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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론]을 읽는 한 방법

수유너머웹진 2011.02.06 21:55 조회 수 :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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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 Mauss, « Essai sur le don. Forme et raison de l"échange dans les sociétés archaïques », in L"Année sociologique, 1923-1924 (repris in M. Mauss, 1950, Sociologie et anthropologie, Paris, P.U.F.)

마르셀 모스, 2002, <증여론>, 이상률 , 한길사.

마르셀 모스, 2008, <증여론>, 류정아 , 지만지고전천줄.




 

" 자리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조상님들(그분들은 신의 계시를 받았으며 여러분은 그분들의 화신입니다) 축복은 정령들의 축복과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의 축제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틀림없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너의 생명은 약하기 때문에 너는 용감한 사람들의 충고에 의해서만 튼튼해질 있다." 여러분은 저에게 충고를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생명이 것입니다." (어느 북아메리카 인디언 추장의 접대 인사말. <증여론>, 한길사판(이하 동일) 260.)

 

마르셀 모스가 "인류진화의 과정 내내 변하지 않는다" 말한 "이처럼 훌륭한 지혜" 나는 친구 덕에 알았다. 파리에서 유학 중이던 나를 찾아온 시인 친구의 소원을 풀기 위해 보들레르를 "보러" 몽파르나스 묘지에 갔던 . 여행자를 동반한 평범한 묘지 방문이 갑자기 묘지 주인들과의 만남이라는 생생한 색채를 띠며 환해진 . 보들레르, 이옥, 세르주 갱스부르…… 그러니까, 친구를 모방하여 보들레르에게 "한글로" 편지를 묘석에 놓자마자, 그들의 무덤을 방문하는 일이 그들의 시를 읽고 그들이 일에 대해 듣고 그들의 노래를 음미하는 일과 똑같이 생각되어버린 . 그들의 묘를 방문하는 일이 그들을 만나는 일이라면 내게 책을 읽는 것은 또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고, 사람을 만나는 것은 텍스트를 읽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죽은 사람이 묻힌 땅을 방문하는 것이 그러하다면 사람을 만나는 것은! 더구나 그가 내가 음식을 먹고 내게 충고를 주기 위해 초대에 응해준 사람이라면!

 

함께 있음으로 사람들이 내게 주는 , 선물, 음식, 접대, , , 노래로, 그들의 일부는 나에게 와서 생명이 된다. 인디언 추장이 인용한 조상의 말처럼 나의 생명은 약해서, 용감한 사람들의 생명을 받지 않으면 나는 결코 용기있게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에서 벗어나 자발적으로 의무적으로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틀릴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같은 ).

 

<증여론>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경제사회학적으로 혹은 정치경제학적으로, 아니면 모두 다로 읽을 있겠지만, 모든 종류의 독해방식들의 세분된 이름 아래 말하기 전에, 나는 <증여론> 대한 나의 독해를 비분절적으로, 비개념적으로, , 바로 이런 방식으로 말하려고 한다.

 

"누구나 친구에 대해서는

친구로 있지 않으면 되며,

선물에 대해서는

선물로 답례하지 않으면 된다.

웃음에 대해서는 웃음으로 답하고,

거짓말에 대해서는

속임수로 대응하지 않으면 된다." (북유럽 고대시 에다 가운데 하나인 하바말 42. 45)

 

준다는 것에는 긴장이 있다. 주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는 이의 일부분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이질적인 것이 나의 일부분이 되는 일에는 언제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주는 일과 받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물건을 받음으로써 나는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자의 수중에 들어간다. 다시 말해 그의 영향 속에 놓이게 된다. 나에게 타인의 이질적인 부분을 소화하지 못할 그것은 나에게 독이 된다. 어떤 것은 다만 나의 깜냥이 못미쳐 소화할 없는 것이지만, 어떤 것은 애초부터 나와 맞지 않는 , 소화해서는 되는 것일 있고, 어떤 것은 너무 많이 쌓였을 때에만 독이 된다. 그러므로 나에게 해가 모르는 것들을 관계 속에서 흐르게 하지 않고 쌓아두기만을 원하는 자는 자신이 특별해서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거라고 상상하는 오만한 자이거나 순진한 ,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불필요한지 알지 못한 좋은 것만을 한없이 축적하기를 원하는 착각에 빠진 , 탐욕스러운 자이다. 받기만을 원하는 , 받은 만큼 돌려주지 않으려는 자는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는 의심스러운 , 속이려 하는 , 쩨쩨한 자이다.

