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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 입문 강의] 6강 네번째 부분

수유너머웹진 2016.09.07 21:01 조회 수 : 199

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세계평화는 가능한가?

 

슈미트는 세계평화를 말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59頁을 보십시오. 

 

심지어 개개의 국민이 전 세계에 대해 우호선언을 하고, 혹은 스스로 자진해서 무장해제함으로써 친구∙적 구별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방법으로, 세계가 비정치화하고, 순도덕성∙순합법성∙순경제성의 상태로 이행하거나 하는 게 아니다. 만일 한 국민이 정치적 생존의 노고와 위험을 두려워한다면, 그때 바로 이 노고를 대신해주는 다른 국민이 나타날 것이다.

[*홍철기 : 게다가 개별 국민이 전 세계에 대한 우호선언을 통해, 혹은 자발적으로 무장해제를 함으로써 친구와 적의 구분을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세계는 이러한 방식으로 탈정치화되지 않으며 순수한 도덕성, 순수한 정의, 혹은 순수한 경제성의 상태에서 이행하는 것도 아니다. 한 국민이 자신의 정치적 실존을 위한 수고와 위험을 두려워한다면 "외적에 대한 보호"와 함께 정치적 지배력을 떠맡게 됨으로써 그들에게서 이 수고를 제거할 다른 국민이 바로 존재하게 된다.]

 

 

예전의 일본에서는 비무장 중립론이 좌파 논객들에 의해 주장되었습니다만, 슈미트는 그런 생각의 달콤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설령 어떤 ‘인민’이 ‘친구/적’ 관계의 긴장을 참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무장해제했다고 해도, 다른 ‘인민’이 그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흡수하고, 슬하에 거느리고, 그 대신에 ‘친구/적’ 결정을 하게 될 뿐이라는 거네요. 평화주의자는 ‘친구/적’ 판단에 기초하여 전쟁 준비를 하기 때문에, 상대에게도 의구심이 생기고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만, 슈미트는 ‘친구/적’이 그런 마음가짐에 의해 생겨나는 게 아니라, 많은 경우 ‘국가’라는 형태를 취하는 ‘정치적 단위=단일체’가 현실에서 존재하는 한, «우리»에게 있어서의 위협으로서의 ‘적’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친구/적’ 구별과 ‘정치적 단위’의 성립은 논리적으로 등치이므로, 전자 없는 후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인 것’ → ‘국제사회의 다원성

 

61頁쪽부터 시작되는 6장에서는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국제사회의 다원성이 생긴다는 논의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정치적이라는 개념 징표로부터는, 국가들의 세계의 다원론이 생겨난다. 정치적 단위는 적의 현실적 가능성을 전제로 하며, 이와 동시에 공존하는 다른 정치적 단위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무릇 국가가 존재하는 한에서는 항상 복수의 국가들이 지상에 존재하는 것이며, 전 지구∙전 인류를 포괄하는 세계 ‘국가’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정치적 세계는 다원체인 것이며, 단일체가 아닌 것이다.

[*홍철기 : 정치적인 것의 개념징표로부터 국제세계의 다원주의가 도출된다. 정치통일체는 적이라는 실제 가능성을 전제하며 이로써 다른 공존하는 정치통일체를 전제하게 된다. 따라서 도대체 하나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에서 언제나 다수의 국가가 지구에 존재하며 지구 전체와 인류 전체를 포괄하는 ‘세계’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세계는 다원적 세계(Pluriversum)이지 일원적 세계(Universum)는 아니다.]

 

 

