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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스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강 첫 번째 강의





녹취 및 정리: 황호연 / 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정화스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강의는 총 5회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한 강 한 강이 한 편의 글이 되기에는 매우 긴 편이라, 독자분들이 보기 편하시도록 세분하여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이번 글은 정화스님 강좌 3강의 첫 번째 부분임을 알려드립니다. 그 전의 강의는 이 웹진의 지난 글을 확인해주세요.










*정화 스님께서 강의 교재로 사용하신 책은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백석현 옮김, 야그 출판사, 2007년)입니다. 현재 절판되었고, 이 책을 개정해 다른 출판사에서 펴낸 책이 있습니다.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박성현 옮김, 심볼리쿠스 출판사, 2012년)입니다.

*강의를 직접 들으신 분들은 Ⅰ.『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와 Ⅱ.『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정동호 옮김, 니체편집위원회 감수, 책세상 출판사, 2000년), 그리고 그 외 번역본들 중 편한 것을 참고하셨습니다.

*녹취록에서는 강의 중에 언급된 위 책 두 권(Ⅰ,Ⅱ)의 해당 부분을 스님이 말씀 하신 것을 참조하여 재구성해서 옮깁니다. 페이지 표시는 가독성을 위해 옮긴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만 하였습니다.

* 페이지 표시의 예: Ⅰ번 책의 36쪽, Ⅱ번 책의 38쪽은 아래와 같이 표기합니다. -> (Ⅰ:36, Ⅱ:38)




(3강 시작)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6, ‘창백하게 질린 범죄자"(:59, :59)입니다. 범죄의 심리적인 이유는 자기 욕망의 충족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범죄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내면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근본적인 목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욕망을 가지고 있는 동물을 유정有情"이라고 부릅니다. 불교에서는 중생을 그렇게 부르지요. 사트바라고도 합니다. 뜻풀이를 해보면, ‘뜻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뜻만이 아니라 감정이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사람은 감정만 있는 게 아니고 의식분별이 있지요. 그래서 뒤에 정식이라고 해서 아르만이라고 그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감정과 의식이 있는 동물, 이것은 주로 사람을 가리키는데, 감정 축으로 많이 흘러가면 동물적 요소가 많아지고, 의식적 측면으로 많이 흘러가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과 의식을 가진 생물을 동물 또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정과 의식이 있다는 말은 감정에 메여있고 의식에 메여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특히 동물은 의식분별보다는 감정분별에, 감각지각에 훨씬 더 많이 치우쳐 있고 사람은 언어를 통한 분별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의식 즉, 인지 분별에 침투되어 있다고 하는데, 동시에 감정과 인지분별에 메여있는 상태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메여있는 상태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여기서 말하는 대로 창백하게 질린 범죄자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충분히 지켜봐서 그것을 억제하고 발산하는 자신의 능력을 잘 갖추지 못하면 문제가 발생한 것이 되고, 뒤에 7장에서 읽기와 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니체는 피에서 나온 소리로 글을 쓰고 글을 읽어야하는데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고 이미 있는 감정이나 인지 분별에 의해 감정놀음을 하고 있고 의식분별 놀음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짜라두짜는 그것이야말로 초인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의 어떤 사건이 벌어져서 목을 내놓고 판사 앞에 서있지요. 판사 앞에 서있는 범죄자가 판사를 쳐다보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경멸하는 눈초리로 판사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 에고야말로 넘어서야할 무엇이지. 내 에고는 인간에 대한 깊은 경멸 그 자체야. 그 눈빛은 이렇게 소리치고 있어.’라고 이야기합니다. 에고라는 것은 감정과 인지가 중첩적으로 겹쳐서 그것을 전혀 벗어나지 못한 상태의 통일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삶 자체라는 것은 이와 같이 통일된 인식체계의 내부적 사건으로만 이뤄지지 않고 다른 관계들과의 구성속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실제 내부적 에고의 신호체계라는 것은 면역 세포가 자기와 다른 신호체계를 가진 분자를 공격하듯이, 공통된 신호체계로 똘똘 뭉쳐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통된 감정의 신호체계와 인지의 신호체계로 똘똘 뭉쳐있는 것을 에고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신호체계 밖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들어보려면 뭘 해야 하냐면, ‘그냥 보기"를 해야 합니다. 그냥 보기를 하는 방법으로 늘 제시되는 것이 숨 들여다보기입니다. 내 몸 전체를 관찰하는 게 아니고 몸이라는 것은 그냥 하나의 물질 덩어리처럼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숨이 가고 오는 것만 계속 보는 것을 중심으로 삼는 겁니다. 그러면 숨이라는 것은 감정이나 인지가 충분히 거기에 개입돼서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숨을 쉴 뿐이지요. 그것을 계속 보면 나중에 가면 감정이나 인지의 언어적 상태를 동반하지 않고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이 생깁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하면 그 전에는 욕망이라는 것은 실현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나에게 다가왔는데, 그냥 있는 대로 보기 시작하면 그냥 욕망하는 어떤 것만 보입니다. 그래서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의미체계를 갖는 게 아니고 그저 욕망이라는 사건으로 자기에게 다가올 때, 훨씬 거기에서 편안하게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 이 욕망을 중심으로 동일한 신호체계를 가지고 있는 에고의 그물망을 조금씩 벗어날 수 있지요. 그럴 때 그냥 보기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두 번째로, 사람은 그냥 보기만 하는 게 아니고 살아갈 때 이 욕망을 억제하기도 하고 이 욕망을 발산하기도 해야 합니다. 특히 욕망을 억제할 때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면 교육을 실시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에게 교육을 실시할 때 지난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너는 앞으로 세상에 나가서 억울한 일이 없는 삶을 살도록 하렴."하는 내용이 상당히 그 속에 숨어있습니다. 물론 그 밖에 여러 가지 것들이 많이 있겠지요. 여하간 바꿔 말하면, 지금 이미 이뤄진 삶이라는 것은 많은 억울함 즉, 억눌림이 존재하는 사회이며 개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너는 그런 것 없는 삶을 살라"고 하는 교육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교육이 시작될 때, 보이는 것은 어떻게 보입니까? ‘너 그렇게 살면 나처럼 억울한 삶이 너의 대에 기다리고 있어."라는 생각이 교육 안에 숨어들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짜증이 납니다. 왜 짜증이 납니까? 애기가 그렇게 하는 게 짜증이 나는 게 아니고 억울함을 당했던 어린 시절이나 사회생활 속에서 쌓여있던 자기 억제가 자기 아들딸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통해서 자기의 짜증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실제로는 애들이 하고 있는 것이 나에게 짜증을 내고 있지만, 근본적인 내용에서 보면 자기 욕망의 억압이 그 아이에게 야 너는 왜 그렇게 살아?"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동시에 너는 그렇기 살지 말라고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래서 교육은 굉장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그냥 힘인 것만이 아니라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양상이라는 뜻이 담기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난 어린 아이들은 내재적으로 자기 욕망의 억압이 이뤄진다고만 느낍니다. ‘내가 왜 이것을 안 해야 하지?"라는 물음에 대한 충분한 이유를 설정할 수 없이, 그냥 스스로 그런 상태가 되지요.


