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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종과 실뜨기 하기 (2) 

최유미

 

 4. 반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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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ird Man of the Mission, 샌프랜시스코 미션구역의 거리벽화>

 

반려종들은 가차없이 함께-되기이다. 반려종이라는 카테고리는 내가 포스트휴머니즘을 들먹이지 않고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하도록 돕는다. 반려종들은 실뜨기게임을 한다. 거기에서는 누가 세계 속에 있게 되느냐는 문제가 내부작용과 상호작용 속에서 구성된다. 파트너들은 매듭짓기보다 선행하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종들은 세상의 주체 만들기와 객체 만들기의 얽힘의 결과이다. 인간-동물 세계들에서, 반려종들은, 집, 실험실, 들판, 동물원, 트럭, 사무실, 목장, 운동장, 마을, 인간 병원, 숲, 도살장, 강어귀, 동물병원, 호수, 경기장, 마구간, 야생동물 보호지, 농장, 대양의 협곡, 도시의 거리, 공장, 등등에서의 일상적으로 조우하는 존재자들이다. (Staying with the trouble)

 

포스트 휴먼이 주목받는 이유는 경계에 대한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깊이 침투한 테크노사이언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한다. 하지만 해러웨이는 포스트휴먼이라는 담론에 부정적이다. 그것은 80년대에 해러웨이가 맞서고자 했던 창조신화의 사이보그와 다르지도 않고, 그것이 제기하는 물음도 기껏 인간의 경계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 담론은 물론 인간의 경계를 다시 묻는 것을 통해서 인간중심주의를 빠져나갈 출구를 발견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계가 문제시 되는 것이 테크노사이언스=인간의 탁월성이라는 등식을 통해서라면, 그 출구는 가짜 출구일 것이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테크노사이언스는 인간만의 것도 아니고, 인간 혹은 유기체라는 카테고리에 포함된 것들과 그것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의 활동은 이미 테크노사이언스이고 이들의 테크노사이언스적인 활동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자연이라 칭하는 것이 만들어 졌다.

『반려종선언』에서 해러웨이는 자신의 개에게 촉발 받아서 반려종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에게 개는 애완견이거나 가끔은 음식재료가 되기도 하는 가축이었다. 애완견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확실히 갖추고 있고 자신의 전 인생을 그것과의 투쟁에 바친 철학자들에게는 경멸적인 것이었다. 그들에게 개는 저 심해의 백경처럼 치명적인 매력으로 덮쳐오는 그런 존재자가 아니라 일상에 매몰된 노예다. 그런데 일상이란 것이 그렇게 만만한 것일까? 남성의 자기출산 신화에서 사생아 사이보그를 발견했던 해러웨이로서는 심해의 백경과 개집의 개를 위계화하는 그런 논의에는 당연히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함께 사는 개를 경멸이나 연민의 대상 혹은 죄책감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역사를 만들어온 존재로서 철학의 무대에 불러냈다. 그 존재의 카테고리는 반려종이다. 반려종은 우리와 함께 일상을 만들고 살고 있으나 투시법적인 시선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 장에서 우리를 인도할 반려종은 비둘기다.

 

그들은 소중히 여겨지는 친척이고 경멸되는 해충이고 구조의 대상이고 비난의 대상이며 권리의 지참자이자 동물-기계의 구성요소의 지참자이며, 음식이고 이웃이며, 박멸의 표적이고, 생물공학적인 사육과 증식의 표적이며, 일과 놀이에서의 반려이고 병의 매개체이며, “근대적 진보”와 “시대에 뒤진 전통”이 서로 다투는 주체이자 대상이다. 이 모든 것 외에도, 비둘기들의 종류들은 다양하고, 또 다양하고, 땅 위의 거의 모든 장소 마다 있는 종류들로, 그리고 또 좀 더 다양하다. (Staying with the trouble)

 

비둘기는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해온 동물로 수천 년 전부터 사육되기 시작했다. 야생비둘기와 사육비둘기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 다양성과 왕성한 번식력에 의해 그 경계는 분명치가 않다. 수천 년 전에 서남부 유럽과 서남아시아 북아프리카에서 출현해서 유럽의 식민자들과 함께 전 세계로 퍼졌다. 비둘기들은 “날개 달린 쥐”라 불리면서 박멸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널리 사육되고 소중하게 다뤄지는 반려들이기도 하다. 사육비둘기가 일을 하는 영역은 대단히 다양한데, 메시지를 전하는 스파이, 경주용 새, 새장에 들어가는 고급 비둘기, 음식, 심리학적 테스트 대상 등이다. 야생 비둘기는 주로 도시 맹금류의 먹이가 되거나 인간에게 박멸의 대상이 되는데, 이들은 주로 도시의 다리나 마천루 꼭대기 턱에서 삶을 시작한다.

