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고병권의 삶의 에세이 / 고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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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고병권의 서재 :: 고병권의 서재는 없다 나에게 서재란 무엇이다라는 말보다 사실은 이 말이 하고 싶어요.
서재라는 공간에 대한 생각 제가 "나에게 서재는 없다."라고 말하는 건, 저한테 서재가 정말로 없기도 하지만(웃음) 지식인들이 서재에 대해 말할 때 문제의식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래요. 물론 저도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은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누구에게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인간이 변신하거나 창조할 때 꼭 필요하죠. 하지만 바로 그런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는데요. 서재는 세상의 소음, 먼지로부터 좀 떨어져 들어온, 자칫하면 퇴행적 공간일 수도 있어요. 자크 르고프라는 역사학자에 따르면 지식인들의 공간인 대학은 열린 작업장, 길드였기 때문에 누구나 들어올 수 있었어요. 그래서 중세 지식인들을 표현한 판화 같은 걸 보면 항상 학생들에게, 대중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요. 제가 최근에 책 읽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는데요. 전태일이라는 분 있지 않습니까.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죠. 그 사람이, 저한테는 되게 재미없어 보이는 근로기준법이라는 법전을 그렇게 열심히 읽었는데요. 아버지하고 대화를 하다가 근로기준법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고, 그걸 골방에 들어가서 배 깔고 읽고, 작업장에도 몰래 들고 가서 읽고 버스에서도 막 읽었대요. 그런 의미의 책 읽기, 장소를 가리지 않는 책 읽기.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찌 보면 서재는 없죠. 왜냐면 모든 곳이 서재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서재에 대해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제가 교도소라는, 교정을 하는 그 공간에서 간혹 강의를 해요. 노들야학이라는 장애인 야학에서 직급도 철학교사고요. 그런데 교도소에서 처음 강의를 하던 2008년에 저 스스로 물었어요. "철학이 뭐지? 내가 철학자인가? 철학자는 뭘 하는 사람이지? 교도소에서는 뭘 할 수 있지?" 비뚤어진 걸 바로잡는 교정, 즉 사회적 잣대라 할 수 있는 법을 어긴 사람을 바로잡는 것은 철학이 할 수 없어요. 법에 관해서라면 판사, 검사, 변호사가 더 잘할 거고, 교도소 안의 규칙은 교도관이 훨씬 더 잘 알겠죠. 그럼 철학은 뭘 해야 하느냐, 철학은 잣대가 똑바른지를 재야 될 것 같아요. 법률 혹은 법으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규칙, 원칙, 정의. 통념, 뭐라고 해도 좋은데요, 이것들이 올바른지에 대해서 어떻게 재야 될까. 잣대를 재는 잣대는 없어요. 굉장히 어려운 얘기인데요, 잣대 없이 잣대를 재는 것. 그것이 철학이지 않을까. 법률관은 '법대로 살아라.'라고 말할 거예요. 철학자는 '사는 법을 좀 알아라.'라고 말할 거예요. 그래서 법이 사는 법에 맞지 않으면 그 법을 고쳐달라고 기꺼이 감옥에도 가는 사람이에요. 소크라테스 이래로 다 그랬어요. 국가의 어떤 명령이 내려질 때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어겼다고 소크라테스가 변론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철학은 법이나 법칙이 목표가 아니라 성숙이 목표죠. 법을 다루지만 법보다 성숙해야 돼요. 법은 정의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지만, 정의란 참 모호한 거예요. 법하고 정의가 똑같다면 지금까지 법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을 거예요. 근데 정의란 '사람이 저러면 안 되지 않나?' 이런 묘한 감각이에요. 그런 감각을 훌륭하게 키우고 가꾸는 게 철학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일깨우려는 사람을 철학자라고 불러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요.
