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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코너는 근간 예정인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 원고 중 일부를 출간 전에 미리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1장 심청전과 ‘반인륜적’ 독서





이진경






두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첫 번째 부분 보기 / 두 번째 부분 보기)



3. 연꽃 속의 심청은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심청은 임당수에 몸을 던져 죽습니다. 카프카의 게오르크처럼 물에 빠져 죽습니다. 임당수는 그가 몸을 던지는 바다, 곧 심연입니다. 그가 몸을 기댈 어떤 확고한 기반이 없는 곳, 모든 기반이나 근거가 사라져버린 곳입니다. 심청은 몸을 던져 그 심연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혼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몸과 더불어 효를, 효라는 도덕을 그 심연 속으로 끌고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두운 심연, 그것은 어떤 행위가 효인지 효 아닌지를 판별할 수 없는 식별불가능성의 지대입니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심연(Abgrund)은 모든 것이 근거(Grund)를 잃고(Ab) 어둠 속으로 침몰하는 곳입니다. 모든 가치가 무(無)로 돌아가는 무의 공간입니다.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근본에서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공간이며, 그런 식으로 다시 탄생하게 하게 하는 공간입니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심청이 몸을 던진 바다란 어떤 고정적인 것도 없는 끊임없는 변화의 공간, 모든 것이 유동적인 액체적 공간입니다. 생성과 변이의 흐름만이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어떤 확고하고 지고한 가치나 규범이 변이와 생성의 힘에 ‘침수’되어 유동화되는 곳입니다. 확고부동한 ‘답’이었던 효를 근본적인 ‘물음’으로 바꾸어버리는 공간입니다. 



우리는 심연을 통해 다른 세계로 진입한다. (사진 출처: imgur.com / http://imgur.com/gallery/Ch0KAUx)



그렇게 침수한 곳에서 심청은 다른 세계로 들어갑니다. 용궁, 그곳은 심청도 그의 아비도, 그의 이웃도 알지 못했던 세계입니다. 옥황상제가 등장하고 용왕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싶었지만 알 수 없었던 세계를 상상하며 말하는 상투쿠(클리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세계였습니다.[각주:1] 그 세계에 사는 이들 역시 지상의 인물들처럼 ‘심청의 효성에 감동’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효행에 감동한 게 아니라 극단적 효행에 감동한 것입니다. 극단적 효행, 그것은 효이길 그친 효행, 효를 극한에서 넘어서는 효에, 그렇기에 근본에서 다시 묻게 하는 효행입니다. 여기서 그들을 감동시킨 것은 효보다는 그것의 극단성입니다. 그 희소하고 극한적인 선택입니다. 그렇지 않은 효행이란 ‘삼강’의 조선에, 심청이 살던 세계에 흔하게 있는 것이니까요. 그렇기에 심청의 구원은 ‘하늘의 도움’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서술되지만, 사실은 자신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심청 자신에게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민중들의 환상이 만들어낸, 멀리 떨어진 세계에서 정해진 ‘운명’으로 오는 게 아니라, 피할 수 없이 닥쳐온 ‘운명’을 받아들이며 자신이 속한 세계를 과감하게 떠나 다른 세계로 들어가려는 심청의 결단에서 오는 것입니다. 


임당수에 몸을 던지며 심청은 죽습니다. 황주 도화동에서 봉사인 아버지를 위해 동냥을 하며 살던 심청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바다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웃집 큰애기와 같이 바느질하고 건너집 작은애기와 같이 그네 뛰고 놀던 심청, 장승상댁 부인이 아끼던 심청, 효의 도덕에 묶여 있던 심청은 고향을 떠나 임당수, 그 바다 속에 빠져 죽습니다. 아버지의 실수로 시작된 사건에 휘말려, 결국 목숨을 쌀과 바꾸어 선인들을 따라 배를 타고 가서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죽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심청이 죽으면서 그가 속해 있던 하나의 세계가 함께 죽습니다. 매일의 동냥이나 삯바느질 등으로 연결되어 있던 하나의 세계, 아니 ‘효’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부모에 단단하게 포박해놓은 세계가 바다 속에 침수되어 사라집니다. 거기서 죽음이란 이전에 알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지점이고 이전에 살던 모든 방식이 소멸된 다른 세계가 시작되는 문턱입니다. 


자연의 바다가 그러하듯, 심연은 누군가가 바닥없는 깊이 속에 빠져 죽는 곳이면서, 새로운 것이 탄생하고 생성되는 공간입니다. 심연의 어둠, 그 침침하고 어두운 흑청의 바다는 생성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색으로 미만해 있습니다. 미지란 아직 알지 못함이며, 아직 알지 못한 가능성, 아직 펼쳐지지 않은 잠재성입니다. 심청이 죽는다는 것은 그 미지 속으로, 미지의 가능성 속으로 들어감입니다. 그리고 미지의 그 심연 속에서 심청은 죽고 다시 태어납니다. 다른 세계 속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 재탄생은 연꽃으로 새로이 피어나는 것 같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죽음 같은 심연 속에 자신을 던져 넣은 자, 자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삶, 다른 삶입니다. 


