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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 입문 강의] 2강 다섯 번째 부분

수유너머웹진 2016.01.08 22:04 조회 수 : 37

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2강. 『정치적 낭만주의』 (2) : 정치의 본질은 무엇인가? (네 번째 부분에 이어서)



<계속>


낭만주의적 사고 vs ‘법’과 ‘정치’ 


우선 150쪽을 보시죠. 낭만주의와 ‘법’이나 ‘규범’과의 궁합[양립 가능성]에 관해 기술되어 있습니다. 



… 낭만주의적인 것의 구조로부터 ― 미적인 창조성으로 향하는 기회원인론적 동의라는 그 구조로부터 ― 처음으로 결정이 생겨난다. 즉, 낭만주의적인 것이, 어떤 의미에서 도덕적, 법률적, 또는 정치적인 표준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해진다. 체험이 이 경우 추구하는 것은 예술적 형태일 것이지만, 논리=개념적, 또는 도덕=규범적인 한정이 아니기 때문에, 낭만주의적인 것에는 국가활동의 한계에 대해서도, 개인의 한계에 대해서도 아무런 감각은 없다. 법률적인 의미에서도 도덕적인 의미에서도 규범적인 것은 그에게는 통약 불가능한 것이다. 

[* 하지만 결정 ― 낭만주의자가 모든 도덕적, 법적, 혹은 정치적 표준과 전혀 양립할 수 없다는 것 ― 은 미학적 생산성으로 정향되어 있는 기회원인론적 동의로서의 낭만주의자의 구조로부터만 뒤따라 나온다. 여기서 경험은 틀림없이 예술적 표현의 추구 속에 있는 것이지 논리적-개념적이거나 도덕적-규범[정상]적인 명료함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낭만주의자는 국가의 효력의 한계는 물론이고 개인의 한계에 대해서도 전혀 감각하지 못한다(pp.127-128 ; 영어판에는 “법률적인 의미에서도 도덕적인 의미에서도 규범적인 것은 그에게는 통약 불가능한 것이다”라는 구절이 없다).]



지금까지 봤듯이, 낭만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기회원인론적으로 생긴다고 간주됩니다. 우리는 그 합리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생성과정에 ‘동의=승낙’을 부여할지 여부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런 우연에 몸을 맡기는 발상은 미적 창조에는 맞을지도 모르지만, 논리-개념적(logischbegrifflich) 혹은 도덕-규범적(moralisch-normativ)으로, 사고에 뭔가 테두리를 입히고 규칙에 따라 생각을 밀고나갈 필요가 있는 도덕철학이나 법학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죠. 


“…로부터 결정이 생긴다 ergibt sich die Entscheidung”라는 표현이 다소 걸리는데, 이것은 주체가 논리적 혹은 규범적으로 한정된 사고를 거듭한 후 스스로 ‘결단Entscheidung’을 내린다기보다는, 낭만주의적인 불가사의한 구조를 돌고 돌아 ‘결정’이 생긴다는 것이죠. ‘결정=결단’은 슈미트의 정치철학의 중요한 개념입니다만, 여기서는 아직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습니다. 슈미트에게 낭만주의적 사고는 규범과 논리에 의해 답을 짜내고 최종적으로 책임을 지고 ‘결단’하는 것이 요구되는 ‘법’이나 ‘정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시카와 씨는 〈das Normale〉를 ‘규범적인 것’으로 번역합니다만, 이것은 형용사의 〈normal〉을 명사화한 것이기에, 보통은 ‘정상적인 것’ 혹은 ‘보통적인 것’이라고 번역합니다. 그 전에 〈normativ(규범적)〉이라는 형용사가 있기에, 이것에 맞춘 거죠. 철자를 보면 알겠지만, 〈normativ〉도 〈normal〉도 ‘규범Norm’에서 파생된 형용사입니다. 그 어원적인 연결로부터, ‘정상=보통’이라는 것은 주어진 ‘규범’에 맞는다든가, ‘규범’은 사회에서의 ‘정상성’의 감각을 만들어낸다 같은 것이 연상되네요.  


