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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시집

- 김혜순,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이혜진 / 수유너머 104 회원 




저녁달

 

 

 


                                                   김혜순

 

 

 

아직 안 보이는 그가 비명을 내지를 때마다

새가 튀어올랐다

 

새들이 하늘과 땅의 경계를 자꾸 찢고 지나갔다

옥양목 찢어지는 소리가

강물 밑까지 울렸다

 

나는 검은 강물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 아직 안 오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를 두 잔째 다 마셨다

귀울음 소리가 커지자 머리통이 점점 부풀어올랐다

머릿속 벌통을 새의 부리가 건드렸나?

머리통 속으로 송사리떼가 드나들었다

 

그러다 불현듯 모든 것이 멈추었다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지는 해 속에서 그가 너울너울 터져나왔다

내 깊은 강물 속에서 박하 냄새가 환하게 퍼졌다





    김혜순의 네 번째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90 년대 를 마주한 우리들의 초상과도 같다. 서구 냉전 시대의 종식, 처음으로 대통령 직선제로 탄생한 정부, 88년 올림픽 이후 세계화에 취한 서울, 세상은 새롭게 쓰이고 있었다. 하나의 프레임으로 읽을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김혜순의 시도 이전과는 달라진 언술의 형태를 보여준다. 물론 특유의 당돌한 언술 방법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총구를 겨누었던 적은 이미 몸을 숨겼고, 마주한 익명의 욕망은 그의 시적 대상을 와해시키고 새로운 탐색을 요구했다.

 

    시는 시인이 비명을 내지르는 장소가 아니라 비명을 표현하는 하나의 냉엄한 작품 공간이라고 네 번째 시집에서 밝힌 것처럼 그는 해석의 지평을 넓히고 있었다. 이러한 의지는 시집의 제목,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로, 경전으로 서울을 선택하고 단지 공간으로서의 서울이 아닌 동시대를 살아가는 자신과 타자가 위치한 풍경에 대한 탐색과 사유를 시작한다. 자신도 타자로 만드는 존재의 경계를 허무는 경쾌한 도발을 시도한 것이다.

 

   소개하는 저녁달 역시, 그의 달라진 시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외피로는 투쟁의 대상이 사라진 자리에 연모의 대상을 둔, 자칫하면 서정성이 강한 시로만 읽힐 위험도 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시인의 쓰고자 하는 강한 의지는 그런 위험을 단숨에 뛰어넘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립 구도의 투쟁에서 화해와 초월의 시적 진술로 태도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오감을 건드리는 그만의 감각적 시어는 풍경과 물아일체(物我一體) 되는 순간에서 정말 코가 뻥 뚫리는 시원한 박하향을 맡게 했다. 덕분에 나 역시 커피를 두 잔째 마신 우중충한 오후가 환해졌다. 옥양목 찢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상상의 한계를 넓혀 저녁달을 다시 읽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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