<심청전>에 불교적인 성격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몽은사 부처님이 등장하고 시주를 하고 하고 연꽃이 등장하는 것보다는 무엇보다 이 자아의 죽음, 그 죽음을 통해 들어가는 미지의 세계, 모든 방향으로 열린 그 세계로 태어남이라는 이 계기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물론 마지막에 맹인잔치에 참석한 수많은 맹인이 무명과 무지를 뜻하는 눈멂에서 벗어나 눈을 뜨고 광명을 보는 결말 또한 여기에 추가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자아의 죽음이 대대적인 눈뜸으로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음은 굳이 따로 지적하지 않아도 좋을 터입니다.


심청은 죽지만, 죽지 않습니다. 침수와 도래한 죽음의 문턱을 넘어 다시 태어납니다. 자신이 살던 세계와 이별하며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이라면 모두 이럴 겁니다. 그런 점에서 그 죽음은 생물학적 신체의 죽음이나 심리적 인격의 죽음이 아니라, 사실은 심청 안에서 ‘누군가’ 죽는 그런 죽음입니다. 봉사인 아버지를 위해 동냥하던 누군가가, 효의 윤리에 묶여 있던 ‘누군가’가 죽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닥쳐온 어떤 사건으로 인해, 내 안의 ‘누군가’가 죽는 것을 블랑쇼의 말을 빌어 ‘비인칭적 죽음’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Blanchot, 1998). ‘누군가’라는, 나, 너, 그를 특정할 수 없는 ‘누군가’, 1인칭도 2인칭도, 3인칭도 아닌 ‘비인칭’의 누군가가 내 안에서 죽는 것이란 의미에서.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 비인칭적 죽음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은 ‘비인칭적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심청 안에 누군가가 죽고, 다른 누군가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나는 심청 안에서 아직은 펼쳐지지 않은 잠재성의 세계가, 여러 방향으로 열린 가능성의 세계가 꽃봉오리처럼 생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청이 빠져죽은 임당수 물 위엔 재탄생을 표현하는 꽃이,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 꽃이 하나 솟아납니다. 그 안에 들어 앉아 있는 심청, 그는 아직 펼쳐지지 않은 잠재성 안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봉오리인 채 죽음의 자리에 피어난 저 연꽃은 재탄생한 심청의 형상을, 과거의 삶의 잔상들을 지운 채, 아직 피어나지 않은 잠재성으로서, 바다라는 모든 방향으로 열린 거대한 가변적 흐름 위에 떠 있는 것입니다. 


임당수에서의 죽음과 용궁에서의 탄생, 그것은 심청이 감수한 비극적 효행과 그에 대한 환상적 보상이라는 낭만적 구성(박일용, 1994: 95)이나 주인공의 몰락을 통해 그가 대변하는 이상이나 대의가 승리하는 리얼리즘적 구성(정출헌, 1999: 334~335)이라기보다는 심청이라고 명명된 한 사람의 신체와 ‘영혼’ 안에서 발생한 비인칭적 죽음과 비인칭적 탄생의 사건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그렇기에 심청이 ‘죽지 않고’ 살아났지만, 그는 신체 없이 떠도는 귀신이 아니요, 그렇다고 예전의 신체와 영혼을 가진 심청도 아닙니다. 새로이 탄생한 누군가에 의해 다른 특이성을 갖게 된 신체와 영혼이고, 그런 점에서 비슷한 신체적 및 정신적 요소가 아무리 많이 있다고 해도, 새로이 탄생한 인물이고, 이후 만나게 될 조건에 따라 더욱 다른 사람이 될 다른 인물입니다. 이전에 그가 살던 세계와는 다른, 아직은 잠재적인 다른 세계를 동반하는 인물입니다.


이는 심청이 연꽃 속에 앉아 임당수로 되돌아오지만, 그리고 자신을 사서 임당수로 밀어넣었던 남경 선인들의 손에 들어가지만,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하나의 이유입니다. 혹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갖는 하나의 의미입니다. 그가 원래의 세계로 되돌아갔다면, 그가 임당수에 빠져 죽은 것은 그의 신체와 영혼 안에 별다른 변화를 야기하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과거로 되돌아가는 거지요. 그런 귀향은 여전히 그가 떠나온 세계, ‘고향’이라 불리는 세계에 매여 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돌아가지 않음은 그 세계로부터 벗어났음을, 돌아갈 이유가 없음을 뜻합니다.