아까 봤듯이, 슈미트는 국가를 다원적인 것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독일 국법학의 단체이론이나 뒤기의 생디칼리즘적 국가이해, 콜이나 러스키 등의 다원적 국가론 등을 비판했는데요, 이와 대조적으로 국제사회가 오히려 다원적 상태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국가가 ‘친구/적’ 결정을 독점하는 단위이며, 이 세계에 복수(plural)의 ‘국가’가 있다고 한다면, 국제정치가 다원적이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여기서 슈미트가 강조하는 ‘다원성’에는 유엔이라든가 켈로그-브리앙 조약 등을 근거로 하는 보편주의적 발상에 대한 안티테제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제관계론에서는 홉스의 전쟁상태론을 국가 관계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 어떤 논란이 있는데요, 그것을 슈미트는 ‘친구/적’론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존하다’라는 일본어는 ‘협력하다’라든가 ‘사이좋게 지내다’라는 이미지가 됩니다만, 독일어의 <koexistieren>이나 영어의 <coexist>가 반드시 ‘사이좋게 지내다’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어로서는 ‘사이좋게 지내다’라는 뉘앙스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ko-existieren>는 문자 그대로 취한다면, 단순히 함께 존재한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칸트의 󰡔영구평화를 위해󰡕(1795)를 실현하려고 하는 평화주의자라면, 유엔을 ‘세계«국가» Welt «staat»’로 발전시켜서 ~적인 것을 생각할지도 모릅니다만,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정치적 단위’로서의 ‘국가’가 실제로 복수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들을 묶어서 «국가»적인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세한 것입니다만, ‘다원체’로 번역되는 것은 <Pluriversum>이라는 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은 말입니다. ‘단일체’라고 번역되어 있는, 보통은 ‘우주’라는 뜻의 <Universum>의 반대말로 만들어진 조어입니다. <uni->와 <pluri->의 대비입니다.

 

 

정치적 단위는 본질상, 전 인류∙전 지구를 포괄하는 단위라는 의미에서의 단일적인 것일 수 없다. 만일 지상의 여러 민족∙종교∙계급, 기타 인간집단이 모두 일체가 되고, 상호간 투쟁이 사실상으로도 이론상으로도 불가능해진다면, 심지어 또한 전 지구를 뒤덮은 제국의 내부에서도, 내란이 장래에 꽤 사실상 두 번 다시, 그 가능성조차도 생각할 수 없게 된다면, 즉 친구∙적 구별이 단순한 우발성에 있어서조차 사라질 경우에는,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그저 정치적으로 무색의 세계관∙문화∙문명∙경제∙도덕∙법∙예술∙오락 등등에 불과한, 정치도 국가도 거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홍철기 : 정치통일체는 그 본성에 따를 때 전체 인류와 언제 지구를 포괄하는 통일체라는 의미에서 보편적일 수는 없다. 지구상의 서로 다른 국민과 종교, 계급, 그리고 여타의 인간집단은 모두 상호간의 투쟁이 불가능하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통합되고 또한 전 지구를 포괄하는 제국(Imperium) 내부에서 내전 자체가 그 가능성이 사실 상 영원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친구와 적의 구분도 그 발생가능성(Eventualität)에 있어서는 중단된다면, 단지 그 세계에는 정치와 무관한 세계관, 문화, 문명, 경제, 도덕, 법, 예술, 오락 등만이 존재하며 정치도 국가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재미있는 논리네요. 슈미트처럼 ‘정치적 단위’가 있는 한, ‘친구/적’ 관계는 실재한다는 논의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세계 전체를 포섭[포함]하는 국가를 만들어내면 되지 않을까, 그것이 절대 불가능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반론이 나오네요. 반면 슈미트는 단일적으로 정리된다면, 그 단일체는 ‘정치적 단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슈미트의 정의에서 보면, ‘적’이 없다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나 그 구체적 표상형태로서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셈입니다. 뒤집어 보면, ‘정치적 단위’는 그것과는 다른 ‘정치적 단위’가 적어도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한, ‘정치적’이 될 수 없는 것이기에, ‘정치적 단위’는 항상 복수로 존재한다는 게 됩니다.

 

 

‘인류 Menschheit’는 전쟁할 수 없다!?

