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철학.예술 :: 철학과 예술 분야의 리뷰입니다!


 

  

 하이데거는 시인을 일컬어 존재의 거처를 지키는 파수꾼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왜 스스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존재의 터, 텅 빈 그 자리의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시쓰기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수행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시를 들여다보는 일은 나와 더불어 세계의 본질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 됩니다. [풍문으로 들은 시]에서는 2000년 이후의 출판된 한국의 좋은 시집들을 한권씩 소개하려 합니다. 풍문으로만 들었던 시를 읽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코너소개

 

 

 

 

 

퍼져라, 웃음아

서효인, 『소년파르티잔 행동 지침』(민음사, 2010)

 

수유너머n 회원/하얀

 

 

 

 

 

비애가 삼켜버린 불안한 웃음

 

  노, 노점상 같은 겨울에 부부는 토, 토스트를 뒤집어 보기로 했단 말이지 허기처럼 말랑한 돈들을 특제 소스에 말아 먹어 보겠다는 것이 이번 겨울에 당, 당찬 계획이었단마, 말씀이야 흐흐흐

 

  옆방에서 느, 늙은 토스트가 이틀간 써, 썩어 가는 걸 몰랐던 건 흐흐 특제 소스가 좁은 방 구석구석에서 그 부부의 눈과 귀를 이글이글 구워 냈기 때문, 팔다 남은 울릉도 오, 오징어 몇 마리 가져다줄 때에도 몇 안 남은 앞니로 오물오물 잘만 씹어 삼키시더니 흐흐흐 이틀이나 써, 썩도록 내버려 둔 건 누구의 잘못이 아, 아니라니깐

  토스트 구운 지 석 삼 일 정도나 됐을까 햄 치즈 다, 달구는 냄새보다 도, 독하고 노르스름한 냄새가 무언가 저 할망구가 우리 몰래 고등어자반이나 몇 점 잡수시나 했지 그런데 이 노친네가 전기장판 흐흐흐 그러니까 저, 전기장판 뜨끈하니 켜 놓으시곤 이불 하, 한 장 얹으시곤 세상에서 가장 느, 늙어 버린 토스트가 되, 될 줄이야

  할망구 구워지는 내, 냄새가 온 동네에 퍼지는데 그도 그, 그럴 것이 엉덩이 살점이 벌것게 달아올라 상한 살코기 냄새가 나더라고 몸에 있는 온갖 구멍에서 화,황갈색 소스가 이불 옆까지 새어 나왔지 쭈글쭈글한 엉덩이에 지,짓눌린 소스의 냄새는 온 동네에 시큰하게 퍼졌지 흐흐흐 너, 너무 뜨거워 어떤 포장용지로도 쌀 수가 없는 트,특제 토스트

 

  그해 겨, 겨울 망해 버린 토스트 노점 자리에는 늙은 고기 냄새가 오랫동안 퍼졌지 배고프면 식빵에 야채 햄 치즈 얹어 구워 먹듯이 흐흐흐 아무렇지 않게 베아진 하, 할망구의 사,살냄새 그때 그 냄새 으흐흐흐

-<냄새나는 사람> 전문

  시집 『소년파르티잔 행동 지침』에 두 가지 웃음이 직조된다.  먼저 <냄새나는 사람>과 같은 종류의 웃음이다. 이 시에서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나 화자의 흐흐흐하는 웃음은 현진건의 1924년 소설인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게 한다. <운수 좋은 날>에서 김 첨지는 인력거꾼으로 생계 유지를 하고 있지만 열흘 넘게 벌이가 없는 상태였고, 그렇기에 몸이 아프다고 나가지 말라는 아내를 뿌리치고 일을 나서게 된다. 그 날은 유독 손님이 많아 큰 돈을 벌게 되어서 아내를 위해 설렁탕을 사 들고 집에 가는데 아내는 이미 죽어 있다. 아내의 죽음을 마주하기 전, 김첨지가 친구 치삼을 만나 술을 먹는 장면에서 김첨지는 유독 많이 웃는다. 그의 웃음소리가 너무 커서 술집이 모든 이가 그이를 쳐다볼 정도였다.

  위의 시에서 화자가 이틀 전 옆방 노인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김첨지의 웃음과 닮아 있다. 스스로의 생계유지만으로도 버거운 상태에서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마주한 이들은 그것이 한없이 버겁고 그래서 그 죽음을 웃음으로 넘어서려고 한다. 하지만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가 그러했듯이 <냄새나는 사람>의 화자 역시 삶의 비애가 웃음을 압도해버린다.

