깃드는 새와 아침에, 나무를 떠나는 새는 같은 새의 다른 가능성, 다른 꿈들”(물방울 시계, p.54)을 펼쳐내는 일이다. 죽음을 목도하며 나의 죽음을 껴안은 타자들, 메아리들(echo)의 목소리를 다시 살려내는 일이기도 하다. 비로소 고통의 자리는 가능성의 미로로 탈바꿈되는 시간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중력을 이기지 못해 가벼워진 새는 죽은 새이자 중력을 이기며 자기의 무게를 견디는 날아가는 새이다. 당신은 어떤 시간을 구축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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