 

62頁의 마지막 줄부터 시작되는 대목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인류 자체는 전쟁을 할 수 없다. 인류는 적어도 지구라는 행성 위에, 적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라는 개념은 적이라는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 적도 인간이기를 그만두는 게 아니라, 이 점에서 아무런 특별한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이 인류의 이름으로 이뤄진다는 것은, 이 단순한 진리와 아무런 모순도 되지 않고, 그저 특히 강한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 것일 뿐이다. 한 국가가, 인류의 이름으로 스스로의 정치적 적과 싸우는 것은, 인류의 전쟁인 게 아니며, 특정한 한 국가가, 그 전쟁 상대에 대해 보편적 개념을 점취하려고 하며 (상대를 희생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보편적 개념과 동일화하려고 하는 전쟁인 것이며, 평화∙정의∙진보∙문명 등을, 스스로의 손에 취하고자 하며, 이것들을 적의 손으로부터 박탈하고, 이런 개념들을 이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인류’는 제국주의적 팽창에 있어서, 특히 유용한 이데올로기적 도구이며, 그 인륜적∙인도적 형태에 있어서, 경제적 제국주의를 위한 특별한 그릇이다.

[*홍철기 : 인류는 그 자신이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데, 인류에게는 적이 없고 최소한 이 행성에서는 특히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개념은 적의 개념을 배제하는데 또한 적 또한 인간이기를 중단하지 않기 때문이며 인류에게는 특정한 구분이란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인류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전쟁은 이러한 단순한 진리에 대한 반증이 아니고 오히려 오직 특별히 강도 높은 정치적 의미를 지닐 뿐이다. 인류의 이름의 국가가 자신의 정적과 싸운다면 그것은 인류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의 교전상대방에 맞선 특정한 국가가 보편적 개념을 점유하고 (상대방의 희생을 대가로) 보편적 개념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시도인데, 이는 평화, 정의, 진보, 문명을 자신을 위해 옹호하고 적을 비난하기 위해서 남용할 수 있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인류"는 제국주의적 팽창에 특히 유용한 이데올로기적 도구이며 그 윤리적-인도적 형식에서 경제적 제국주의의 특정한 수단이다.]

 

 

‘인류 Menschheit’는 전쟁할 수 없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네요. 확실히 그가 말하듯이, ‘인류’란 모든 인간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누군가 특정한 인간에 대해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모든 인간’에 들지 않는, 예비의 인간은 어디에 있을까?

다만, 이렇게 말해도, ‘인류의 이름 하에서의 전쟁’이라는 것은 있습니다. 보통 생각하면, 이 경우의 ‘인류’란 문자 그대로 모든 ‘인간’이 아니며, ‘인류’라는 이념적 집합체의 의지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누가 그런 이념적 의미에서의 ‘인류의 의지’가 이렇다고 판단하는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결국 ‘인류의 전쟁’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어느 나라가 ‘평화∙정의∙진보∙문명’ 같은 보편적 이념과 자신을 사실상 동일시하고 [자신의 적=인류의 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을 뿐입니다.