해러웨이는 비둘기와 인간의 협동적인 행위들에 대한 SF를 쓴다. SF는 앞에서 말한 그 장황한 리스트이고 SF의 주된 테마는 곤란함과 함께하기다. 해러웨이는 비둘기와 인간들의 협동적인 몇몇 프로젝트들을 추적하는데, 그때 인간과 비둘기가 엮어내는 여러 가지 매듭들로부터 더 나은 응답-능력을 키우는 유망한 패턴들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망한 패턴이라고 해도 한 방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곤란함이 지속되는 속에서도 부분적인 회복을 꾀하는 패턴들이다.

 

5. 비둘기와 인간의 SF적인 실천들

 

비둘기 사육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유럽으로 이민 온 무슬림들은 비둘기 레이싱에 열광한다고 한다. 이 비둘기레이싱은 특정한 곳에 비둘기를 놓아두고 가장 정확하고 빨리 집으로 찾아오게 하는 게임이다. 비둘기들은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길을 찾는데 능숙하다. 비둘기 레이싱에 빠진 무슬림 소년들과 남자들은 비둘기를 선별적으로 사육하고 아주 정교하게 키워서 비둘기의 레이싱 능력을 향상 시킨다. 비둘기 측에서는 이 무슬림 남자들이 훌륭한 사육기술을 얻도록 이끈다. 동물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일방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인간은 비둘기를 사육하고 훈련시키지만, 인간을 그런 활동으로 이끄는 것은 귀소본능을 가진 비둘기다. 무슬림 남자들이 비둘기를 사육하고 훈련시키며, 레이싱게임을 하는 이야기를 비둘기의 능동적인 활동을 지워버리고 비둘기 사육을 하는 남자들 측에서만 일방적으로 기술한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릴 것이다. 비둘기가 지형지물을 이용할 수 있다는 과학적 사실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인가에 따라 전혀 다른 전망을 낳는다.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의 함께-되기라는 사변적인 우화는 과학적 사실을 필요로 한다. 해러웨이는 과학적 사실과 사변적 우화를 엮어서 매듭을 만든다.

미국 해안 경비대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비둘기와 함께 조난자구조훈련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비둘기들은 거울 속의 자신의 이미지를 판별하는 능력이 세 살짜리 어린이보다 낫고, 심지어 모네 그림과 피카소 그림을 구분할 수도 있다. 이런 탁월한 능력 덕분에 비둘기들은 조난당한 사람이나 장비를 93%정도의 정확도로 찾아냈다. 사람의 경우 정확도는 38%애 불과하다고 한다. 비둘기들은 헬리콥터 아래 붙어있는 관찰용 장비 속에 앉아 있다가 그가 발견 한 색깔을 판별하고 키를 쪼는데, 그 작업은 인간과 함께 협동할 때 거의 100% 정확했다. 이 협동에서도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비둘기가 구조작업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비둘기와 협동을 하는 인간도 비둘기와의 소통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비둘기도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는 훈련을 하던 두 대의 헬리곱터가 충돌하는 바람에 예산이 중단되어 끝나버리고 말았다. 인간과 동물의 협동이 언제나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피죤블로그(PigeonBlog)는 일종의 예술액티비즘 프로젝트인데, 2006년 예술가이자 연구자인 비트리즈 다 코스타(Beatriz da Costa)는 환경정의를 실현하는 프로젝트에 비둘기를 반려로 참여시켰다. 그것은 특정지역의 공기오염도를 실시간으로 측정해서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이었다. 산업화에 의한 공기오염도는 공장지대와 그곳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숲과 공원으로 둘러싸인 주택단지 사이에 상당한 편차가 있다. 산업화의 혜택을 누리는 것도 공기 오염과 같은 부담을 지는 것도 계급적으로 불평등하기 때문이다. 공기오염도 측정은 정부기관이 하는 일이지만 공식적인 오염도 측정 탐침이 너무 높이 설치되어 있거나 교통량이 많은 곳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탐침 가까이의 분진을 측정해서 외삽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실제 오염도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거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공기오염 장치를 장착한 귀소본능이 있는 비둘기들은 공식적인 측정장치가 없는 곳까지 날아다니면서 실시간으로 오염수치를 인터넷으로 보낼 수 있다. 다 코스타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공식적인 오염장치를 비둘기로 대체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이것은 일종의 저항을 위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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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비둘기, 전자기술이 한팀이 된 비전블로그팀과 이들이 내보내는 실시간 대기 오염정보>

 

