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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드라마

- 기혁,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민음사, 2014. 12) –




이 종 현 / 수유너머N 회원





노란색 시집

모스크바예술극장(Mkht) 1898년 위대한 배우이자 연출가였던 스타니슬랍스키와 그의 동료였던 연출가 네비로미치-단첸코가 세운 극장이다. 소련 붕괴 뒤인 1990년대 이 극장에서 공연한 안톤 체홉의 <갈매기>를 녹화한 비디오를 본 적 있다. 무대는 어두웠고 등장인물들도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여유로운 호수 마을의 정경은 없었고 하류인생들을 그린 막심 고리키의 드라마 <밑바닥에서>에나 어울릴 법한 진지한 발성과 무거운 몸짓이 보였다. 요즘은 좀 달라졌다지만 여전히 모스크바예술극장의 이미지는 무겁고 고전적이다. 그런데 왜 시인은 노란색 시집의 제목을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라고 지었을까? 모스크바와 기립박수는 숭고한 이념을 향해 자리에서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 혁명당원들을 떠올리게 한다. 다음은 이 시집의 표제작인 시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



자동차 트렁크에 실린 소나무가 / 허공으로 뿌리를 내밀자, / 지상도 지하도 아닌 나라가 생겨났네. // 그 나라 시민들은 블랙 러시안이나 / 화이트 러시안의 표정을 지으며 / 허공에 허파를 만들고 / 심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네. // 몇 번의 눈사태와 크리스마스가 / 달궈진 아스팔트 아래 묻히는 동안, / 독재자를 연기하는 배우를 / 지도자로 추대하기도 했네. // 그 나라의 모든 병명은 비유였으므로 / 의사는 처방전 대신 / 시를 적어 내밀곤 했지. // 엘리베이터를 천사라고 부르게 된 건 / 그 나라의 돌림병 때문이었네만 / 하늘을 나는데 / 꼭 혁명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네. // 천사를 타기 위해 필요한 중력을 / 사람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마련했고 / 그것을 적분해 / 사랑이라 부르기도 했었네. // 떠돌이 악공의 연가가 끝나 갈 무렵 / +에서 로 전류가 흐르는 건 / 기타 줄만이 아니었다는군. // 잊었는가? 소나무가 뿌리내린 곳에는 / 사철이 없다는 걸 말일세. // 여름이 끝나고 드라마가 찾아오고 있다네. / 천사가 지나간 자리는 모두 / 그들의 박수일 따름이었네.




몇몇 표현들은 기괴하고 어떤 어조들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무언가 모를 따뜻함과 향수가 느껴진다. (‘~하네라는 말투 때문일까?) 가장 눈에 띄는 모습은 처방전을 대신하는 시, 서로를 껴안는 사람들, 그리고 여름이 끝나고 찾아오는 드라마다. 이 세 가지는 시집 전체에 걸쳐 반복된다.



서로를 껴안는 사람들

시인은 지겨우리만치 타인을 부른다. “타인의 상처가 옅어질수록 / 서로를, / 바다로 알고 헤엄쳐 다니려 하지.”(<골드러시>), “타인의 우주를 받아 든 사람들은 사막을 표류하는 비행사를 떠올립니다”(<파주(坡州)>), “‘우리라는 단어가 처음 발견되던 날, 외계인이 쓴 방명록 같았다는 아르디의 소감”(<두 단어의 세계>), “서로 다른 윤곽으로 맴도는 우주의 한 이름, 미아 / 일생에 두 번 타인의 원주를 지나야만 한다”(<미아에게>), “그 빛에 비춰 타인의 꽃이 피어날 때”(<열대야>) 등등. 이 밖에도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많다. 시인은 타인을 탐사하여 그 비밀스러운 경로를 겪어보고 싶어한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유난히 이 동네 저 동네 기웃거린다. 파주, 인사동, 모스크바, 오스트레일리아의 골드코스트, 외곽 등등) 그런데 타인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일단 배우가 되어 보는 것이 좋겠다. 이 시집의 편집자인 서효인씨는 시인에게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스타니슬랍스키 연기론’이 시집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배우가 대본에 의존하여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닌, 배우의 직감 ‧ 상상력 ‧ 체험 등 본인의 모든 것을 동원해 배역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연기를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stanislavsky system)이라고 한다. […] 이러한 연기가 가능했던 희곡이 체호프나 이오네스코이고 그것의 연출자가 스타니슬랍스키이고, 그것이 상연된 극장이 모스크바예술극장인 것이다

(출처: http://minumsa.com/booklife/25271/)