‘정상=보통’이란 어떤 사람이나 물건의 현황에 관련된 인식 혹은 평가의 문제로, 이념으로서의 ‘규범’과는 관계가 없는 듯하지만, ‘정상=보통’이라는 감각으로부터 ‘규범’이 구성되는 것인지도 모르며, ‘규범’에 의해 우리의 ‘정상성’의 감각이 영향을 받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을 시사하기 위해 [〈norm〉 - 〈normal〉]이라는 쌍이 자주 사용됩니다. 현대사상, 특히 푸코(1926-84)의 논의에서 다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슈미트도 이 대목에서 이 말장난을 이용하고 있죠. 낭만파는 “보통적인 것=규범적인 것”과 성격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렇게 큰 의미는 없으나, 『정치신학』에서는 조금 더 깊은 의미를 집어넣어 사용됩니다. 



버크와 낭만주의 


155쪽부터 슐레겔 형제, 노발리스, 아담 뮐러들에게, 반혁명의 사상가로서의 버크가 끼친 영향에 대해 기술되어 있습니다. 1강에서도 얘기했듯이, 낭만주의와 보수주의를 제대로 구별하고, 후자의 윤곽을 분명히 하는 것이 슈미트가 이 책을 쓴 주요 목적이기 때문에, 낭만파와 버크의 관계는 중요합니다. 뮐러가 버크의 사상을 소개하고 그 대변자인 양 행동했기 때문에 독일에서 버크는 낭만주의자로 취급됐습니다. 



노발리스는 버크에 관해, 그는 ‘혁명적인’ 책을 혁명에 맞서 썼다고 말했다. 이것은 낭만주의자, 노발리스, F. 슐레겔, 또 다시 아담 뮐러에게 준 감명을 잘 나타내고 있다. 즉, 혁명적이라는 것은 당시에도 낭만주의적이라는 것과 동의어이며, 더욱이 반혁명적이라는 것도 낭만주의적일 수 있었다. 왜냐하면 프랑스혁명에서도 버크의 현란한 파토스와 강고한 성품에서도, 모두 순수하게 심미적인 감탄의 대상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 버크가 〈혁명〉에 맞서는 ‘혁명적’ 책을 썼다고 노발리스가 말했을 때, 이것은 낭만주의자들, 즉 노발리스, 프리드리히 슐레겔, 그리고 또한 아담 뮐러에게 이 책이 끼친 인상을 아주 잘 특징짓고 있다. 그 당시 혁명적[이라는 말]은 여전히 낭만적[이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그러나 또한 반혁명적도 낭만적일 수 있었다. 달리 말해, 프랑스대혁명에서는 물론이고 버크의 감명 깊은 파토스와 강력한 기질(temperament) 모두에 있어서, 심미적[미학적] 감탄과 모방에 대한 조장을 볼 수 있었다(p.131).]



즉, 낭만주의자에게 ‘혁명’은 ‘심미적 ästhetisch’인 대상이며, 중요한 것은 정치적 이념이라든가 규범이 아니라 ‘파토스 Pathos’였던 셈입니다. 초기 낭만파는 그런 혁명적·미적[심미적] 파토스에 매혹됐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버크의 반혁명의 파토스도, 혁명적-낭만주의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버크가 미학에 관한 「숭고와 미의 관념의 기원」(1757)이라는 논문을 쓴 것도 있어서 그런 인상은 더욱 강해집니다. 슈미트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면에서만 버크의 반혁명의 자세를 이해하는 것은 방향을 잘못 잡은 엉뚱한 짓이죠. 



버크가 관심을 둔 사항, 그의 역사적 감각, 국민공동체에 대한 그의 의식, 모든 강력한 ‘작위’에 대한 그의 반감, 그에게 있어서 역사적이고 정치적이었던 모든 것은, 다른 영역으로 높아지고 낭만화됐다. 이에 관한 결단은 버크나 드 메스트르, 보날이 어떤 자명한 사항으로서 설정한 자하릿히(ザッハリッヒ)한 고려의 능력이나 가능성 없이 진행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인물, 희곡, 철학적, 예술가적, 또는 문학적 업적의 ‘전설과도 같은’ ― 당시는 ‘낭만적인’이라고 불렸다 ― 인상이다. 따라서 프랑스혁명, 피히테, 괴테의 예에 버크도 더할 수 있었다(사실 뮐러는 그를 괴테 곁에 그렇게 나란히 뒀다). 노발리스도 그를 친구 혹은 애인이라고 칭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 버크가 관심을 기울인 것, 그의 역사적 감각(sensibility), 국민[민족]공동체에 대한 그의 감각(sense), 강제된 ‘제조(fabrication)’에 대한 그의 혐오 ― 그에게는 역사적이며 정치적인 의의(significance)를 지닌 모든 것은 다른 영역으로 바꿔지고(transpose) 낭만화됐다. 낭만화하는 과정은 객관적 성찰의 능력과 가능성 없이 발생하다. 그것은 어떤 인물, 역사적 사건, 철학적, 예술적 혹은 문학적 성취의 ‘전설과도 같은(fabulous)’ ― 그 당시에는 낭만적이라고 불렸던 ― 인상이다. 결과적으로 버크는 프랑스혁명, 피히테, 괴테와 비견될 수 있었다. 아담 뮐러는 이런 식으로 버크를 정말로 괴테의 곁에 세웠다. 나폴레옹과 베토벤도 낭만주의적 인물이라고 입증했다. 이에 덧붙여 노발리스는 그[버크]를 친구 혹은 애인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p.131).]