 

규율을 이탈하게 하는 웃음

 

감추었던 결손을 탐색하는 선생의 목소리, 우리는 실눈 뜨고 세상을 봅니다 가느다란 세상이 터진 풍선처럼 일그러집니다 선생이 기마자세와 앞으로나란히를 시키지만 줄은 자꾸만 느려지고 휘어집니다 세상이 나란하지가 않았어요 닦아도, 닦아도 결국 더러워요 남은 지문들이 유리창에 붙어 깔깔깔, 터졌습니다 오늘은 환경 정리 하는 날, 장난치기 좋은 날이거든요

-<장난치기 좋은 날>

 

  <장난치기 좋은 날>은 학창시절 장학사가 오는 날이 배경인 시이다. 장학사가 오는 날은 대대적인 환경 정리를 하는 날이기도 했다. 전교 아이들이 복도와 유리창에 붙어서 윤이 나도록 닦아대야 했다. 장학사가 오는 날 진행되는 수업은 미리 짜인 각본에 의해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루어졌다. 선생님은 유독 다정하고도 친절한 진짜 선생님 코스프레를 했고 학생들은 모두 수업에 집중하고, 열심히 질문을 하는 모범생 코스프레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의 선생님과 학생의 모습이 아니기에 코스프레일 수밖에 없고, 오래가지 않는다. 장학사가 올 때면 급하게 배운 연기인만큼 어색하고, 쑥스럽고 그래서 코스프레 복장을 빨리 벗어버리고 싶다. 이때 누군가는 정색을 하며 저는 이런 답답한 규율은 싫습니다!”라고 말하면 멋있겠지만 학생들은 이런 직진 형태의 저항을 하기보다 장난을 치는 것으로 규율들을 미끄러져간다.

  학교는 세상의 규율을 먼저 훈육 받는 장소이지만 동시에 또래 집단이 모여 하는 장난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웃음은 많은 규율들로부터 이탈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하였다. 장난과 웃음은 규율의 모습까지도 변형시킨다. 장학사가 온 날 장난을 친 학생을 잡아내려는 선생님의 엄숙함은 희화화의 대상이 된다. 엄숙성, 의례, 규율, 질서 등을 희화하하는 힘이 웃음에 있다. 그렇기에 시인은 소년들의 웃음에서 규율을 이탈하는 힘을 본다. 그리고 말한다. “만국의 소년이여, 분열하세요”(<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브이 포 벤테타>중, 가이 포크스를 쓰고 혁명에 대열에 선 시민들

삶의 무게에 짓물리지 않으며 생의 명랑성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서효인의 고민은 거기에 있다.  

 

퍼져라, 웃음아

 

하나는 헐크요 하나는 호건이다 기술이든 근성이든 신화에 불과하므로 그와 나 사이에 사인은 사뭇 중요하다 헐크와 호건으로 이루어진 이분법적 체계 안에서 그의 연기는 반칙처럼 확고하다 그는 수퍼스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말할 것이 별로 없는 X, 소개도 필요 없는 마스크 X,반칙왕 마스크 X, 헐크호건을 상대하는 메인 이벤터가 되기까지 나는 수없이 많은 약물을 내 핏줄에 흘려보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不正不定의 비속어들이 내 근육의 전부다 일그러진 얼굴을 마스크 속에 감추고 각본에 따라 반칙을 일삼는다 손가락으로 눈알을 찌른다 철제 이자를 등뒤에 꽃는다 나의 악행이 극렬해질수록 관객들은 호불호를 판별할 수 없는 환호성을 뱉는다 시원하게 세상에 나온 가래가 되어 점액질의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누가 악역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결국 나는 헐크로 변한 호건의 밑구멍에 깔려 카운터를 맞이할 뿐이다 헷갈리는 사이에 원 투 쓰리, 그는 손목을 뱅뱅 돌리며 자신의 귀에 환호를 담고 있다 순간, 내 안에서 모든 약물이 춤을 춘다 곧 사인이 없는 돌발적 상황이 생길 것이다

-<마스크1>

  자본주의는 갈수록 공고해지고, 그로 인한 소득 불균형은 심화된다. 노동을 해야만 생계유지가 가능한데, 노동할 자리는 없다. 혹은 노동을 하더라도 생계유지하기는 턱없이 부족하다. 송파의 세모녀는 왜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을까. 그토록 살기 위해 발버둥친 그들은 왜 누군가에게 분노도 하지 않고 스스로가 죽음의 책임까지도 짊어졌을까. 사회적 죽음이 아닌 죽음이 있을까 싶어지는 시대. 우리는 이토록 무거운 이 시대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서효인의 첫 시집을 다시 펴든 이유가 여기 있다. 소년의 웃음은 그대로 유지되기 쉽지 않다. 삶의 비애는 웃음을 압도해버린다. 하지만 시인은 소년의 웃음이 가진 명랑성, 반역성을 되찾고자 한다. 그것이 때론 삶 전체를 희화화하는 듯 보여 아슬아슬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진득하게 삶의 명랑성을 회복하고자 삶을 응시하는 시인의 태도 그 자체가 건강함을 전파한다. 우리는 마스크X’처럼 사회로부터 조건 지워진 위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 가면 안에서 각본대로의 삶을 조금씩 윤색해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다보면 그 가면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 되지 않을까? 시집에서 마스크가 삶의 명랑성을 세상에 전염시키는 마스크로 변이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성인이 된 우리가 소년의 웃음이 가진 반역성을 잃지 않을 방법이며, 삶의 무게로부터 짓눌리지 않을 가능성이다. 웃음은 삶의 명랑성을 유지하는 혈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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