 

"곰곰이 생각하는 쩨쩨한 자들이여, 갖은 애를 쓰는 쩨쩨한 자들이여, ……패배한 쩨쩨한 자들이여, ……카누를 주겠다고 약속한 쩨쩨한 자들이여, ……주어진 재물을 받는 쩨쩨한 자들이여, ……재물을 구하는 쩨쩨한 자들이여, ……재물을 위해서만 일하는 쩨쩨한 자들이여, 배반자들이여" (쩨쩨한 추장들에 대한 콰키우틀족의 점잖은 저주. 144)

 

재물만을 구하는 자는 사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사물은 결코 인간과 동떨어진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사물들은 인간에게 속함으로써, 주고 받는 대상이 됨으로써 인간들 간의 관계망 속으로 들어오며, 그것을 소유한, 그것을 구하고 선택한, 그것을 생산한 사람의 일부분이 된다. 근대 이후의 인간은 그것을 경제관계와 법적 관계만으로 설명할 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그것을 지칭할 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것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증여론> 등장하는 수많은 원시부족들의 말들과 고대 텍스트의 인용문들은 바로 , 근대인이 지칭할 말을 갖지 못해 잊어버리고 , 사물에 들어 있는 사람의 일부분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근대 경제학이 하듯이 교환관계와 소유권만으로 설명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관계들에는 사람의 속에서 발현되는 모든 활동들, 정서적인 투여, 창조성, 경험에 체화된 지식, 미적 감수성이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인간관계에만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확장이며, 사람의 일부분을 이루는 사물들 속에도 들어 있다. 근대인들이 지칭할 말을 갖지 못한 그것을 마오리족은 물건의 (), "하우" 부른다.

 

" "하우" 부는 바람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 그가 나에게 주는 "타옹가" 내가 당신한테서 받았으며 내가 그에게 넘겨준 "타옹가" (하우)입니다. 나는 (당신한테서 ) "타옹가" 때문에 내가 받은 "타옹가" 당신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됩니다. 나로서는  "타옹가" "탐나는 "(rawe)이든 "불쾌한 "(kino)이든 간에 그것을 간직하는 것은 "옳지"(tika)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주지 않으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이 나에게 타옹가의 "하우"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두번째의 "타옹가" 갖는다면, 나는 병에 걸리거나 심지어는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것이 "하우", "개인 소유물의 "하우", 타옹가의 "하우", 숲의 "하우"입니다." (마오리족 정보제공자 타마티 라나이피리의 말. 66-67)

 

물건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러한 법적 관계는 영들 사이의 유대관계다. 마르셀 모스는 책에서 이러한 사회관계를 "전체적인 급부체계"(système de prestation totale) 부른다. 전체적인 급부체계는 "다른 사람에게 실제로는 그의 본성 실체의 일부인 것을 돌려주지 않으면 " 체계이다.(71)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받는 것은 그의 정신적인 본질, 영혼의 일부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물건을 간직하는 것은 위험하며 죽음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위법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의미로나 육체적, 정신적인 의미로나 사람에게서 나온 , 영적 실체, 음식물, 동산이나 부동산의 재산, 여자 또는 자손, 의식 또는 성찬식 등이 수증자에게 주술적, 종교적인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기도 한다."(같은 ) 이러한 체계를 이루는 계약의 계기들은 재화와 , 동산과 부동산과 같이 경제적으로 유용한 것뿐 아니라 예의, 향연, 의식, 군사적 봉사, 여자, 어린이, , 축제, 시장 등이며, 모스는 이러한 계기들을 폴리네시아, 멜라네시아, 북서부 아메리카, 그리고 주요한 고대 법전들을 통해 연구한다.