예를 들면 제가 80년대에 어떤 6학년 학생이 담배를 피웠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는데 요즘도 그런 초등학생들이 있겠지요. 몇학년 때 피우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학교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야 담배 피우지마"라고 이야기하면서 본인들은 피우고 있는 게 보이는 겁니다. 내가 해야 하지 않을 일을 선생님들은 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상 그 시기에 이런 일들이 충분히 납득되지 않으면, 자신은 자신의 자율적 행위가 권력자들에 의해서 억압당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런 억압된 내용들을 밖으로 풀게 되는 형태에서 잘못 풀게 되면 우리는 이제 범죄가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 욕망이라는 것은 실현에 그 목표가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듯이, 내가 돈을 빼앗으려고 지나가는 사람을 때렸다면, 돈을 빼앗으려는 게 욕망의 목적이 아닌 겁니다. 억눌린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는 즉, ‘권력을 행사하는 것", ’내가 주먹을 가지고 때릴 수 있는 욕망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욕망이 실현되고 나면 다음에는 "나는 다시는 나보다 약한 누구에게도 권력을 행사하지 않겠어."라고 딱 그치면 한번 잘못해서 평생을 고칠 수 있는데, 이 욕망이라는 것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 다음 순간이 오면 또 다시 그것을 욕망하도록 계속 조건 지어져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행위 양상이 욕망을 표출해내는 어떤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그것을 표출해내려는 것 자체가 욕망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욕망이라는 것은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행을 많이 하면 아무런 욕망이 없는 것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나이 드신 보살 한 분이, 젊은 중이 공부를 잘 하니까 저렇게 하면 뭔가 쓸 만한 중이 되겠다고 생각해서 공부할만한 집도 한 채 지어주고 계속 후원을 합니다. 그래서 몇 년간 공부를 잘 하니까 자기 손녀를 데리고 가서 시험을 합니다. "너 가서 그 스님 무릎에 가서 한번 앉아봐."라고요. 그러고는 스님에게 가서 이렇게 묻습니다. "스님, 여자가 스님 무릎에 앉으면 어떤 감정이 듭니까?"라고요. 그러니까 그 스님이 당당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위에 고목나무가 걸친 것과 똑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보살은 굉장히 실망을 하고 그 집을 불태웁니다. "당신은 아니야."라고 쫓아내지요. 그래서 화두 중에 하나가 이렇게 있습니다. 여성이 이렇게 왔을 때 수행자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자기가 사는 집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허허.



, 욕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금생에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생명의 역사나 우주의 역사와 똑같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일어난 것을 그냥 보기로 하느냐, 그 욕망에 휩쓸리는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만일에 휩쓸려버리면 말할 것도 없고, 아까처럼 그냥 보지 않고 다른 이미지를 구성해서 보면 문제가 됩니다.