다 코스타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귀소 본능이 있는 비둘기 뿐 아니라 예술가, 엔지니어, 그리고 비둘기 애호가들에게 광범위한 협력을 요청했다. 비둘기가 등에 맬 장치는 GPS와 센서 그리고 안테나가 달린 개방형 셀룰라폰 수준의 장치였고 이것을 개발하는데는 석달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 장치를 비둘기에게 너무 무겁지 않도록 만드는 데는 1년정도의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이들은 비둘기에 대한 지식도 익혀야 했고 프로젝트에 참여한 자신의 비둘기가 위험에 빠지거나 과중한 노동을 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 비둘기 애호가들의 신뢰도 확보해야 했다. 여기에서 비둘기들은 단지 도구가 아니다. 이 프로젝트가 보여주는 것은 반려종이 된다는 것은 함께-되기를 통해서 다 같이 유능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반려종의 실뜨기는 뜻하지 않은 패턴들도 만들었다. 다 코스타는 비둘기와의 성과를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제안서를 함께 쓰자는 요청을 받기도 했고, PETA(People for Ethical Treatment of Animals) 사람들로부터 동물학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비난은 상당히 거셌고 다 코스타가 근무하는 학교에 그녀를 인사조치 해줄 것을 요청하는 항의가 쇄도했다. 사실 이 프로젝트 초반에 비둘기 애호가들을 끌어들이는 문제는 가장 어려운 것이었는데, 비둘기 애호가들이 가장 두려워 한 것이 동물 착취에 대한 비난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어이없는 것은 이 예술작업에 대해 PETA 사람들이 비난한 중요 근거가 ‘전문가도 아닌 주제에...’였다. PETA는 자격의 합법성을 물으면서 피죤블로그의 폐쇄를 요구했던 것이다. 다 코스타는 이렇게 되묻는다. “정치적인(그리고 예술적인) 행동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동물의 작업이 과학이라는 우산아래서의 작업보다 덜 합법적인가?” 다 코스타의 작업은 환경정의의 실현에 사람과 비둘기와 전자기기라는 복수종의 협동적인 실뜨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동물권은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동물이라는 추상적인 존재자가 없는 것처럼 동물권 역시 구체적인 반려종의 실뜨기 속에서 세심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대문자 동물권이 아니라 피죤블로그에서 나는 경주 비둘기의 노동권이 문제다. 백팩은 너무 무겁지 않은지, 노동을 수행하다가 맹금류한테 잡아 채일 위험에 노출 되지는 않을지 노동 시간은 적정한지가 문제다. 야생의 동물에게 인간의 일을 시킨다는 일반화된 비난은 온당하지 않다. 현실세계에 대처하게 되는 것은 일반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에 달라붙어서 씨름하는 것으로 부터다. 그런데 PETA가 다 코스타에게 자격의 합법성을 물었던 것은 일반화된 동물권이라는 맥락과 상당히 닿아있는 것 같다, 그들에게 동물은 야생이라는 경계 밖으로 나오게 해서는 안 되고, 인간은 야생의 순수함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같은 맥락으로 예술가가 과학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은 경계를 침해하는 비합법적인 행위에 불과하고, 그런 비합법적인 행위에 동물을 동원하는 것은 더욱 더 용납할 수 없다는 귀결이 나온다. 이들에게는 린네의 분류표에 있는 비둘기는 있을지라도 오랜 세월 인간과의 협업을 통해 서로를 유능하게 길러온 현실세계의 경주 비둘기는 없다.

동물사육에 대한 민속지학을 연구하는 Vinciane Despret는 2003년에 프랑스의 예술가 Matali Crasset가 비둘기 애호가 연합과 코드리 공원의 의뢰를 받고 만든 비둘기집에 대해 이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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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둘기 애호가들과 코드리 공원의 의뢰로   Matali Crasset가 디자인한 비둘기집

 

그러나 비둘기애호가가 없으면, 사람들과 새들에 관한 지식과 노하우가 없으면, 선택, 도제살이, 견습기간이 없으면, 실천들의 전달이 없으면, 그러면 남아 있는 것은 비둘기이지, 귀소본능이 있는 비둘기는 아닐 것이고, 숙련된 뱃사공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기념 되는 것은 동물 혼자만은 아니고, 실천만도 아니고, 프로젝트의 기원 속으로 명백하게 기록되는 두 “함께-되기”의 활성화다. 달리 말하면, 나타나는 것은, 그것으로 비둘기들이 사람들을 재능 있는 비둘기 애호가들로 변화 시키고, 그것으로 애호가들이 이 비둘기들을 믿음직한 경주 비둘기로 변화시키는, 관계들이다. 이것이 이 작업이 어떻게 기념하는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성취를 현재 속으로 연장시킨다는 의미에서 기억을 만들면서 스스로에게 업무를 부과한다. 이것은 일종의 반복이다. (Staying with the trouble)

 

Crasset의 비둘기 집은 비둘기와 인간이 서로를 유능하게 만들었던 함께-되기의 활동들을 기억하는 기념비다. 하지만 이 기억하기는 박제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되기를 활성화하는 기억이고, 우리 스스로에게 더 나은 함께-되기의 의무를 부과하는 기억이다. 들뢰즈라면 이 기념비는 비둘기와 인간의 함께-되기에 대한 시간의 세 번째 종합, 차이나는 반복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해러웨이는 데스프리의 글에 대해 이렇게 썼다.

