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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데거는 시인을 일컬어 존재의 거처를 지키는 파수꾼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왜 스스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존재의 터, 텅 빈 그 자리의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시쓰기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수행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시를 들여다보는 일은 나와 더불어 세계의 본질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 됩니다. [풍문으로 들은 시]에서는 2000년 이후의 출판된 한국의 좋은 시집들을 한권씩 소개하려 합니다. 풍문으로만 들었던 시를 읽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코너소개

 

 

 

 

우리, 저마다의 거리를 가진 존재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 2014.

 

하얀/수유너머N회원

 

 

 

 

 이제니는 2008년 등단 후 음악도 하며 시도 쓰며 거제에서 지낸다. 그녀에게 시는 낱말을 통해 사물의 내부로 들어가는 길이다. 사물의 내부로 들어가는 일은 그것의 의미를 고정시키는 일이 아니라 사물만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일이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일이다. 이 행위 속에서 독특한 리듬이 느껴진다. 이 리듬은 사물 고유의 심장박동일까. 그래서 그녀는 시는 문자로 된 리듬이라고 말한다. 시집으로는 아마도 아프리카(2010),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2014)를 출간하였다.

 

 

우리, 또다른 우리

 

 우리라는 말처럼 무색무취한 말은 없다. 한없이 공허한 것 같으면서도 우리라는 말로 지시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아니, 우리라는 말은 지시의 말이 아니라 동일한 시공간으로 어떤 것을 무차별적으로 묶어버린다. 이 말은 무척 폭력적이지만, 이것이 아니라면 공동의 사건 속에 있는 무수한 너와 나들을 묶는 일을 감행하기 어렵다. ‘우리라는 말은 괄호의 모양을 한 끈이다.

언제부턴가 한국 시에서 우리라는 말이 무의미해졌다. 1990년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우리가 아닌 들로, 수많은 개인들로 쪼개졌다. 그래서인지 시에서도 우리라는 말이 1980년에나 가능했던 고색의 언어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니의 시에서 다시 우리가 태어난다. 괄호이거나 끈 같은 우리말이다.

 

무차별적 결합

 

기린이 그린 그림은 기린이 그린 구름/구름이 그린 기린은 구름이 그린 그림//그림 속 구름이 기린이 그린 그림이고/초원 위 그림이 기린이 보는 구름일 때//기린이 하늘을 날 수 있고/구름은 구름을 낳을 수 있어/초원은 마음속에 펼쳐지는 것/풀벌레 하나까지 아낌없이 펼쳐지는 곳//초원이 기억은 기린을 지나치고/지나친 기억은 구름처럼 지나치고/어제의 사람은 어제의 사람으로 흐르고//기린이 그린 그림은 기린이 그린 그림/구름이 그린 기린은 구름이 그린 기린-기린이 그린

 

우리가 보통 AB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그것은 어떤 공통성이나 인접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에서는 두 대상들이 서로가 서로를 표현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런데 이제니의 시 속에서는 기린과 구름, 가지와 앵무, 달과 부엉이, 꽃과 재 같은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대상들이 무차별적으로 결합되고 있다.

당신은 기린이 그린을 처음 읽으면서 당혹스러울 것이다. 기린과 구름의 관계는 말놀이나 요설에 의해 결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결합된 두 대상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편들 사이에 가 등장하면서 시는 당혹을 넘어 이질적인 결합 사이의 깊이로 우리를 몰고 간다. 그 깊이의 감각이 바로 나선의 감각이다. 현기증과 같은 감각, 시인에게는 고독을 불러오는 그 감각. 이렇게 해서 문학은 우리에게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깊은 관계를 순간이나마 존재하게 한다.

 

 

 

루카스 킬리안 <그로테스크 문양> 1607년

인간과 식물, 사물이 경계없이 얽혀 있는 문양이다.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의 기원적인 문양들

이제니에게 이것은 일상의 모습이다. 