90년대부터 21세기 초반에 걸쳐, 미국의 ‘보편주의’에 대해 이것과 똑같은 비판이 이뤄지고 있네요. ‘보편적 개념을 점취’한다는 표현의 ‘점취’는 원어로는 <okkupieren>입니다. ‘점유’라든가 ‘점령’, ‘영유’ 등이라고 번역하면, 아무래도 현대의 포스트모던 좌파의 말투 같네요(웃음). 게다가 ‘인류’가 ‘경제적 제국주의’의 ‘그릇 Vehikel’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완전히 좌파네요(웃음). 네그리(1933-)와 하트(1960-)의 󰡔제국󰡕(2000)이 [오히려] 온건하고 쿨(cool)하게 들립니다. 사실 아까의 대목을, 저자를 드러내지 않고 보여준다면, 현대의 좌파가 쓴 글이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겠죠. 현대의 포스트모던 좌파 논객들이, 바이마르 나치 시대의 독일의 초보수적인 법학자가 이런 것을 말하고 있다고 알게 되면, 감동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여기서도 또한 프루동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프루동의 표현이 되는 다음의 말이, 당연한 수정을 가해 들어맞는다. 즉, 인류를 입밖에 내는 자는 속이려고 하는 것이다. ‘인류’의 이름을 내걸고 인간성을 거론하고, 이 단어를 사물화(私物化)하는 것, 이것들은 모두, 아니 어떤 고상한 명목은 어떤 귀결을 수반하지 않고서는 내세울 수 없기 때문에, 적으로부터 인간으로서의 성질을 박탈하고, 적을 비합법∙비인간이라고 선고하고, 그것에 의해 전쟁을, 극단적으로 비인간적인 것으로까지 전진시킨다고 하는, 무서운 주장을 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홍철기 : 이에 대해서는 수긍할만한 수정을 가한 프루동(Proudhon)의 인상적인 말이 타당하다. 인류에 대해 말하는 자는 기만하는 것이다. "인류'의 이름을 쓰고 인류를 원용하고 이 말을 독점하는 것, 이 모든 것은 한 번 그러한 위대한 이름을 일정한 결과들을 초래하지 않고는 쓸 수 없기 때문에, 적에게서 인간의 자격을 박탈하고 적에 대한 법외추방(hors-la-loi)과 인간성 상실[인류 외적 존재임](hors l'humanité)을 선언하고 이를 통해서 전쟁은 극단적인 비인간성의 근원이 된다는 끔찍한 요구를 단지 공표하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인간성 Menschheit’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것은 푸코 이후의 포스트모던 좌파의 ‘휴머니즘’ 비판의 문맥에서 자주 말해지는 것입니다만, 이것을 19세기 중반의 아나키스트가 이미 논하고 있으며, 그것에 다시 20세기 전반기의 가톨릭계 보수주의자가 주목한다는 것이 재미있네요. ‘비합법∙비인간’이라는 대목은 <hors-la-loi>와 <hors-l’humanité>라고 프랑스어로 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법의 바깥(에)’, ‘인간성의 바깥(에)’입니다. ‘적으로부터 인간으로서의 질(Qualität)을 박탈하고, 법의 바깥, 인간성의 바깥에 있는 것이라고 선고하고 …’라고 번역하면, 아감벤 같은 현대사상계의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류=인간성’의 이름에서의 전쟁은 ‘적’을 ‘극단적인 비인간성 die äußerste Unmenschlichkeit’으로까지 내몰죠. 아감벤의 말투라면, ‘호모 사케르’화하는 것입니다.

 

 

‘인류=인간성 Menschheit’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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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코 이후의 포스트모던 좌파의 ‘휴머니즘’ 비판

∙ 19세기 중반의 아나키스트

∙ 20세기 전반의 가톨릭계 보수주의자

‘인류=인간성’의 이름에서의 전쟁은 ‘적’을 ‘극단적인 비인간성 die äußerste Unmenschlichkeit’으로까지 내몬다

아감벤 ⇒ ‘호모 사케르’화

 

 

슈미트는 이로부터 더욱 이야기를 철학적으로 급진화합니다. 정말 포스트모던 좌파처럼 되어갑니다.

 

 

18세기의 인도적 인류 개념은 당시 존속된 귀족적∙봉건적 혹은 신분계층적 질서 및 그 특권들의 공격적 부인이었다. 자연법적 및 자유주의적∙개인주의적 교리에 있어서의 인류란 보편적인, 즉 지상의 전 인류를 포괄하는 사회이상구조이며, 투쟁의 현실적 가능성이 배제되고, 그 어떤 친구∙적 결속도 불가능해졌을 때 비로소 현실의 존재가 되는 개개인 상호의 관계의 체계이다.

[*홍철기 : 18세기의 인도적인 인류개념은 그 당시에 존속하던 귀족정적-봉건적, 혹은 신분제적 질서와 그 질서 상의 특권에 대한 논쟁적 부정이다. 자연법적이고 자유주의-개인주의적인 학설에서의 인류는 하나의 보편적인, 즉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는 사회적인 이상의 구조물이며 개개인의 관계의 체계로서 이 체계는 적의 실제 가능성이 배제되고 모든 친구와 적의 결집이 불가능하게 된 후에야 비로소 현실에서 존재하게 된다.]

 

 

 

‘인도적 인류 개념 der humanitäre Menschheitsbegriff’이란 이른바 ‘휴머니즘’을 가리킵니다. 18세기 이전의 ‘인간성 humanitas’이라는 개념이 반드시 인도주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사람으로서 익혀두어야 할 기본적 ‘교양’이라는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르네상스’를 ‘인문부흥’이라고도 말합니다만, 그 경우의 ‘인문(주의)’를 영어로 <humanism>, 이탈리아어로 <umanismo>라고 합니다.

