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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코너는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 원고 중 일부를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3장 나는 <홍길동전>이 좋은 소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전 출간된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입니다. 여러 서점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 번째 부분 보기)

 

4. 상징적 전쟁의 귀착점

 

병조판서를 그만두고 조선을 떠나기 위해 길동은 남경땅 쪽에 갈만한 곳이 있는가 탐색합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쌀 1천석을 얻어 부하들을 데리고 남경땅 ‘제도’라는 섬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율도국을 정복하여 이젠 스스로 임금이 됩니다. 흔히 조선의 외부에 율도국이라는 ‘이상국가’를 건설한다고 흔히 요약되는 이 부분은 홍길동이 조선땅을 휘젓고 다니며 ‘사고를 치는’ 전반부의 내용과 많이 다르지만, 앞서 분석한 <홍길동전>을 ‘완성’해주는 부분입니다.[각주:1]

 

삼천 명의 무리를 데리고 섬에 들어간 홍길동은 이전과 달리 구빈활동은 하지 않으며 정의의 도적이 되지도 않습니다. 섬에 정착한 그들은 집을 짓고 농사를 짓는 한편, 무기창고를 짓고 군사훈련을 합니다(48). 농사를 짓는다고 한 걸로 보아, ‘정착’했다는 말은 단지 거처를 정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정착적인 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농사를 지으면서, 도적질이나 구빈활동을 할 것도 아닌데 왜 무기창고를 짓고 군사훈련을 하는 것일까요? 낯선 땅이니 뜻밖의 떼강도나 인근 국가의 침입에 대비하려는 것일까요? 그러나 “이곳은 본래 깊고도 아늑한 곳이라 누구도 알 사람이 없고 또한 풍족했다”(48)고 하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있을까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인근에 율도국이란 나라가 있었는데, “그 넓이는 수천리요, 사방이 막혀 있어 과연 견고하고 풍요로운 나라였다”고 합니다(58). 완판본에서는 “중국을 섬기지 아니하고, 수십 대를 전자전손하여 덕화유행하니,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넉넉하”다고 쓰고 있습니다(『홍길동전 전집』, 78). 그런데 “길동이 매양 이곳에 뜻을 두어 왕위를 빼앗고자 했는데, 이제 [부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기운이 활발하여 세상에 두려워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경판본>, 앞의 책, 58) 하여 군대를 일으켜, 언제 그리 늘었는지 오만 명의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율도국을 습격합니다. 물론 결과는 율도국의 왕과 태자가 죽고 길동이 왕위에 오르는 것입니다. 

 

홍길동은 아무도 없는 어느 오지에 가서 율도국이란 나라를 새로 만든 게 아니라, 인근에 있는, 완판본에선 심지어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넉넉하다”고 묘사되는 멀쩡한 나라인 율도국을, 왕위를 얻기 위해 난데없이 침략하여 정복한 것입니다. 이건 이전에 자처하던 ‘의적’과는 거리가 멀고, 문제가 있는 어떤 체제에 반하여 그것을 전복한 것도 아닙니다. 왕위를 얻고자 멀쩡한 나라를 침략한 것입니다. 경판본에서도 완판본에서도 이 침략이나 정복에 어떤 명분도, 그럴 듯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습니다.[각주:2] 그렇다고 왕권을 획득한 길동이 평생의 한이었던 신분제나 서얼제도를 없애는 것도 아닙니다. 병조판서 되고 나선 한이 풀렸는지, 그 얘긴 다신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거 아닌 다른 개혁적인 조치를 했다는 얘기도 전혀 없습니다. 그 뒤에 태평성대를 누린다고 쓰기는 하지만(그거야 아무 생각 없이 붙이곤 하는 상투구지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길동이 율도국을 친 데는 왕권에 대한 개인적인 야망 말고는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습니다.[각주:3]

 