슈미트 입장에서 보면, 버크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감각 sein historisches Empfinden’, ‘국민공동체에 대한 의식(감정) sein Gefühl für die nationale Gemeinschaft’, ‘모든 강력한 “작위”에 대한 반감 seine Abneigung gegen das gewaltsame 》Mache《’입니다. 이때 ‘작위’는 오랜 세월을 거쳐 전통이나 관습으로서 형성된 제도를 부수고 혁명의 지도자들의 《이성》적 설계도에 따라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자 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sachlich(자흘리히)〉란 자신의 주관이 아니라 ‘사물 Sache’의 실제 존재방식에 입각하다, 즉 객관적, 즉물적이라는 것입니다. 독일어를 제대로 공부한 대학 선생 중에는 가타가나로 그대로 ‘자하릿히(ザッハリッヒ)’라고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버크는 드 메스트르나 보날과 마찬가지로, 제도에 관해 ‘자하릿히’하게 판단할 능력이 있는데도, 낭만파는 그런 측면을 이해하지 않고, 버크를 ‘정치’를 조형하는 ‘예술가 Küstler’로 다룬다. 이것을 비꼬고 있는 거죠. 



‘무한한 대화’는 정치적 공론장으로 비약할 수 없다!? 


이제부터 뮐러에 초점을 맞춰 그의 수사에 대한 꽤 끈질긴 분석이 이어지고 있네요. 164쪽에, 그가 최상급을 자주 사용한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168쪽에 낭만파 사상의 특징 중 하나로, ‘대화 Gespräch’라는 요소가 있다고 지적됩니다. 『정치신학』과 『현대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지위』에서 부르주아지는 논의[토론]하는 계급이며, 부르주아가 주도하는 의회는 쓸데없이 수다만 떨 뿐이며, 정치적 의사결정을 못한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 것과 부르주아지의 예술가인 낭만파의 ‘대화’ 선호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대화’(Gespräch)라는 말은 노발리스가 그 사용에 있어서 특별한 뉘앙스를 부여한 것인데, 뮐러는 그의 영향 아래서 이것을 받아들였으며, 질리지도 않게 줄기차게 이용하고 있다. 이미 『대립논고』의 서언(序言)에서 그는 ‘전 유럽에 관한 일관성 있는 아무런 대화도’ 수행되지 않고 있음을 개탄하는데, 모든 형태를 취해 그것이 반복되고, 프러시아의 관제신문의 편집에 관한 각서에서조차 그는 정부가 반대당과 ‘대화’를 행한다는 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 대화라는 단어는 사교적인 ‘말장난(play with words)’의 경우에 모든 대상을 취하는 낭만주의적 생산성의 특별한 종류에 대한 이름인데, 이 단어는 그[뮐러]의 저작에서 끈질기게 다시 등장한다. 일찍이 『대립론(Lehre vom Gegensatz)』의 서문에서 뮐러는 ‘아무런 정합성도 없는 대화’가 ‘유럽 전체를 통해’ 소비되고 있음을 개탄한다. 이는 모든 판본에서 반복된다. 그는 프러시아의 관제신문을 편집하기 위한 노트(memoir)에서조차도 이를 억누를 수 없었다. 즉, 정부는 야당[반대자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p.139).]