이때 서효인 시인은 온몸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김수영의 말을 떠올렸고, 모스크바예술극장의 시인을 가리켜 시를 온몸으로 살아 내는시인이라고 말한다. 시집의 절반 정도에는 이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특정한 배역을 맡아 시의 공간 속에서 연기를 선보인다. (특히 아르토의 희곡을 모티프로 삼은 <첸치 일가>가 그렇다) , 자신의 추억을 아이러니하게 곱씹어보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배역을 연기해 낸다는 것은 한 번에 한 사람만을 겪어본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시인은 어느 한 사람에 집착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나의 전기엔 인칭을 붙여 줄 생애가 없었다”(<고스트 라이터>) 한 사람이 아닌 무수한 타인들을 동시에 겪어 보려면 무엇이 좋을까?




   

모스크바예술극장의 설립 초기와 오늘날의 모습



시인은 연출자 또는 극작가의 역할을 기꺼이 맡고자 한다. “최초의 조명은 문장,”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시 <태초에 빛이 있으라, 지상 최대의 토크쇼에 대한 모국어의 진술>은 지문과 대사로 짜여있다. “석양이 오래 머무는 곳에 가 보고 싶었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시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시인은 성기가 사라진 포르노의 주인공들의 심심한 이야기를 전한다.



여름이 끝나고 찾아오는 드라마.

그런데 혁명과 관계되기만 하면 시인의 극적 행위는 증폭된다. <나비잠>이라는 시는 너희가 나비든 나비가 너희든 / 노란 리본을 잊지는 말아 줘라며 세월호를 떠올리게 하고, <분신(焚身)>이라는 시는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봉제된 행성의 말 없는 공전주기가 말똥말똥 시려 온다며 전태일 열사를 배면에 깔고 있다. , <무언극>에서는 배후가 없는 너, / 4월의 재현(再現)배우라는 구절이 나온다. 한껏 시사적인 주제와 함께 시인이 시에 직접 가져오는 것은 이탤릭체로 표시한 타인의 말(“노란 리본을 잊지는 말아줘”),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구술록 제목(“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등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입에서 반복되어 오르내리는 말들은 공연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공연을 전제로만 반복한다.”(<태초에 빛이 있으라…>) 시인은 한 번 발생한 사건들을 드라마화(dramatize)한다. 사건의 말들을 대사로 삼아 타인들이 그것을 어떻게 연기해 낼지 그 연출의 선을 그려낸다. 한여름처럼 뜨거운 사건이 지나고 나면 그 사건은 드라마가 되어 반복 공연된다.



처방전을 대신하는 시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의 후반부를 다시 보자. 시라는 처방전이 치료하는 병의 이름은 바로 비유다. 이 병 때문에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천사라고 불렀다. 그저 위아래를 반복하는 엘리베이터 대신 하늘을 날기 위해 사람들은 엘리베이터에 천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들은 천사를 타기 위한 중력을 마련하려고 서로를 껴안았다. 그들은 +에서 -로 흐르는 서로의 힘을 보태 천사를 날아갈 수 있게 했고 이 감동스러운 장면에 박수를 보낸다. 시의 처방전은 비유라는 병을 치료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기혁의 시가 타인으로 살아보고 그들과 함께 사건의 흔적을 드라마화하려 한다면, 그의 시는 비유에 걸린사람들을 낫게 했다기보다는 그 병에 머물러 병을 감동으로 겪게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병 걸린 곳, 긁은 데를 또 긁었고 / 조금씩 얇아지는 살점에서 / 빛이 새어나올 때 […] 서로를 향해 떠나갈 수 있다.”(<열대야>) 그런 점에서 시는 여름에 겪었던 병을 무르익게 하여 다른 배우들과 펼치는 드라마를 이끌어 낸다. 그 드라마의 공간은 몇 번씩이나 도둑이 들었던 자리 (<시니피앙>)”이고 에미애비 없는 세계”(<시니피앙>)이므로 말할 수 있는 자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다. 그들은 여름날 사건의 드라마를 재연(再演)할 뿐만 아니라 각자 재현(再現)”배우가 되어 그 사건을 다시 일으킨다.


 

기혁의 시는 관객들에게 비춰져 새로운 모습으로 반복될 사건의 재현을 노린다.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를 떠올린다. / 색색의 관객들이 두 팔을 벌린다.”(<비너스>) 색색의 관객들도 한 장의 거울은 구원이었다”(시인의 말)고 믿으며 자신들에게 비춰져 반복될 사건의 드라마를 가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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