이 무참한 태도는 남경 제도의 산에 들어갔다 만난 ‘괴물’을 죽이는 장면에서도 당혹스럽지만 이미 충분히 예시(豫示)됩니다. 약을 구하러 섬의 망당산에 들어간 길동은 ‘울동’이라는 ‘괴물’을 만납니다. 울동은 “그 모습은 비록 사람이나, 짐승의 무리가 분명했다.”(49) 모습은 사람인데 짐승이라니, 이거 참 난감한 말입니다. 김경미가 소현세자의 『심양장계』에서 발견되는, 태국인 등 남도의 낯선 인종에 대한 묘사를 빌어 지적하듯이(김경미, 2010: 198), 사람처럼 생겼으나 짐승인지 아닌지 모호한 이 울동이란 존재는 아마도 그 섬의 원주민이었을 겁니다. 어쨌건 사람 같이 생긴 존재인데,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해보지도 않고 ‘짐승의 무리’라고 단정합니다. 무슨 징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짐승이면 죽여도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짐승이 분명했다’는 판단 하나로 활시위를 당깁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자신을 공격한 것도 아니고, 무언가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길동은 ‘내 두루 다녀보았으나 이 같은 것은 처음 보는 것이라. 이제 저것을 잡아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리라’고 생각하곤 활을 쏩니다. 세상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활을 쏘는 것입니다. 그리곤 다음날 그들의 소굴로 찾아가 독약을 써서 전날 화살을 맞아 부상당한 우두머리를 죽이고, 놀라서 달려드는 울동의 무리를 갖은 술법으로 써서 모조리(!) 죽여버립니다. “한바탕 싸움으로 모든 요괴를 다 죽이고, 도로 요괴가 사는 곳으로 들어가 남은 요괴까지 모조리 죽였다.”(51) 죽여야 할 특별한 사건도, 죽일만한 이유도 딱히 없는데, 모두 죽인 것도 모자라 다시 사는 곳까지 찾아가 남은 것들을 모조리 죽인 것입니다. 거기서 돌문 안에 있던 두 여자마저 “계집요괴인 줄 알고 마저 죽이려고 했다.”(51) 계집요괴라고 생각했던 이 두 여자는 울동에게 납치된 인간이었고, 나중에 홍길동의 두 처가 됩니다.[각주:4] 인간을 계집요괴라고 생각했던 걸 보면, 그가 ‘요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모두 인간이었을 것임을 함축합니다. 

 

홍길동의 이 살해는, 아무리 괴물이라는 딱지를 붙인다고 해도 정당한 이유를 찾기 힘듭니다. 그건 심지어 사냥도 아닙니다. 거기에 심지어 남녀도 없고 노소도 없습니다. 끝까지 찾아가 모조리 죽입니다. 단지 자신이 ‘요괴’라고 생각했다는 이유만으로. 낯선 모습에 놀라 괴물이라고 생각했다곤 해도, 이건 일족의 씨를 말리는 학살입니다. 의적은커녕 학살자의 모습입니다. 이는 아무런 명분도 없이 왕위를 얻으려는 야망으로 율도국을 침략한 것과 사실은 매우 잘 부합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율도국에서의 <홍길동전>은 낯선 이를 ‘타자화’하고, 멀쩡한 나라를 침략해 정복하는 식민주의적 서사라는 지적(김경미, 2010)은 충분히 이유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율도국 정복에 왕위에 대한 욕심 말고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요? 명시적이진 않지만 사실은 명백하고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경땅 제도에 들어간 길동이 율도국을 치기 전에 가장 공들여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건 오래지 않아 돌아가실 아버지의 묘를 미리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덤의 규모는 왕의 무덤인 ‘국릉’과 가까웠습니다(54, 56). 무덤을 조성한 뒤 길동은 조선으로 갑니다. 그 아버지는 홍길동이 찾아올 것이라며 “부디 서자 차별하지 말고 제 어미를 잘 대접하라”(54)고 이르고 죽고, 그 죽음을 예상하여 멀리 조선으로 아버지 문상을 하러 간 길동은 부친의 시신을 자기가 사는 땅으로 모셔옵니다. 같이 온 형도 산소를 국릉 같이 꾸며놓은 걸 보고 크게 놀랍니다. 여기서 아버지 무덤을 ‘국릉’ 같이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미 그가 왕의 지위를 꿈꾸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즉 어디가 되었든 왕의 자리를 얻고자 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는 거꾸로 그가 “누구도 알 사람 없을 만큼 깊고 아늑하며 풍족한” 섬에 정착해 처음부터 군사훈련을 하고 병법을 가르친 이유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이미 그는 그 섬에 들어가면서부터 왕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군사를 키우고 아버지의 무덤을 왕릉처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율도국을 치고 들어간 이유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길동이 아버지의 무덤을 국릉처럼 조성한 것은 단지 지극한 효성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가 아버지의 무덤을 왕릉처럼 조성한 것과, 그가 율도국을 쳐서 왕이 된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행위였습니다. 길동은 왕위에 오른 뒤 모든 장수들에게 벼슬을 하나씩 주어 치하한 후에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하는 다음의 절차로 정복을 완성합니다.