 

 

사이의 거리감

 

나는 이동한다. 너는 사라진다. 너는 낡고 큰 가방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선다. 나서는 순간부터 네 자신의 죽음과 동행한다. 어둠은 짙어진다. 목소리는 가까워진다. 너는 전진한다. 너는 비약한다. 너는 비상한다. 너는 휘돌아나간다. 몇 겹의 눈동자. 몇 겹의 동심원. 몇 겹의 그림자. 몇 겹의 목소리. 무수한 겹과 겹을 통과하여. 시간과 거울과 얼음과 물음을 두 손에 쥐고. 날아갈 수 있는 한 높이높이. 나뭇가지들이 자라나듯이. 넝쿨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듯이. 끊이지 않는 노래들처럼. 이미지는 증식한다. 회전하면서. 멀어지면서. 너는 이동한다. 나는 사라진다.-나선의 감각-목소리의 여행

 

우리는 라는 지시어가 한 시 속에, 혹은 소설의 한 장면 속에 경우 그 둘의 관계를 추리하기 위한 단서들을 찾는다. ‘는 어쨌든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니의 시 속에서 등장하는 앞에서 우리는 어떤 연관도 찾아낼 수가 없어진다. 이는 앞서의 기린이나 구름, 가지나 앵무를 결합시킨 실험들의 영향이기도 하다. 이런 시들의 영향 하에 우리는 사이에 엄청난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나선의 감각-목소리의 여행에서 너와 나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행동한다. “나는 이동한다. 너는 사라진다너는 이동한다. 나는 사라진다사이에서 우리는 이 둘의 연관 관계를 쉽게 상상할 수가 없다. 그것들은 사람인가 싶으면서도, 태생부터 서로 다른 종들의 이름 같기도 하고, 목소리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인 것 같기도 하다. ‘는 내가 사는 시공간에서 마주친 모든 것의 이름이다. 이제니는 기억 속에 망각된 것이거나 지각불가능 하기에 표현된 적 없는 것들을 보이게 한다. “보이지 않는 입이 있어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있어 무수히 되뇌었던 말들을 다시 소리 내어보는 것”(나무의 나무), 이것이 문학의 행위이다.

 

 

2015년 4월 17일 4160개의 촛불이 만든 세월호

4월 16일이라는 흔적은 "우리"를 "우리"이게 한다.

 

우리, 저마다의 거리를 가진 존재

 

어제와 함께 홀로 있는 아이야. 그리움이 없어 그리움을 만드는 입술아. 너는 죽은 사람을 만들고 죽은 표정을 만들고 죽은 말을 만든다. 너는 죽은 거리 위를 달리며 죽은 감정을 되풀이한다. 언젠가 잡았던 두 손. 언젠가 나누었던 온기. 속도를 견디는 너의 두 손은 식어간다. 탁자 위에는 설탕이 흩어져 있다.//두 눈을 감아도 햇빛은 가득하다. 너는 순도 낮은 네 잠을 감시하며 꿈속의 거리가 펼쳐지기를 기다린다. 한낮의 반대편은 자정이다. 자정과 정오가 바뀌듯 너의 몸은 조금씩 사라진다. 우리는 저마다의 겹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거리를 간직하고 있었을 뿐이다. 풀밭 위로 검은 그림자가 흘러간다. 어떤 시간이 어떤 얼굴을 데려온다. 다시 수요일이 온다. -수요일의 속도

 

수요일의 속도에서 우리라는 말은 참 낯설다. 기존에 우리는 어떤 동일성을 이루는 집단이고 다른 집단과 거리를 두며 성립된다. 하지만 이제니는 저마다의 겹을 가진, 저마다의 거리를 가진 존재들을 우리라고 말하고 있다이 거리는 무수한 너와 나의 시공간이 빛어낸 겹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너라는 그림자가, 흔적이 "우리"를 "우리"이게 한다.

 아이를 잃은 부모가 걷는다. 오빠를 잃은 동생이 걷는다. 동생을 잃은 언니가 걷는다. 조카를 잃은 삼촌이 걷는다. 친구를 잃은 아이가 걷는다. 416일 이후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하지만 깊이 각인된 이 흔적을 누가 지울 수 있을까. 우리 모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흔적은 이미 남한 땅에 사는 모두에게 남아 있다. 당신이 그 흔적을 외면하려는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당신에겐 그만큼 더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반증이다. 우리와 함께 아이들이 걷는다. 그것은 우리의 그림자이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우리우리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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