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철학.예술 :: 철학과 예술 분야의 리뷰입니다!


 

  

 하이데거는 시인을 일컬어 존재의 거처를 지키는 파수꾼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왜 스스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존재의 터, 텅 빈 그 자리의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시쓰기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수행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시를 들여다보는 일은 나와 더불어 세계의 본질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 됩니다. [풍문으로 들은 시]에서는 2000년 이후의 출판된 한국의 좋은 시집들을 한권씩 소개하려 합니다. 풍문으로만 들었던 시를 읽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코너소개

 

 

 

 

 

지옥에서의 한 철

-황병승, 육체쇼와 전집, 문학과지성사, 3013.

 

 

하얀/수유너머N 회원 

 

 

 

 

 시인 황병승은 2003년 등단 후 미래파의 대표주자로 언급되면서 논쟁 속에 휘말린다. 논쟁 속에서 그의 시는 사라졌지만, 논쟁 밖에서는 한국 주류 시 쓰기에 염증이 난 사람들에게 지속해서 살아난다. 미당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왜요?”라고 답했다는 시인. “모든 훌륭한 예술은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이다.”(미당 문학상 인터뷰 중) 2003년에 파라21로 등단 후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트랙과 들판의 별(문학과지성사, 2007), 육체쇼와 전집(문학과지성사, 2013)을 출간하였다.

 

 

소년들이 지옥을 향해 걸어 들어간다

 

내가 그리는 모든 그림들을 망쳤으면 좋겠다 다른 어떤 무늬의 옷도 자연과 어울리지 않아 우리에게 내일은 얼마나 남아 있는 걸까 언제나 단 하루, 떨어지는 꽃잎

(쥐가 있던 피크닉 자리부분)

 

 IS를 향해 친구를 만나러 간 소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SNS를 통해 교신한 친구를 만나기는 했을까. 집에서만 은둔했다는 소년의 마음이 향했던 그곳에서 만난 친구는 정말 친구이긴 했던 걸까. 벌써 한 달이 지나고 있지만 소년의 행방을 알 길이 없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만국의 소년들이 처한 마음과 몸의 사건. 소년들의 행방이 자꾸만 묘연해진다. 소년들이 지금 당신의 눈앞에 있더라도 안심할 일이 아니다. 소년들의 눈은 행방을 잃었다. IS를 향해 간 소년처럼, 소년들이 유령이 되고 있다. 피리를 부는 사나이를 따라 나선 아이들처럼, 낭떠러지로 걸어 들어가는 소년들. IS를 향해 간 소년의 모습이 소규모 통일콘서트에 사제 폭발물을 던진 소년과 만난다. 소년들이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다.

 소년들이 없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소년들을 돌이켜 본다. 육체쇼와 전집에서 보란 듯이 지옥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소년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는 자신을 돈키호테라고 여기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육체의 전장을 마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년들을 박물관에서나 구경할 것이다.

 

자학과 폭력으로 점철된 몰락의 시간

 

이 나라에선 아무도 몰라요

가진 거라고는 대가리와 열 손가락이 전부인 우리들, 딴 나라의 우리들

(굴속의 연인부분)

 

 

육체쇼와 전집에서 그리는 소년들은 가족이 있거나 없거나 세상과 단절되어 있거나 소통 불능의 상태이다. 소년들은 약골이고 어리광쟁이에 땅달보”(쥐가 있던 피크닉 자리)거나 도시를 헤매며 거리에서 머리를 감고, 술에 취하여 구두를 닦거나 구걸을 하며 지낸다(솜부레로의 잠벌레). 소년들의 친구는 상처와 누명과/기합과 조난”(잼버리이다. 이런 소년들은 경찰에게 총을 맞아 죽으며 일생을 마치던지 누명을 쓰고 소년원으로 끌려들어간다. 이것이 소년들에게 취하는 어른들의 자세이다.

 

기차를 타고 헤이트hate ()에서 헤이트 시로 이사를 다닐 때였다.