낭만파가 ‘대화’를 중시하는 이유는, 이론적으로는 앞서 얘기한 ‘무한한 반성’ 혹은 ‘초월론적 포에지’의 문제와 관련됩니다. 통상적 의미에서 ‘반성’은 자기 안에서의 ‘대화’죠. 슐레겔과 노발리스의 문예이론에서 이런 ‘반성=대화’는 언어활동, 특히 시작(詩作)을 통해 다른 ‘나’들과의 관계로까지 확장됩니다. ‘나’가 말한 것, 쓴 것을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 떨어진 장소에 있는 다른 ‘나’들이 다양하게 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를 끌어냄으로써, 반성=시작(詩作)의 행위가 점점 연쇄되고, 무한히 확산됩니다. 그것을 자/타의 구별을 넘어선 무한한 대화라고 볼 수도 있겠죠. 세계는 ‘무한한 대화’에 의해 구성되는 것입니다. 


‘무한한 대화’라고 말하면, 포지티브한 느낌이 들지만, 뒤집어 보면,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질 뿐이고, 적절한 때에 ‘결단’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한한 ‘대화’ 비판이 슈미트의 의회주의 비판, 자유주의 비판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라는 가치를 받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슈미트는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유주의는 여러 가지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계속 말하게 할 뿐, 이를 수습하려고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동일성’을 전제하고 있는 데도, 그것을 애매한 채로 두고, 대화만 해서 결단할 수 없는 상태에 머문다. 


       무한한 대화 = ‘무한한 반성’, ‘초월론적 포에지’

       ‘나’가 이야기한 것, 쓴 것을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분리된 장소에 있는 

다른 ‘나’들이 다양하게 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를 끌어냄으로써, 

반성=시작(詩作)의 행위가 점점 연쇄되고, 무한히 확산된다.

             ↓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질 뿐이고, 

      적절한 때에 ‘결단’이 나오지 않는다.

                 ↘

                   <슈미트>    의회주의 비판, 자유주의 비판 




앞서 읽었던 대목의 마지막에서부터 상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슈미트는 뮐러가 오로지 ‘대화’만을 지향하는 인물이며, 대립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예술가는 예술작품의 감상자와 대화하며, 또한 자연은 예술과 동일하기 때문에, 자연은 인간과 대화한다. 모든 꽃, 모든 회화는 담화의 파트너가 되며, 혹은 청자이며, 혹은 화자이다. 전 세계, 삼라만상은 일개 대화로 간주되고, 그래서 때로는 그의 사유와 감정에는 사회학적인 정위가 있는 듯한 외관(外觀)이 생겨난다. 왜냐하면 그는 ― 낭만주의자에게는 드문 예이지만 ― 상호관계에 관한 이해를 갖고, 또한 인간만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아님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도 대화만을 그 내용으로 삼는다. … 화자는 청자와 ‘전쟁’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것과 평화적인 관계에 있다고도 간주된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대립은 곧바로 매개되고 가교된다. 항상 양해가 성립하고, 대화가 더 진행될 수 있도록 해답이 주어진다. 사실상 항상 가정되는 ‘사회’란 친구와 마음이 같은 사람들의 직접적인 육체적·영혼적 친근이다. 그 안에서는 잘못된 개념에 대립하는 ‘참된’ 개념 등을 스스럼없이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이며, 번거로운 개념적 또는 실체적 증명과 관계를 맺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 예술가는 예술작품 감상자와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자연과 예술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자연은 인간존재와 대화를 나눈다. 모든 꽃과 모든 그림은 토론에서 대화상대가 된다. 때로는 청자이고 때로는 화자인 것이다. 세계 전체, 우주는 대화이다. 그러므로 가끔 이런 사유나 감정이 사회학적으로 방향이 정해져 있다는 인상이 생겨난다. 낭만주의자에게는 드문 경우이지만, 그것은 상호성의 진가를 알고 있고, 또 인간 존재가 세계 속에서 홀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인간 공동체는 그 내용으로 낭만주의적인 대화만을 가질 뿐이다. … 화자는 청자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청자와 평화로운 상태에 있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는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안티테제는 즉각적으로 매개되고 화해되며, 동의가 변함없이 뒤따른다. 사실상 항상 가정된 ‘공동체’는 친구들과 같은 마음을 먹은 사람들의 즉각적으로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친밀성(proximity)이다. 여기서 거짓된 ‘개념’에 대립하는 ‘참된’ 개념이 스스럼없이 얘기될 수 있으며, 번거로운 개념적 혹은 실체적 증명으로 진입할 필요는 없다(pp.139-140).]