 

Re-member(기억하다, 다시-멤버되기), com-memorate(기념하다, 함께-기억하다)는, 적극적으로, 반복하기, 되살아나기, 다시 취하기, 회복하기이다. 다 코스타와 데스프리는 반려종들이다. 이들은 복수종생물과 SF 그리고 함께-되기의 실뜨기 현실세계화(worlding)에 헌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억한다; 그들은, 파트너들의 적극적인 상호관계가 없다면 사라질 무언가를 육체적인 현재 속으로 유인하고 연장한다. (Staying with the trouble)

 

다른 맥락의 비둘기 집이 오스트레일리아 멜번의 배트맨 공원 안에 있다. 배트맨 공원은 예라(Yarra)강 연안에 있는데, 유럽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 들어오기 전에는 우른제리(Wurundjeri)족의 영토였던 곳인데 유럽의 사업가 존 배트맨이 토착민들로부터 헐값으로 산 땅이다. 이 비둘기 집은 비둘기들이 도시의 빌딩이나 길바닥을 오물로 더럽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비둘기 집의 거주자들은 사육 비둘기가 아니라 “날개 달린 쥐”로 취급 받는 야생비둘기들이다. 이 비둘기들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유럽인들이 들어올 때 함께 들어왔는데, 유럽인들이 예라 강의 습지와 시골마을을 화물과 철도수송을 위해 파괴해 버린 자리에서 번성했다. 이들은 토착종을 내쫓은 황소개구리나 배스같은 이른바 생태계교란종이다. 생태계 교란종은 종종 박멸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박멸은 복수종의 유한한 번성을 위한 곤람함과 함께하기와는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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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둘기 부화제한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호주 맬버른의 배트맨 파크에 있는 비둘기 집>

 

배트맨 공원의 비둘기 집은 일종의 부화제한 프로젝트다. 비둘기집에는 200개의 둥지 상자가 있어서 비둘기들이 이곳에 알을 낳을 수 있도록 초대된다. 비들기들이 알을 낳으면 사람들이 그것을 인공알로 대체해서 비둘기들을 속인다. 이것은 인간과 비둘기의 갈등을 다루는 혁신적인 방법이다. 게다가 비둘기 무리들의 배설물인 똥은 자급자족적인 환경보호농업인 퍼마컬쳐(permaculture)의 훌륭한 퇴비원료가 되어 다시 푸드 시스템과 엮인다. 물론 이 비둘기 집이 토착민과 유럽인간의 불평등한 계약이나 정복, 그리고 습지의 파괴를 원상복구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복수종의 함께-살기를 위한 실뜨기에서 부분적 회복을 주는 의미 있는 패턴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 코스타가 코넬대학에서 수행한 피죤워치(PigeonWatch) 프로젝트도 반려종의 실뜨기에서 의미 있는 패턴을 만든다. 이 프로젝트는 야생 비둘기들의 상이한 모집단에서 색깔이 지역별로 어떻게 다른가를 조사하는 프로젝트다. 워싱튼 DC에서 진행된 피죤워치 프로젝트는 조사원으로 도시의 학생들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도시의 소수자인 흑인 아이들과 도시의 비둘기들은 비슷한 처지로 멸시의 낙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공통의 낙인을 가지고 있다고 비둘기와 아이들이 서로 보듬어 주던 사이는 아니었다. 도시의 아이들에게도 비둘기는 “날개 달린 쥐”였다. 그러나 관찰 하고 기록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될수록 아이들은 더 이상 비둘기를 경멸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신이 이전에는 어떻게 봐야할지, 어떻게 존중해야 할지 몰랐던 이 존재자에 대해서 점점 민감한 관찰자와 옹호자로 변해갔다. 이렇게 된 것은 단지 아이들만의 노력은 아니고,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살아온 비둘기들이 아이들의 관심에 응답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복수종들이 테라폴리스에서 함께 잘 살고 죽기의 핵심에 곤란함과 함께하기가 있다. 해러웨이가 이야기 해준 것은 우리는 일상을 일반화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일상과 씨름하면서 현실세계에 대처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상의 세부적인 것들이 중요하다. 실제의 존재자들을 응답능력과 연결하는 것은 구체적인 일상의 세세한 사항들이다. 하지만 응답은 모두 같지 않다. 그리고 응답이 같지 않다는 것이야 말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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