 

프랑스혁명을 주도한 시민들은 보편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인류’ 개념을 내걸고 봉건적 신분제도에 싸움을 걸었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보편적인, 자연법적인 ‘인간성’ 개념 아래서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부자유나 불평등을 초래하는 제도는 부정의한 것이며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인도주의적인 ‘인간성’ 개념이 근대시민사회의 출발점이 됐습니다만, 슈미트가 보면, 그런 보편적인 ‘인류’라는 개념은 ‘친구/적’ 관계의 가능성이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소멸됐을 때에야 비로소 현실성을 갖는 개념인 것이며,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사용한다면, 앞서 말한 타자의 비∙인간화를 야기할 뿐입니다.

 

 

‘동맹 League = Bund’

 

65頁에서는 이 연장선상에서 ‘유엔’ 비판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여러 국민들의 동맹이라는 이념은 여러 국민들의 동맹이 대항적 대립개념으로서 군주 동맹으로 대치되는 한에서는, 명백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즉, 독일어의 «Völkerbund»는 이런 것으로서 18세기에 형성된 것이다. 군주정이 지닌 정치적 의의의 소멸과 더불어, 이 항쟁적 의미는 상실된다.

[*홍철기 : 국제연맹(Völkerbund)이라는 생각은 군주연합(Fürstenbund)에 대한 논쟁적 반대개념으로서의 인민연합(Völkerbund)이 제기되는 한에서 명확하고 엄밀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인민연합"이라는 독일어는 18세기에 등장하게 되었다. 군주정의 정치적 의미와 함께 이 논쟁적 의미도 사라진다.]

 

 

이 대목은 그대로 읽으면 뭘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네요. 이곳은 원문을 읽지 않으면 번역을 알 수 없습니다. 우선 ‘여러 국민들의 동맹’이라고 번역합니다만, 이 ‘국민’은 <Volk>입니다. 그리고 “여러 국민들의 동맹”의 원어는 <Völkerbund>입니다. 이 경우는 ‘국민’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상당히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군주동맹 Fürstenbund’에 대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Völk>에는 ‘인민’, ‘민족’, ‘민중’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만, 이 경우는 주로 ‘민중’의 의미이지만 ‘민족’의 의미도 조금 들어 있다고 생각해야 하죠. ‘군주동맹’과 ‘여러 민족들=민중의 동맹’이 대치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말한 뒤에 원어의 «Völkerbund»를 반복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Völkerbund»가 ‘국제연맹 League of Nations’의 독일어 번역어이기 때문입니다. 영어의 <nation>이 중간에 들어와서 복잡해집니다만, 이 경우의 <nation>은 ‘국제연합 United Nations’이 그렇듯이, 문화공동체라기보다는 ‘국가 state’와 거의 같은 의미입니다.

즉, 민중끼리는 ‘동맹 Bund’ ― 좌파의 분파 이름으로 사용되는 ‘분트’는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 이라는 의미를 가진 <Völkerbund>라는 말이, 제1차대전 후의 ― 영미불을 중심으로 한 ― «국제조직»의 명칭의 독일어 번역으로서 사용되게 됐습니다만, 슈미트는 ‘군주동맹’에 대치한다는 의미가 없어진 것이기에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뭔가 번역어에 대해 트집을 잡고 있는 점잖지 못한 태도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만, 슈미트로서는, ‘동맹 League=Bund’이라는 말이 잠재적으로 갖고 있는 뉘앙스에 구애되고 있습니다. ‘동맹’이란 ‘적’에 대항하는 ‘결합’입니다. <Bund>는 ‘결부하다[묶다]’라는 의미의 동사 <binden>의 명사형입니다. ‘결부’의 초점이 되는 ‘적’은 누구인가? ‘군주’에 대항하여, 여러 국가들의 ‘민중’이 결부된다는 것이라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만, 제1차대전 후에 생긴 ‘국제연맹’은 구체적인 ‘적’을 확실하게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슈미트의 눈에는 독일을 잠재적인 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국제연합’에 관해서도, 일본 등을 상정한 ‘(구)적국조항’이 화제가 된 적이 있네요.

