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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시집

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이혜진/수유너머 104 회원




2

                                           

                                                                                                                                김혜순



깊은 밤 우리는 서로

없애주기로 언약했었다

그리고 엎드렸었다.

타앙, 네가 한 방 먼저 먹였다.

나는 갈가리

그러나 순간적으로 찢어졌다.

타앙 탕, 이번엔 찢어진 내가

사력을 다해 두 방 먹였다.

너도 나처럼 너덜거렸다.

순간적으로 너덜거렸다.

 

깊은 밤, 우리는 서로

없애주기로 언약했었다.

그리고 엎드렸었다.

그 다음 무서웠다.

우리들 사이에 침묵이 서 있었다.

침묵의 더러운 이마

침묵의 거대한 아가리

침묵의 가랑이

그 가랑이 아래로 소리없는 별들이

우 수 수.

침묵은 우리의 심장을 꺼내갔다.

허파도 하나쯤 가져갔다.

깊은 밤 우리는 서로

없애주기로 언약했었다.

그런데 이 한밤

우린 침묵에게 당했다.

 

빈 들판에

허수.

아비.



김혜순의 두 번째 시집,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에서 고른 2는 첫 시집의 시와 비교해 보면 보다 명징한 언어를 사용했다. 당시의 언어를 통해 그 시대를 읽을 수 있듯, 시인은 가장 감각적인 언어로 그 시대 상황을 그린다. 특히, 이 시가 쓰인 1980년대 초는 5.18광주 민주 항쟁이란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사건이 있었던 만큼 그와 무관하게 읽기는 힘들지만 그 배경을 모른다 해도 김혜순의  치열한 언어는 극적인 장면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다.

 

도청 앞에서 시민 군과 공수부대의 대치, 그 정적을 깬 5 27일 새벽, 무장헬기의 무차별 사격, 당시 시민 군으로 있었던 사람들은 시인의 표현대로  빈 들판에 허수. 아비. 였다. 모두의 일상을 흔들었던 이 구체적인 사건의 공격성은 시인의 날카로운 감수성을 뒤틀어 두 번째 시집 전반에 걸쳐 왜곡된 모순의 세계를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시인은 구두점, 의성어 늘리기와 띄어쓰기 그리고 행 바꿈으로 시의 내용을 보다 긴장감 있게 만드는 기술적 장치도 사용했다. 이는 감상자가 눈으로만 읽었을 때보다 큰소리로 낭독했을 때, 시가 가진 고유의 음악성과 리듬감이 배가 되는 효과를 획득해 보다 적극적으로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게 한다.

 

, 시인이 의도한 음악성에 맞춰 다시 한번 2를 읽어보자. 비참하지 않게, 그렇다고 장엄하지도 않게, 복기하듯 천천히 감각을 일깨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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