 

전체적인 급부의 전형적인 형태를 모스는 미국 북서부 컬럼비아 유역의 아메리카 인디언인 치누크족의 명칭을 이용해 "포틀라치"(potlach) 부른다. 포틀라치는 원래 "식사를 제공하다" 또는 "소비하다" 뜻하는 치누크어로, 북서부 아메리카 인디언의 부유한 부족들은 겨울마다 끊임없는 축제 속에서 투기적으로 다투듯이 재화를 낭비한다. 이들은 "협력자인 동시에 경쟁자인 추장을 압도하기 위해 축적된 부를 전혀 아낌없이 파괴해버리는 일조차 불사한다."(56) 폴리네시아의 사모아 섬에서는 결혼, 출생, 할례, 질병, 소녀의 성년식, 장례식, 상거래 등에 뒤따르는 계약상의 증여체계가 널리 퍼져 있다. 여기서 포틀라치의 가지 요소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부가 주는 명예, 위세, 마나(mana, 비인격적인 초자연력) 요소와, 답례하지 않으면 이러한 마나, 권위, 불가사의한 , 부의 원천 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답례를 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의무의 요소"이다.(61)

 

한편 모스는 멜라네시아 부족간 부족 교역체계인 쿨라(kula) 일종의 거대한 포틀라치의 예로 제시한다. ""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쿨라는 바다원정, 귀중품, 일용품, 음식물, 축제, 의식적 성적인 봉사, 남녀 모두가 하나의 원의 주변을 따라 시간적, 공간적으로 규칙적인 운동을 하며 교역하는 것을 가리킨다. 쿨라 교역의 주역인 추장들은 외견상으로는 전혀 사심 없이 겸손하게 귀족적인 태도로, 집요한 흥정이 행해지는 상품의 단순한 교역인 김왈리(gimwali)에서와는 달리 아량을 가지고 교역을 한다.

 

교환-증여의 가장 중요한 대상은 일종의 화폐라 있는 바이구아(vaygu"a), 세공된 조개껍질 팔찌인 음왈리(mwali) 자개에 가공한 목걸이인 술라바(soulava) 가지다. 음왈리의 교역은 언제나 서쪽에서 동쪽으로, 술라바의 교역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일정한 방향을 따라 행해진다. 부의 상징물인 팔찌와 목걸이의 순환에는 가지 규칙이 있다. 그것들을 너무 오랫동안  간직해서는 안되며, 넘겨 주는 느리고 인색해서도 안된다. 정해진 방향의 특정한 상대방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도 안된다. 이러한 소유권은 특수한 성질을 것으로, 바이구아는 점유물, 담보물, 차용물이면서 위탁된 물건이다. 그것들은 다음 쿨라를 통해 "멀리 떨어진 상대방"(murimuri)에게 양도한다는 조건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는 신화적, 종교적, 주술적이기도 한데, 그것은 바이구아를 소유할 "기분이 좋아지고, 용기가 생기며, 마음이 가라앉" 때문이다.(106쪽) 바이구아뿐 아니라 모든 재화들은 감정으로 충만되어 있으며, 물건들 자신도 계약에 참가한다고 여겨진다. 계약 자체가 물건들의 성질의 영향을 받는다. 다음과 같은 주문은 바로 물건들의 힘에 대한 믿음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쿨라(교역) 것이다. 나는 나의 쿨라(상대방) 녹일 것이다. 나는 나의 쿨라를 훔칠 것이다. 나는 나의 쿨라를 약탈할 것이다. 나는 나의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쿨라를 것이다 …… 나의 명성은 천둥과도 같고 나의 발걸음은 지진과도 같다." (키리위나 지방의 주문. 109)

 

교역되고 매매되고 교환되는 사물들에는 언제나 정서적인 투여가 녹아들어 있다.

 

"너는 선물을 주었다. 하지만 너는 사랑의 선물은 주지 않았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주지도 않았다.

만일 내가 좀더 빨리 위험을 알았더라면,

너는 이미 목숨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에다에 나오는 영웅 흐라이드마르가 로키의 저주에 반응한 구절. 245)

 

이렇게 선물의 증여와 수증에는 선물을 주는 감정이 문제되며증여되는 사물(여기서는 토지) 증여-수증 관계 속에서 말을 한다.

 

"(수증자에게) 나를 받으세요

(증여자에게) 나를 주세요

나를 주면 당신은 나를 다시 얻게 것입니다" (<마하바라타>에서 카샤파 왕에게 주어진 라마의 토지가 하는 말. 225)

 

사물들은 시장가치뿐만 아니라 감정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들은 서로 어울려 놀며, 놀고 있다가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사람들에게로 와서 만난다.