뮐러가 말하는 ‘대립’은 정말로 개념·실체적으로 근본화된 대립이 아니므로 쉽게 《해답》이 주어지며, 곧바로 다음 대화가 시작된다는 것이죠. 헤겔과 맑스의 변증법처럼, 개념적 대립을 철저하게 밝혀내고 다음 단계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를 애매한 채로 두고, 어쩐지 《양해》를 성립시키고, 수다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죠. 어쩐지 익숙한 일본문화론 같네요. 슈미트가 어떤 발상을 싫어하는가를 잘 알게 됩니다. 



뮐러는 웅변에 관한 그의 강화(講話)에서, 웅변을 어떤 남성적인 것으로서, 행동과 결단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여성적인 것으로서의 시에 대립시키고 있다. 그것은 우선 그의 웅변가로서의 항변의 일례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그의 천부적 재능[天賦]이 시인의 그것이었다면, 그가 기능적으로 청중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웅변가에 대해, 창조적·생산적 활동으로서의 시인의 생산 속에 어떤 남성적인 것을 인정하게 될 것도 거의 자명하다. 그러나 이 강화(講話) 안에는, 독일인은 쓰는 민족이며, 따라서 침묵의 민족이라는 뼈아픈 한탄이 일관되어 있다. 그것은 웅변에 관한 강화(講話) 이외의 대변론(大弁論)을 이룩하는 것도 아니며, 그 천부적 재능[天賦]이 당시의 정치정세 일반 아래서는 친구 간의 대화와 사교 서클에서의 약간 뛰어난 웅변이라는 것을 그다지 뛰어넘지 못했던 타고난 변설가(弁舌家)의 탄식이다. 이 강화(講話)가 나타내는 감정은 현실의 정치적 생활에 대한 동경이지만, 그러나 이 강화(講話) 자체는 낭만주의적인 동의라는 좁은 경계로부터 탈각시키고자 하는 이 동경의 형상화에 지나지 않는다. 

[* 뮐러는 수사에 관한 연설에서 활동과 결의를 목표로 하는 남성적인 것으로서의 수사를 여성적인 것으로서의 시와 병치시켰다(juxtapose). 무엇보다 이것은 그의 웅변술적 대조의 사례일 뿐이다. 그리고 만일 그의 [천부적] 재능이 시인의 재능이었다면, 그가 공중에게 기능적으로 의존하는 수사에 대립하여, 창조적이고 발생적 활동으로서의 시적 생산 속에서 남성적인 어떤 것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임은 거의 자명하다. 하지만 연설 전체에는 뼈아픈 한탄이 울려 퍼지고 있다. 독일인은 [뭔가를] 쓰는 민족(people)이며, 따라서 침묵하는 민족(people)이라는 뼈아픈 한탄이 말이다. 그가 지닌 유일하게 위대한 담화(speeches)가 수사에 관한 것이며 그가 지닌 [천부적] 재능이란 그 당시의 정치적 조건에서는, 친구들 사이의 사교모임과 대화에서의 웅변을 거의 뛰어넘지 못했던 타고난 언변가(speaker)의 탄식인 것이다. 연설은 현실의 정치적 삶에 대한 갈망에 의해 유지되지만, 연설 자체는 낭만적 감정이입(empathy)이라는 좁은 한계에서 탈피하려는 이런 갈망을 웅변론적으로 배열한 것(oratorical configurations)일 뿐이다(pp.140-141).]