그 시절 나는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을 정도의 중병을 앓거나 심장마비를 일으켜 순식간에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뿐이었고, 베개에 얼굴은 묻은 채 울고 있노라면, 어느새 차갑고 물컹거리는 밀가루 대가리가 되어 불타는 오븐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벌거벗은 포도송이부분)

 

 이 세계는 소년에게 폭력만을 선사하므로 소년은 증오의 세계 속에 갇혀 있다. 소년이 있던 장소가 어디든 간에 그에게 세계는 헤이트(hate) 라는 동일한 정거장 속의 쳇바퀴이다. 어느 역에 내리든 동일한 역이 반복되어 벗어날 수도 없는 무한지옥. 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의 몸을 학대하거나, 동류의 타인들을 학대하는 일, 그리고 이 모두가 가능한 일이 섹스이다. 섹스는 이들에게 몸의 교감을 나누는 일이 아니라 몸과 몸이 교전하는 장소이다. 몸과 몸이 교전함으로써 그들은 폭력의 세계를 견디어낸다. 이것이 유일하게 무한지옥을 망각하는 놀이이다.

 

 

George Minne, <Fountain with kneeling boys>

소년들을 외면한다면 인류는 박물관에서나 보게 될 것이다.

 

육체의 전장을 보라

 

 소년들의 증오는 세계의 폭력으로 점철된다. 시한폭탄이 된 소년들이 폭력을 사냥하러 다닌다. 천사의 집-멧돼지 사냥에서는 고아원의 아이들이 멧돼지를 사냥한다. 이드란, 벤자민, 프레디, 해리, 사이먼, 피터, 토미, 패트릭, 커트, 지미, 재커리, 그렉, 노먼, 피케이, 앤드류, 베리너, 아서, 라쉬드, 터커와 같은 천사의 집 아이들은 그들을 툭하면 지하 창고에 가두기 일쑤인 원장 사모 수잔을 사냥한다. 아이들의 총에 수잔은 뜨거운 피를 흘리며 죽는다. 하지만 아이들이 행한 폭력이, 이 죽음이 아이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줄까?

 아마도 비관적이지 않는가? 원장은 수잔의 죽음을 방관하며 방에서 그의 아들들과 포커를 치고 있다. 수잔의 죽음이 아이들의 저항의 결과인지, 상위 폭력의 원리인 원장의 방관의 결과인지 알 수 없다. 오히려 수잔을 중심으로 아이들과 원장은 동조자가 되기도 하며, 수잔은 억압자인 동시에 희생자이다. 다시 원장의 사모 자리에 수잔 대신 폭력을 대행하는 자가 자리잡을 것이다. 이 폭력의 전장에서 정작 죽고 죽이는 이들은 누구이고 이 전장이 끝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불어 이 전장을 바깥에서 구경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시 황소달리기 축제는 육체의 전장 가장자리에서 환호하며 구경하는 이들을 육체의 전장으로 뛰어들도록 도발한다.

 

이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말해봐, 내게 왜 그랬는지, 왜 내 등에 칼을 꽂아야 했는지. 나와 맞서는 게 너희들의 용기를 증명할 수 있는지, 내가 칼에 찔려 쓰러지면 어째서 너희들이 열광할 수 밖에 없는지()이 광장에 모인 너희들에게 묻고 싶어,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마주보며, 그러니 아무도 달아나지 마, 내가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나를 통해서 나와 함께 너희들의 용기를 증명해야지, 겁먹은 표정을 치워버리고 칼과 작살을 들었을 때의 단호한 표정으로

(황소달리기 축제부분)

 

 등과 목에 작살을 매단, 칼에 찔린 황소. 피를 흘리고 비틀거리면서도 구경꾼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황소. 이 황소는 폭력과 증오의 세계 속에서 비틀거리며 스스로 죽음의 구멍으로 들어가는 소년들, 소녀들, 상처받은 사람들의 육체다. 이들의 자학이 폭력의 세계를 부정의 방식으로 돌파할 수 있을까? 그 끝을, “결국 실패를 보여주는데 실패하고”(내일은 프로)만다는 것을 황병승은 예감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폭행을 당한만큼 세계에 대한 연민은 없다. 소년들, 청년들의 미래에 눈감는다면 세계의 미래 또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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