 

 

 

‘여러 국민들의 동맹’은 심지어, 한 국가 혹은 국가연합체가 다른 여러 국가들에 대해 맞선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도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먼저 ‘인류’라는 단어의 정치적 용법에 관해 말한 모든 것이 이 단어에 해당된다.

[*홍철기 : 더구나 ‘인민연합’은 다른 국가들에 맞선 개별 국가나 동맹국들의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우에 ‘인류’라는 말의 정치적 사용에 대해 앞서 말한 것 모두가 타당한 것이다.]

 

 

이것은 국가간 관계뿐 아니라, 국내의 이데올로기들 사이의 다툼인 것입니다만, 자신들이 ‘동맹’이라는 것을 과시하면, 상대를 포위하는 듯한 뉘앙스가 나옵니다. 특히 ‘유엔’ 같은 동맹이 ‘인류’의 이름으로 행동을 하면, 아까의 얘기처럼, 적을 인류로부터 쫓아내는,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위장이 되는 셈입니다. [인류의 동맹 vs 비인류]라는 느낌으로. 슈미트는 그런 ‘유엔’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해 좌파의 용어를 쓰는 거네요.

 

 

 

철학적 국제관계론

 

66頁에서, 당시의 국제관계에 대해 구체적인 분석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철학적 국제관계론에서 주목받는 것은 이런 논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1919년에, 파리평화조약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제네바기구 ― 독일에서는 그것을 ‘국제연맹’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 공식적인 불어 및 영어 명칭(Société des Nations, League of Nations)에 따르면, ‘여러 국가들의 사회’라고 제시하는 것이 적당한 것 ― 는 모순투성이의 구성물인 듯 보인다. 즉 그것은 여러 국가 간의 조직인 것이지, 여러 국가들 자체를 전제로 하며, 이것들 사이의 상호관계의 일부를 규제할 뿐 아니라 여러 국가들의 정치적 존재를 보증하기조차 한다. 그것은 보편적 조직이 아닐 뿐 아니라, 사실은 국제적 조직조차도 아니다. 즉, 국제적이라는 단어를, 적어도 독일어 용법으로서 정확하게 정직하게 사용해서, 여러 국가간적이라는 단어와 구별하고, 이것과의 대비에 있어서 국제적 운동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유보하는, 즉 예를 들어 제3인터내셔널처럼, 여러 국가들의 경계를 넘어서, 이것들의 둘레 벽을 뚫고, 현존 국가들이 지닌 영토적 폐쇄성∙불투과성∙불삼투성을 부인하는 운동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유보한다면, 그런 의미에서의 국제적 조직조차 아닌 것이다.

[*홍철기 : 이러한 관점에서 1919년에 파리강화조약에 의해 창설된 제네바의 조직은 독일에서는 그 공식적인 프랑스어-영어 명칭(Société des Nations, League of Nations)에 따라 ‘국제연맹’이라고 불리지만 ‘국제사회(Nationenegesellschaft)’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은데, 이 조직은 모순으로 가득 찬 구성물처럼 보인다. 그 조직은 결국 국가 간의 조직이며 국가들 자체를 전제로 하는데, 몇몇의 상호관계를 규제하고 더구나 그 정치적 실존을 보장한다. 이 조직은 단지 보편적인 조직이 아닐 뿐만 아니라, 국제적(international)이라는 말을 적어도 독일어 용법의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용법에 따라 국가 간(zwischenstaatlich)이라는 말과 구분하고 그것과 대립되는 국제운동과 같은 것에 대해 유보할 때, 즉 예를 들어 제3인터내셔널과 같이 존속하는 국가들의 종래의 영토적 배타성[완결성], 불가침성, 그리고 ‘불투과성(Impermeabilität)’을 무시하는, 국가들의 경계를 침범하고 장벽을 가로지르는 운동을 가정하면 결코 국제적 조직이 아니다.]