슈미트의 주관적인 인상이 굉장히 강하게 들어 있는데요, 뮐러는 자신에게 시[인]의 재능이 별로 없기 때문에 ‘웅변Beredsamkeit’이 ‘남성적 männlich’이라고 말했다는 것인데요, 정말이라면, [뮐러가] 몹시 《여성스럽다》는 얘기네요. 제가 《여성스럽다》고 판단하고 있는 게 아니라, 슈미트가 그렇게 비꼬고 있다는 것이니까, 페미니스트적으로 속단하지는 마세요(웃음). 게다가 독일민족의 비-웅변에 대한 그의 한탄도, 그 자신이, 친구와의 대화에서 웅변을 피력[披露]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고, 현실의 정치에 그다지 참여할 수 없다는 좌절(욕구불만, frustration)에서 나온다는 것이네요. 그렇다면 갈수록 《여성스럽네요》(웃음). 슈미트의 말투를 따르면, 뮐러는 자신이 낭만주의적인 동의, 즉 예정조화적인 수다 떨기의 좁은 세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정말로는 알고 있고, 조급하게 굴고 있다는 느낌이네요.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구조변동』(1961)에서 시민사회를 기능시키는 ‘정치적 공론장 politische Öffentlichkeit’의 전신(前身)으로, 생활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부르주아가 문학작품의 낭독회·독서회를 열거나 카페에서 작품에 관해 서로 얘기를 나누는 ‘문예적 공론장 literarische Öffentlichkeit’이 형성되었음을 지적했습니다. 이런 문학작품들 중에는 정치적 테마를 포함한 것도 꽤 있어서, 문예적 대화가 정치적 토의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슈미트가 이미지로 만들어내는(image) 뮐러는 문예적 공론장에서 정치적 공론장으로 비약할 수 없고, 몹시 괴로워했다는 느낌입니다. 



‘정치적 낭만주의자ein politischer Romantiker’ vs ‘낭만주의적 정치가ein romantischer Politiker’ 


그 후, 뮐러에게는 국가와 경제에 관한 저작도 있지만, 독창성은 거의 없고, 낭만주의적 문체로 몇 가지 논점을 부각시켰을 정도라는 비아냥거림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179쪽에는 독일사에서 유명한 코체부 암살사건(1819)이 적혀 있습니다. 독일 민족주의 운동이 고조되고 있음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August von Kotzebue, 1761-1819)는 바이마르 태생의 법률가·작가인데요, 러시아로 이주해 러시아정부의 관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1817년에 러시아 총영사로 독일에 파견됐습니다. 저술가이기도 한 그는 자유와 통일을 요구하는 청년운동을 혁명적이고 위험하다며 공격합니다. 그래서 1817년 바르트부르크(Wartburg)에서 개최된 독일학생운동 집회에서 그의 책은 분서의 대상이 되며, 1819년 3월에는 학생조합(Burschenschaft) 운동의 투사였던 루트비히 잔트(Karl Ludwig Sand, 1795-1820)가 조국을 배반한 자라며 암살했습니다. 잔트는 결코 거물 첩보공작원이 아니었습니다만, 독일 연방국가의 수뇌부는 학생조합운동의 과격화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 해 10월, 오스트리아령인 카를스바트(Karlsbader, 현재는 체코)에서 독일연방들의 각료회의가 열리고, 메테르니히 아래서 대학의 관리를 강화하고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카를스바트 결의 Karlsbader Beschlüsse’가 채택됩니다. 



코체부는 누구나 알듯이 정치적으로는 하잘것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살인이나 범행은 정치적으로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사건이지만, 잔트가 비록 전적으로 국민적 동기에서 행동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은 역시 전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진지한 의미를 지닌 정치 의지 대신에 그저 개인 심리적인, 실질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따라서 전적으로 우연적인 대상에 있어서 본다면, 이 사건에는 낭만주의적인 구조가 주어지게 된다. 이것도 우인론적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에너지의 집중된 점이 우연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 잔트가 설령 전적으로 애국적인 동기에 기초해서만 행동했다고 하더라도, 코체부가 분명 정치적으로 중요 인사가 아니며 그를 살해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어리석은 정치적 사건(incident)이게 된다는 사실은 전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중요한 정치적 의도에 순전히 기회원인적(occasional) 대상이 전가된다는 사실 덕분에, 사건은 그 낭만주의적 구조를 획득한다. 이 경우에도 구조는 또한 기회원인론적(occasionalistic)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에너지가 집중되는 점은 기회원인적(occasional) 방식으로 불현듯 생각나기 때문이다(p.147).]