 

사실 ‘효’의 대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되살아난 심청은, 딸마저 없이 홀로된 봉사 아비를 생각하면 한시 바삐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가서 자신의 우행으로 인한 딸의 죽음을 슬퍼하는 부친의 치명적 고통을 덜어주고, 새로 얻은 신체와 필경 한층 더해졌을 신뢰를 바탕으로 부친을 극진히 모시고 ‘행복하게 살았더랍니다’하고 끝났어야 합니다. 그것이 효라는 대의에 충실한 <심청전>에 어울리는 결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심청은 눈먼 아비가 있는 도화동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심청의 효행에 감동하여 그를 구해준 용왕도, 옥황상제도 아버지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열혈 효녀로 가정된 심청이었다면, 적어도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효를 다룬 소설이라면, 이 또한 의외라고 할 것입니다. <심청전>의 이본 가운데 ‘김동욱 소장 45장본’은 이런 의문을 좀더 강하게 갖게 합니다. 



“꽃봉오리 속에 심낭자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다가 수정문 밖 떠나갈 제...(생략)... 3춘에 해당화는 수중에 붉어 있고 OO에[실실이] 푸른 버들 해수변에 드리웠는데 고기잡는 어옹은 시름없이 앉았구나. 한 곳에 다다르니 일색이 명랑하고 사면이 광활하다. 심청이 정신 차려 둘러보니 OO[여기]는 임당수더라. 슬픔 또한 꿈 가운데 아닌가”(김진영 외 편, 『심청전 전집』, 4, 박이정, 1998, 409) 



아마도 완판본에 이 판본을 더해 수정한 것으로 보이는 북한판 <심청전>은 좀더 이해하기 쉬운 말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심청은 연꽃의 잎들 사이로 슬며시 내다보고 ‘임당수임’을 확인합니다. “자세히 둘러보니 여기가 바로 지난날 자기가 몸을 던진 임당수였다.”(<심청전>, 보리, 96) 그리고 곧이어 남경 선인들이 임당수에 당도하여 심청을 위해 제사를 지내줍니다.



“그때 남경장사 선인들이...임당수 당도하여 큰 소 잡아 동이 술과 각색 과실 차려 놓고 북을 치며 제 지낸다. 두리둥 두리둥 북을 그치더니 심낭자의 넋을 쳐들어 큰소리로 부른다.... 선인들이 모두 울음 울 제 해상을 바라보니 난데없는 꽃 한 송이 물 위에 둥실 떠오거늘, 선인들이 내달으며 얘야 저 꽃이 웬 꽃이냐? 천상의 월계화냐 요지의 벽도화냐? 천상 꽃도 아니요 세상 꽃도 아닌데 해상에 떴을 때는 아마도 심낭자 넋인 게다.”(김동욱 소장 45장본, 『심청전 전집』, 4, 408~409)



연꽃 안에서 밖을 내다 둘러보고 임당수임을 알아차린 심청이, 자기를 위해 저리 북을 치고 제를 지내며 우는 남경 선인들을 모를 리 없습니다. 선인들도 그 꽃이 심낭자 넋인가 보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꽃 속에 숨은 심청은 내다보지 않으며 말을 걸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죽고 홀로될 부친의 고통을 자기 죽음보다 더 걱정하던 ‘효녀’가, 말을 걸어 다시 도화동으로,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한다면 기꺼이 그래줄 배꾼들에게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청이, 자신이 숨은 연꽃을 거둔 예전의 뱃사람들을 모르는 체 하는 것은 의도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이미 다른 누군가가 되어 알아볼 수 있는 눈마저 잃어버린 것일까요? 심청의 심사야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자신을 기다리는 부친에게로, 자신이 떠나온 집과 고향으로 되돌아가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효라는 ‘원리’가 심청의 행동에 더 이상 작용하지 않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고, 그런 점에서 <심청전>은 효를 다룬 텍스트라는 말이 설득력을 잃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묻고 답하자면, 심청은 왜 돌아가지 않는가? 돌아갈 누군가, 돌아가고자 하는 그 누군가는 임당수에 몸을 던질 때 심청 안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연꽃 안에 앉아 있는 심청 안에는 그와 다른 누군가가, 이미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거기서 돌아간다면 그것은 낡은 세계로의 후퇴고, 버리고 떠나온 자아로의 퇴행이 될 것입니다.  


여전히 ‘효’가 문제라면, 이제 그 효는 정해진 상투적 답에서 ‘무엇인 진정 효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으로 바뀌었다고 해야 합니다. 그 물음은 심청과 더불어 물결을 따라, 흐름을 따라 흘러갑니다. 다른 세계로, 다른 답을 찾아 흘러갈 것입니다. 이제 심청은 예전의 집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며, 예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심연을 본 자가 어찌 예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며, 심연의 한없는 어둠 속에서 탄생한 물음이 어떻게 예전에 주어지던 뻔한 ‘답’들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1. 이런 사건화의 방법에 대해선 제3장에서 다룰 것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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