재야 연구실, 혹은 재야학자라는 규정보다 저한테 더 중요한 건 '연구자 생활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규정이에요. '재야'에 있는지 '제도'에 있는지는 안 중요하고요. 여기에 있으면 누가 못하게 안 하니까 하고 싶은 공부를 해요. 전공과 학제가 다른 사람들이 같이 있기도 하고요. 더 중요한 것은 생활을 같이해요. 연구실에 주방도 있는데 제가 한 달에 네 끼 식사당번을 하면 동료들이 한 달간 나머지 56끼를 해줘요.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돈이 적게 드는 게 사실이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어요. 하나의 출구를 찾았고 이렇게 하면 평생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머니는, 애는 막 커가지, 좋은 대학 나와서 박사도 받은 것 같은데 그 뒤로 실업자지, 이제 나이도 먹었지 하니까 걱정하시지만요. (웃음) 근데 더 좋은 건 뭐냐면 되게 시끄러워요. 실제로 주변에 차도 많이 다니고, 불쑥불쑥 누가 문 열고 들어와요. 나 아프다면서. 무슨 말이냐면 공부하는 공간이 고통이나 소음이나 소란과 가까워요, 이게 자연과학에는 방해될지 모르겠지만, 인문과학에는 되게 중요해요. 왜냐하면, 고통하고 깨달음이 따로 있지가 않아요. 세상에는 아픔이 있죠. 그 아픔을 어떻게 의미 있게 만들 것인가가 인문학자에게는 되게 중요해요.
니체가 <서광>에서 했던 말이 하나 있어요. 철학자의 검소함이랄까, 위대한 학자의 소박함이랄까. 말하자면 좋은 철학자들은 겉보기에 가난하고 빈곤해 보이지만 니체는 그렇지 않다고, 그도 되게 풍요롭고 원하는 걸 다 얻는다고 말해요. 근데 차이가 뭐냐면 철학자들이 그의 삶에 꼭 필요한 것들은 사람들이 내다 버리는 것들 중에 있어요. 싸구려로 파는 것들 중에도 있고. 사람들이 시장에서 엄청 비싸게 돈을 주고 사는 것은 철학자가 애당초 필요 없는 것들이 많아요. 무슨 말이냐면 철학자도 삶에 풍요로운 것은 다 갖추고 사는데, 가치의 기준이 뒤바뀌어 있는 거죠. 저들이 높이 평가하는 게 나한텐 별로 가치가 없고, 나한테 가치 있는 건 저 사람들이 내다 버리고. 그러니까 큰돈 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빈곤한 건 아니에요.
니체한테 고마움을 갖고 있어요. '어떻게 그때 내가 그런 책을 읽게 됐을까.'라고요. 제가 대학생활을 그렇게 쾌활하게 하진 않았어요. 91년에 재수해서 대학을 갔는데 굉장히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래서 사회학과 대학원도 문제의 심층을 파고들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간 거고요. 그런데 딱 들어가자마자 첫 달에 변곡점이 된 니체를 만났어요. 그때 니체가 되게 소중한 걸 일깨워줬어요. 깊이하고 무게를 혼동하지 말라고. 너는 깊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거워지고 있다고. 그리고 이번에 10년 만에 니체를 내면서 다시 봤는데, 이 니체는 그때 니체하고는 또 달라요. 지난번엔 굉장히 경쾌하고 유쾌하다는 점에서 큰 도움을 줬는데, 이번에는 소박했어요. 예전에는 경쾌했지만 화려하게 보였거든요. '신은 죽었다.' 영원회귀, 권력의지, 힘의 의지. 이 어마어마한 말들이 너무너무 세고, 멋지고. 그런데 이번에 본 니체는 모든 스펙터클은 가짜라고 말해요. 제 식으로 표현하자면 '황금에는 도금할 필요가 없다, 도금한 것들은 황금이 아니다'. 그리고 <서광>에서는 그런 걸 알려줬어요, 수십 년 걸쳐서 잘못된 습관으로 어떤 병에 걸렸으면 치료할 때도 수십 년 쓸 생각을 하라고. 한방에 나으려고 하지 말라고. 위대한 것들도 무너질 때 처음에 잘게 잘게 균열이 생기고 잡초가 자라다가 무너진다고. 마지막 쓰러지는 게 스펙터클해서 사람들이 그것만 보는 거라고. 역으로 위대한 일을 하려면 천천히 소박한 것부터 하라고. 사소한 것들은 절대 사소하지 않다고요.