, 여기에서도 아까 말한 대로 범죄자를 창백하게 질리게 하는 것은 욕망의 행동 양상이 아니고 행동의 구체적인 이미지"라고 합니다. 욕망과 그 욕망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사실상 둘 다 우리가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그냥 보기를 하면, 이미지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제거하거나 안 일어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온전히 살아나도록 만들어내면-그걸 "실현"하는 게 아니고 만들어 내면-어렸을 때 내가 왜 이것을 하지 말아야 했는지 충분히 납득되지 않았던 상태가 납득된 상태로 바뀌게 됩니다. , 이제는 욕망을 실현하지 않아도 그 전에는 권력에 의해 자신의 자유가 억압된 상태로 받아들여졌던 것이 지금은 전혀 억압된 상태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힘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때 이 욕망을 그냥 욕망이라 부르지 않고 "색계의 욕망"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사실상 욕망이라고 이름 짓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힘을 가지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아는 것, 이것이 에고입니다.


이 에고는 우리가 넘어서야 할 것인데, 에고로 따지면 경험된 하나하나가 에고이고, 그 경험된 모든 것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도 에고입니다. 그래서 분별된 에고 즉 감정이나 의식의 분별을 통해서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것들을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범죄를 넘어서는 것이고, 범죄의 한편에 있는 판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범죄를 벌하는 사람이 판사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 판사에게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판사 당신들은 당신이 죽이는 사람을 나쁜 놈이라고 하면 안돼"라고 합니다. 대신 "이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판사나 범죄자나 나쁜 놈인 것에서는 다 똑같기 때문입니다. 판사가 범죄자를 죽이는 것은 힘을 가진 나쁜 놈이 힘을 못 가진 나쁜 놈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구라도 욕망의 어깨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한 살을 살고 있기 때문에, 형태의 내용으로 보면 한 사람은 벌을 주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벌을 받는 사람이지만, 사실상 내용상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단죄한다는 것은 나쁜 놈이라서 단죄하는 게 아니고 그저 나의 적이기 대문에 내가 단죄를 한다는 겁니다. 또한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 ’그런 놈들을 악당이라고 부르면 안 돼. 불구라고 불러야 해."라고 합니다. 불구라는 말은 뭔가 부족한 사람인데, 바꿔 말하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만한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구의 ""자는 갖춘다는 것인데, 불구는 무엇을 갖추지 못했느냐 하면 판사라는 힘을 못 가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죄인이 아니고 "바보라고 불러야 한다고 합니다. 뭔가 사건만 바꿔지면 금방 누가 죄인이고 누가 거룩한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판결하는 사람과 죄를 받는 사람이 완벽하게, 여기서는 뒤에 나오는 중력의 영이라고 하는 것에 의해 메여있는 삶을 사는 데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감정에 얽매여 있고 인지에 얽매여 있으면 그것은 벌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별로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특히 뒤에 보면 국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국가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국가"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아주 강하게 하고 있습니다.


어떤 노르웨이에 있는 어떤 교수님이 쓰기를,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습니다."라는 책도 나와 있는데, 국가의 편에 서있으면서도 감정이나 분별에 억압되어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속으로 이 지저분한 독사 같은 새끼라고 부르는데, 왜 그렇습니까? 힘의 일부를 위임받은 사람이 저런 사람들에 의해서 그 힘의 일부를 뺐길 것을, 내부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염려하고 불안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힘을 욕망하는 것을 거스르는 상대로 보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잘 판결하는 게 아니고 지저분한 독사 새끼같은 놈들을 벌하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뒤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60, :60)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범죄를 짓고 날 때까지는 자기가 하는 행위를 감당하지만, 범죄가 끝나갈 때에는 그 이미지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욕망은 그냥 욕망하는 습성과 그 욕망하는 습성의 색깔로 함께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감정과 정신이라는 것은 그냥 감정과 정신이 아니고, 감정의 일정한 패턴과 인지 분별의 일정한 패턴을 각자 생물마다 사람들마다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패턴화 된 감정이나 의지를 여기서 말하는 것을 이미지"라고 하는데, 그 이미지는 계속해서 안에서 한번 실현하고 나면 사라질 것이 아니고 내부적으로 계속 꿈틀대면서 자신을 미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뭐라고 부릅니까? ‘미친 상태"라고 합니다. 범죄자의 일상에서는 미친 상태"가 일상화 돼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피를 원하는 억제되지 않는 내부적인 욕망이 미친 일을 저지르게 하는 것, 그것이 욕망인데 사실상 그런 일은 특정한 사람만 하는 게 아니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욕망과 불안의 감정과 의지에 메여있으면서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예를 들어 쭉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한때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 악이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62, :61~62)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19세기쯤 들어오면 니체만 그런 게 아니고, 유럽 사회에서 도대체 신이란 내가 생각했던 것이 아니네?"라는 이야기를 상당히 하는 상태가 되면서, 결정적인 한마디로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른 많은 사람도 어렴풋이나마 "아 신은 죽었구나."라고 느끼고 있었지만 그 말을 먼저 썼던 사람이 니체이기 때문에 니체에게 직접적인 소유권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유럽사회에서 아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이 많이 팽배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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