이것은 알기 쉽네요. 코체부는 독일 정치를 움직이던 거물이 아닌데도, 그를 암살함으로써 자신의 조국애를 설명하고 영웅이 되려 했던 잔트의 행위는, 상식적으로는 심하게 독선적인 듯이 보입니다 ― 당연히 잔트 자신은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더욱이 그것이 정치적 대사건으로 부각됐기 때문인데, 우스꽝스럽기도 합니다. 그런 작은 이야기가 내셔널리즘의 에너지의 집중점이 된 것이니까, 바로 낭만주의적 구조에서 우인론적으로 생겨난 현상이군요. 그러나 슈미트는 잔트의 행위가 정치적 낭만주의의 그것과는 다르고, 오히려 정반대방향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방향은 정치적 낭만주의에 대해 반대이며, 외부로 향한다. 그래서 그 작용, 목적 terminus ad quem은 우인적이며, 우인적 원인causa occasionalis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인적 결과effectus occasionalis가 존재하게 된다. 강력한 정치력의 콤플렉스는 그 목표를 찾아낼 수 없으며, 낭만주의적으로 말하자면 말하기 힘든 한 점을 향해 맹렬하게 격돌한다. 낭만주의적으로 구성된 기회를 바탕으로 한 이런 정치행동의 불멸의 전형은 돈키호테이다. 그는 낭만주의적 정치가였지 정치적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더 높은 조화 등을 대신해 정의와 부정의를 구별하고, 그 정의라고 하는 것을 위해 결단을 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 방향만은 정치적 낭만주의와 대립되며 외부로 향해 있다. 그러므로 그 효과, 도달점(terminus ad quem)은 기회원인적(occasional)이다. 원인(causa)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원인적 효과(effectus occasionalis)가 현전한다. 강력한 정치적 에너지들의 복합체는 그 목표를 찾아낼 수 없으며, 그것은 거대한 힘으로 기회원인적 점을 강타한다. 낭만주의적으로 파악된 기회들로 이루어진 이 정치의 불멸의 전형은 돈키호테이다. 그는 낭만주의적인 정치적 형상인 것이지, 정치적 낭만주의가 아닌 것이다. 더 높은 조화를 보는 대신, 그는 옳음[정의]과 그름[부정의]의 차이를 볼 수 있었고, 그에게 옳다고[정의라고] 보인 것을 위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p.147).]



추상적이고 알기 어려운 듯 싶지만, 우선, 슈미트가 ‘정치적 낭만주의자 ein politischer Romantiker’와 ‘낭만주의적 정치가ein romantischer Politiker’를 구별하는 것, 잔트와 돈키호테를 후자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은 읽어낼 수 있네요. 말할 것도 없이, 돈키호테는 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1547-1616)의 풍자소설 『돈키호테』(1605)의 주인공으로, 기사도 이야기를 읽고 열렬히 동경해, 기사가 될 작정으로 이러저러한 망상 같은 무용담을 행하는 인물이죠. 


“그 작용, 목적 terminus ad quem은 우인적이며, 우인적 원인 causa occasionalis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인적 결과effectus occasionalis가 존재하게 된다”는 대목은 알기 어렵네요. ‘작용’의 원어는 〈Wirkung〉으로, 이것은 영어의 〈effect〉와 마찬가지로 〈결과〉나 〈효과〉 등의 의미도 있습니다. ‘목적’이라고 번역된 라틴어의 〈terminus ad quem〉은 ‘도달점’이나 ‘목표’라고도 번역됩니다. 이 두 가지가 거의 동의어로서 사용되고 있군요. 잔트와 돈키호테의 행위가 미치는 효과가 ‘우인(연)적occasionell’이라는 것은 알겠네요. 행동의 표적(target)을 설정하는 데 망상이 들어 있는 것이니까, 어떤 효과가 생기는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인적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결과는 ‘우인적’이어도, ‘원인’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고, ‘우인적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네요. 말하자면, 그들의 행동의 ‘원인’, 동기는 명확하게 방향지어져 있었다는 것이죠. 행동의 동기는 확실하지만, 어떤 결과가 될지를 미리 전망할 수 없는 채로 앞으로 내달리는 사람을 ‘낭만주의적 정치가’라고 부르는 느낌이네요. 동기와 결과 사이에, 앞을 내다보는 효과가 없는, ‘낭만주의적인 (인과의 연쇄의) 구조’가 있다. 