개념(concept)이란 말이 원래 '임신'이라는 라틴어 콘셉티오(conceptio)에서 왔어요. 니체도 영원회귀 개념을 18개월 임신했고 그리고 출산했다고 말했었는데요, 이처럼 개념은 정말로 시간을 품고 있어야 해요. 섣불리 내놓으면 미숙아가 되거나 조산을 해요. 그런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언더그라운드에 대해 이미지로써 말을 한다면 그라운드와 관계된 개념이죠, 그라운드라는 건 철학에서 토대나 근거 이런 거예요.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할 때 그 근거. 어떤 행동을 보며 '쟤가 저런 행동을 하면 안 되는데.'라고 하는 이런 거 있죠? 그처럼 의심할 수 없이 자명해 보이는 우리 시대의 어떤 개별 판단이 의지하고 있는 선판단이라고 할까요? 미리 존재하는 우리의 확고한 기준 같은 거요. 그런데 니체의 언더그라운드 개념은 우리가 확고하게 믿고 있는 근거 자체는 근거를 안 갖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무슨 선문답 같은데요, 우리가 믿고 있는 근거들은 역사적으로 근거 없이 생겨난 것들이에요. 그래서 한 시대가 진리라고 믿는 걸 우리가 돌이켜보면 '그 시대는 세상에 저걸 진리라고 믿었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한 시대의 진리와 한 시대의 오류는 구별이 안 돼요. 그 시대가 믿는 진리가 그 시대의 오류이기도 해요. 바로 이걸 문제 삼는 거죠. 그런데 이게 되게 어려워요. 왜냐하면, 이 판단은 마치 조명과 같아요. '이건 뭐다.'라고 말하지만, 저 조명을 바꾸면 또 달라 보이거든요? 그 사물 그대로 있지만요. 그래서 니체는 그 조명을 문제 삼으려고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만약에 옳고 그르다는 근거가 없다는 걸 깨달으면 어떻게 되냐면 우리가 산을 오를 때 더 깊은 곳에서 본 것과 더 높은 곳에서 보는 것이 위계가 없어요. '정상에 올라가 보는 게 제일 좋고. 허리가 두 번째고, 골짜기가 세 번째고'가 아니에요. 이처럼 어떤 판단을 할 때,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그냥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 그것에 의해서 평가절하되어왔던 많은 것들을 복원시킬 수 있어요. 그래서 노인들을 보며 노쇠함이 아닌 원숙함을 볼 수 있고 아이를 보며 유치함이 아니라 천진난만함을 보게 돼요. 각각의 높이가 주는 고유한 덕성이랄까, 힘이랄까요? 거기 통찰이 있어요. 그래서 니체는 자꾸 말해요, 너는 얼마나 많은 높이에서 사물을 바라봤냐고. 상대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라 각각의 높이마다 갖고 있는 힘을 찾아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랬을 때 우리는 '조선 시대는 전근대적이야.'라고 절하하지도 않고 '그 시대를 있게 한 힘은 뭐였을까'라고 묻게 되고. 역으로 우리가 믿는 것의 우스꽝스러움도 알게 되고요. 그런 걸 알게 될 때 니힐리스트가 되는 게 아니고요. 거꾸로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얻게 되죠.
예전에는 총체적인 그런 변화, 이런 걸 중시했는데요. 아까 소박함에 대해서도 얘기했지만, 저를 이루고 있고 제가 관여할 수 있고 한 발이라도 더 생각할 수 있는 것 있잖아요? 이것들을 바꾸다 보면 어느새 세상이 크게 바뀌어 있을 거라고 믿어요. 정말로. 세상이라는 걸 허깨비처럼 만들고 '이걸 어떻게 바꾸지?'라고 고민할 필요가 없고, 길바닥에 나앉은 상인 한 명과 대화를 하고 문제를 던져봤을 때 그 질문이 중요한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방식이 다르고 스타일이 다를 거예요. 저는 말과 글로 하는 사람이지요. 농부는 농사를 짓다가 생태적 삶을 살 수도 있고, 깨우침을 얻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걸 본 영화감독 아들이 뭔가 통찰을 얻을 수 있고 그걸 본 노동자 삼촌이 또 다른 삶의 깨우침을 얻을 수 있어요. 만인은 만인을 가르칠 수 있고, 만인에게 배울 수 있고, 만인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뭘 배울 것인지 관심을 가져야 하고, 해야 합니다. 다만 그 수단이 다르고. 그 스타일이 다르겠지요. 모든 사람이 철학책을 읽어야 되느냐? No라고 말하고 싶어요.
강사소개 :: 고병권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서유럽에서 근대 화폐구성체의 형성」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오랫동안 지식공동체 <수유너머>에서 니체와 들뢰즈 및 민주주의를 둘러싼 다양한 철학적, 사회적 문제들을 연구하며 집필, 강연했다. 지금도 여전히 제도권 밖 연구공동체에서 마르크스, 니체, 루쉰, 스피노자 등을 함께 읽고 공부하며 살아간다. 『임금에 관한 온갖 헛소리』9 (천년의 상상,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