 

“부인 백씨와 조씨를 왕비로 봉하고 부친을 추존하여 현덕왕으로 봉했으며, 모친 춘섬은 대비로, 백룡과 조철은 부원군으로 봉하여 궁실을 내려주었다. 또한 부친의 능호를 선릉이라 하고 선릉 위에 올라 제문을 지어 제사지내고, 모부인 유씨를 현덕왕비로 봉했으며...”(61)

 

이로써 아버지와 왕이라는 두 개의 주인기표는 하나로 통합되고, 길동은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아버지와 왕이라는 기표를 모두 소유하게 됩니다. 아버지와 그 위의 왕으로 이어지던 주인기표는, 왕인 자신과 왕릉 같은 무덤을 통해 ‘선왕’으로 변형된 그 위의 아버지로 대체되어 길동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 것입니다. 천비소생의 천한 주체가 왕이라는 최고의 귀한 주체가 된 거지요. 분열되었던 가족은 정상화되었을 뿐 아니라 버젓한 ‘왕가’를 이루게 되엇고, 천출의 신분으로 인해 발생한 정체성의 간극은 왕이라는 자리를 통해 해소된 것입니다. 이를 확인하기라도 하려는 듯, 길동은 모든 것이 잘 풀려 안정된 뒤 모친을 모시고 “지난 일을 생각하며 서글프게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말합니다. “소자가 당초 집에 있을 적에, 만일 자객의 손에 죽었다면 어지 오늘날 이같이 되었겠사옵니까?”(61) 이는 정체성 안의 간극과 주체화의 실패에서 시작한 드라마가 상징적인 투쟁을 거쳐 도달한 최종적인 완결의 지점이란 점에서 <홍길동전>의 결말이라 하기에 적합하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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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병원(1988)은 문장의 글자수 비교를 통해 독자의 흥미를 위해 후세에 첨가한 부분으로 간주합니다. 율도국 부분이 앞서 조선에서 홍길동의 활동을 다룬 부분과 이질적이라고 보는 셈인데, 무대가 바뀌고 활동이 바뀐 만큼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질적인 텍스트라고 할 수 있을진 잘 모르겠습니다. 이질적인 텍스트라고 해도 이어 붙여 작품이 된 만큼, 연결의 효과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최대한 분석하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본문으로]
  2. 김경미(2010)는 이를 식민주의적 침략이라고 평하는데, 타당한 지적이라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3. 후대의 독자들 또한 이는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여 1900년경 필사된 세책본인 동양문고본 홍길동전(이윤석, 1998)에서는 율도국을 “태평하고 넉넉한 나라”가 아니라 정사를 돌보지 않는 왕으로 인해 인민들이 고통 받는 나라로 길게 바꾸어 묘사합니다. 율도국을 정복하는 전쟁의 과정도 매우 길게 확장되어 있습니다. [본문으로]
  4. 이걸 보면, ‘계집요괴’와 이들 여인 간에 별다른 외형상의 차이가 없었음은 분명하며, 이런 의미에서 울동이란 그 섬의 원주민이라고 할 이유가 텍스트 내부에 충분히 있는 셈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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