지금까지의 얘기에서 알 수 있듯이, 슈미트는 ‘정치적 낭만주의자’를, ‘정치’를 낭만주의적으로 가상(virtual)화하고, 쓸데없는 수다를 계속할 뿐이고, ‘결단’하지 않는 사람,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돈키호테로 대표되는 ‘낭만주의적 정치가’는 우선, ‘정의 Recht / 부정의 Unrecht’를 구별하고, ‘정의’를 위해 ‘결단’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친구/적의 구별이라고 논합니다만, 여기서는 이를 선취하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네요. 덧붙이면, 독일어의 〈Recht〉에는 ‘법’ 또는 ‘권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정치’를 낭만주의적으로 상대화하고, 결국 실천면에서는 현상태에 순응해버리는 ‘정치적 낭만주의자’와, ‘정치’적인 결단을 하고 있기는 하나 우인론적 구조에 파고들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짓을 저지르는 ‘낭만주의적 정치가.’ 전자는 ‘정치’를 방관자적으로 보고 있으며, 결국 위험한 것을 피하게 되지만, 후자는 완전히 ‘정치’의 당사자가 되어버리고 (그럴 작정이어서), 제3자의 눈에서 보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슈미트는 당연히 후자를 더 호의적으로 평가합니다. 


다만 돈키호테와 정치적 낭만주의가 전면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돈키호테는 중세의 기사도 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근대인이기 때문에, 낭만주의자에 가까운 면도 있습니다. 



‘정치적 낭만주의자 ein politischer Romantiker’

    ‘정치’를 낭만주의적으로 가상(virtual)화하고, 쓸데없는 수다만 계속할 뿐이고 ‘결단’하지 않는 사람, 

할 수 없는 사람

    ‘정치’를 낭만주의적으로 상대화하고, 결국 실천면에서는 현상황에 순응해 버린다.


‘낭만주의적 정치가 ein romantischer Politiker’

    ‘낭만주의적 정치가’는 우선 ‘정의 Recht / 부정의 Unrecht’를 구별하고 

‘정의’를 위해 ‘결단’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정치’적인 결단을 하고 있을 뿐, 우인론적 구조에 파고들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짓을 저지른다. 

                                                   ex. 돈키호테




그러나 돈키호테에서도 신시대의 전조가 나타난다. 그것은 존재론을 새로운 문제로 삼는 데 이른 시대이다. 이 점에서 이 스페인 하급귀족은 주관적 우인론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그는 둘치네아에 관한 관념이 그녀의 현실의 모습[표현]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둘치네아가 어떤 사람인가는 중요하지 않으며, 그녀는 그가 위대한 행동에 열중하게 만드는 변함없는 이상적인 숭배의 대상이라는 것만이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 그러나 돈키호테에서조차 존재론이 새로운 문제가 되는 새로운 시대의 전조가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스페인의 [하급]귀족은 주관주의적 기회원인론과 종종 가깝다. 그는 둘치네아에 대한 자신의 관념이 그녀의 진짜 모습보다 더 중요하다고 선언한다. 이 때문에 둘치네아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돈키호테로 하여금 위대한 행동을 하도록 고무하는 이상적 헌신(devotion)의 대상인 채로 남아 있다는 것뿐이다(p.148).]



둘치네아는 돈키호테의 이상적 여성으로, 노발리스의 조피에 해당됩니다. 돈키호테는 둘치네아가 실재하는 듯이 행세하지만, 실제로는 그의 믿음일 뿐이며, 그 근처에 사는 평범한 여성을 둘치네아로 취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만, 그것을 돈키호테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는 듯한 발언을 합니다. 즉, 사물이나 인물이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자문하는 거죠. 주관적 우인론이란, 낭만주의처럼, 사물들 사이에는 우인적 연관밖에 없다는 전제에 서서, 그 연관을 주관적으로 재구성하려 하는 철학적 입장을 생각하면 좋겠죠. 



낭만주의에서는 이런 사상이 엄청나게 전개됐다. 그것은 우선 젊은 프리드리히 슐레겔에 의해 공공연하게 언명됐다. 그는 돈키호테의 경우에는 여전히 갖고 있던 도덕적 열정(pathos)을 이 사상에서부터 빼앗고, 주관주의적인 상상력의 표현으로 삼았다. [* 영어본에서 해당되는 대목을 찾지 못함]



낭만주의는 돈키호테가 이미 보여줬던 주관적 우인론을 철저하게 했다. 즉, 돈키호테적인 도덕적 정념을 제거하고 주관적 상상력에 의해, 미화된 이상과 영구히 계속 놀아나는 길을 지향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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