 

 

 

‘국제연맹’이라고 번역한 곳은 원어로는 앞의 <Völkerbund>입니다. “여러 국가들의 사회”는 <Nationengesellschaft>입니다. 현대풍으로 번역하면 “여러 국민들로 구성된 사회”입니다. 슈미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더 이상 ‘민중’의 동맹이 아니라 ‘국민’의 동맹이라는 것이기에, 그런 식으로 번역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를 감안해 처음 문장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1919년에, 파리평화조약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제네바기구 ― 독일에서는 그것을 ‘여러 민중들의 동맹’이라고 부르지만, 그 공식적인 불어 및 영어 명칭(Société des Nations, League of Nations)에 따르면, ‘여러 국민들로 이루어진 사회’라고 제시하는 것이 적당한 것 ― 는 모순투성이의 구성물인 듯 보인다.

[*홍철기 : 이러한 관점에서 1919년에 파리강화조약에 의해 창설된 제네바의 조직은 독일에서는 그 공식적인 프랑스어-영어 명칭(Société des Nations, League of Nations)에 따라 ‘국제연맹’이라고 불리지만 ‘국제사회(Nationenegesellschaft)’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은데, 이 조직은 모순으로 가득 찬 구성물처럼 보인다.]


 

슈미트 편에서 보면, 이 사회는 인류의 동맹이라기보다는 제1차 대전의 전승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관계의 조직체인 ‘제네바 기구 Genfer Einrichtung’에 불과합니다. 슈미트는 ‘국가간 조직 eine zwischenstaatliche Organisation’과 ‘국제적 조직 eine internationale Organisation’을 구별하고 있네요. 독일어의 <zwischen->과 영어나 프랑스어로 접두사로서 사용하는 <inter->는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입니다만, 독일어의 용법에서 <zwischenstaatlich>와 <international>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죠. ‘여러 국가 간’은 개별 국가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그 상호관계를 규제한다는 의미인 반면, ‘국제적’은 국가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관계, 활동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제연맹=제네바기구’는 ‘국제적’이 아니라 ‘국가 간’ 조직이다, 따라서 본래 ‘인류’의 이름으로 말할 자격은 없다는 것이죠.

국제조직의 예로 ‘제3인터내셔널’을 꼽고 있는 대목이 재미있네요. ‘제3 인터내셔널’이란 문자 그대로 세 번째의 ‘인터내셔널’입니다. ‘인터내셔널’이란 노동자∙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조직으로, 세계사 교과서에도 나옵니다. 영어에서의 정식 명칭은 <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국제 노동자 협회)〉입니다. 제1인터내셔널은 1962년에 런던에서 결성됐습니다. 맑스파의 영향이 강했습니다만, 프루동, 바쿠닌의 그룹도 유력했던 것 같습니다. 내부분열 때문에 1876년에 해산합니다. 제2인터내셔널은 맑스파를 중심으로 1889년에 파리에서 결성되었습니다. 맑스는 이미 사망했지만, 엥겔스가 지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레닌, 룩셈부르크도 제2인터내셔널을 무대로 활약했습니다. 이 조직은 제1차 대전 때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주요국의 사회주의 정당이 각각 자국 정부의 전쟁에 협력하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붕괴됐습니다. 중요한 장면에서는 ‘국제적’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제3인터내셔널은 1919년에,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공산당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직으로, 코민테른(Komintern: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라고도 불립니다. 아시다시피, 소련이 국외의 공산당을 지도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라는 측면이 강합니다. 43년까지 존재했으며, 전후에는 공산당의 정보교환조직 ‘코민포름 Kominform’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내친 김에 말하자면, 공산당과 선을 그은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정당은 1951년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결성합니다. 이것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영국의 노동당, 독일의 사회민주당, 프랑스의 사회당 등이 가입해 있습니다. 예전에는 일본의 사회당과 민사당이 가입했었습니다. 일본의 좌파 분파로 ‘제4인터’라는 것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스탈린과 대립하고 소련공산당에서 쫓겨난 트로츠키(1879-1940) 그룹이 결성한 ‘인터내셔널’입니다.

현실의 인터내셔널이 반드시 국가의 틀을 넘어서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국경을 넘어선 노동자∙사회주의 운동을 형성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슈미트는 그 점을 인정하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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