 

"개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논다. 네가 개라는 말을 언급하면,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는 바와 같이 귀중품들도 놀러 온다. 우리가 팔찌를 주면 목걸이가 오며, 그리고 그것들은 (킁킁거리며 냄새맡으면서 오는 개들처럼) 서로 만난다." (트로브리안드-멜라네시아 지역. 111)

 

물건들이 감정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증여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은 또한 자신들이 하나의 장소이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떠다닌다" 여겨지고, 그들의 카누는 "바다에 떠돌며", 그들이 가지고 오는 토템 기둥은 표류하고 있다. 그것들을 멈추게 하는 것이 포틀라치와 초대이다. [……] 콰키우틀족 추장의 매우 통속적인 칭호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그를 향해 노를 저어가는 ", "사람들이 오는 장소"이다." (틀링깃족. 156)

 

이러한 체계에서는 물건과 사람이 이처럼 서로 완전히 다른 특성을 지닌 존재자로 구분되지 않는다. 물건은 사람의 일부이자 사람의 감정이 투여된 , 사람의 영혼이 머무는 장소이며, 사람은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물건과 사람들이 표류를 멈추고 노저어 모이는 장소이다. 사물은 인격과 효험을 가지며, 또한 인격은 개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씨족의 영속적인 물건이다. 따라서 물건과 가치, 계약, 사람은 혼합된 것이고, 여기에서 나와 타자는 완전히 구분되는 존재로 표상되지 않는다.

 

"당신을 자인 나는 나를 주는 자이다." (= "당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나이다. 이제 나는 당신의 본질이 되며, 당신을 주면, 나는 자신을 준다." (<마하바라타>에서. 231)

 

<증여론>에는 수많은 데이터가 중첩되어 있다. 수많은 각주가 달려 있으며 어떤 각주는 페이지에 걸친다. 깔끔한 체계를 선호하는 오늘날의 독자에게 이러한 체제는 때때로 짜증나지 않는가? 나는 <증여론> 독자들이 각주들을 어떻게 읽는지, 대충 건너뛰는지 아닌지, 각주가 나올 때마다 얼굴을 찌푸리지는 않는지 궁금하다. 완전히 구체적인 것들, 물질적인 것들을 기록하고 사유하는 것이 민족지학이다. 데이터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레비스트로스는 <신화학> 4부작 통해 수많은 신화들을 가장 작은 단위인 신화소들로 쪼개고 모조리 기호화한 다음 이들의 구조를 비교함으로써 구체적인 사례들 속에서 드러나는 구조를 읽으려고 했다. <증여론> 많은 독자들이 분명 지리멸렬하게 느낄 수많은 곁사례들을 각주 속에 집어 넣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각주들을 열광적으로 탐독했다. 그리고 미분절적인 글에서 고의로 앞과 뒤를, 각주와 본문을 뒤섞었으나, 단지 울림이 있는 인용문들만을 뽑으려고 했다.

 

민족지학의 사후작업으로 철학적, 정치적, 경제적 이론화는 언제나 가능할 것이지만, 민족지학 텍스트 자체가 갖는 가치는 바로 날것의 목소리들 속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선물의 순환을 설명하기 위해 "선물의 "이라는 신비한 개념에 의지한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보았듯이 모스의 실패인가. 살린즈의 해석처럼 하우는 가치재에서 나오는 이윤일 뿐인가. 부르디외가 보았듯이 증여는 선물교환의 이해타산적인 계산을 속이는 개인적, 집단적 자기기만 사이에서 유희하는가. 데리다가 보았듯이 선물은 선물이 되기를 그칠 때에야 비로소 선물로 인정받는다는 이율배반을 전제하는가. 여기에 또한, 상상적인 것으로서의 신성한 사물이 제도와 상징으로 물질화된다고 고들리에의 입장을 덧붙일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들을 던지기 이전에, 나는 위바네고 부족 씨족의 추장들이 다른 씨족의 추장들에게 하는 인사말을 모방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사드립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가 어찌 달리 말할 있겠습니까? 저는 가치 없는 천한 사람인데도 여러분께서 저를 기억해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여러분은 정령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오시다가, 저와 함께 자리하러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접시는 가득 것입니다. 정령들을 대신해 참석해주신 여러분께 다시 인사를 드립니다……"(260) 이것은 의례의 말이지만 나는 비서구인들이 진정을 다해 의례를 행하듯이, 바로 그런 방식으로, 근대인에게는 의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말을 할 것이다. 개념들의 유효성에 대한 회의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예감에 시달리고 있는 내겐, 단지 우리가 습관과 편견을 뒤집지 않기 때문에만 우리에게 공명하지 않는 언어들이, 아직까지는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빈곤한 언어가 지금 오래된 말하기 방식을 모방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글/ 홍서연(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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