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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훌륭한 말과 글이 아주 많습니다. 풍성하게 운영되는 여러 다른 웹진과 블로그의 글들에서부터, 아카데믹한 격식이 오히려 그 가치를 가리고 있는 학술논문에까지, 수없이 많은 좋은 글들이 있습니다. 글만이 아닙니다. 인터넷에서 부쩍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된 강연과 발표에서도 보석 같은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수유너머N이 추천하는 말과 글]에서는 도처에 흩어져 있는 훌륭한 말과 글을 모아, 추천의 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권하려고 합니다. 

-코너 소개-


선택의 역설과 자유





만세 / 수유너머N 연구원





 오늘은 선택의 역설과 자유에 대한 강연과 책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겠지만, 여러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때로 그것은 스트레스와 실망을 낳기도 하지요.


 얼마 전 노트북을 새로 살 일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노트북 가격비교 사이트에 접속해서 상품들을 살폈습니다. 컴퓨터를 좋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라, 노트북 정도는 금세 고를 거라 생각했습니다. 착각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종류의 노트북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3세대니 4세대니, 듀얼코어니 쿼드코어니 하는 새로운 용어도 알아듣기 힘든데,(제가 어렸을 때는 그냥 최고 클럭수가 높은 CPU가 짱이었습니다.) 저중량을 강조한 노트북에서부터 그래픽을 강조한 노트북까지 상품의 콘셉트마저 과거에 비할 바 없이 다양했습니다. 대체 뭘 사야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틈만 나면 가격비교 사이트에 들어가 노트북을 살폈습니다. 그렇게 연구를 했으면 논문을 하나 더 썼을 텐데 싶을 만큼, 열정적으로 살폈습니다. 2주가량의 심사숙고 끝에 결국 노트북을 샀습니다. 하지만 결국에 고른 노트북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많이 살핀 만큼 내가 고른 상품의 단점도 명확히 알고 있었던 데다, 선택하지 않은 노트북들이 계속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노트북이 버벅대기라도 하면, ‘아, 그때 그걸(다른 제품) 샀어야 했는데!’라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심리학자인 베리 슈워츠의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이라는 제목의 강연은 이처럼 수많은 선택의 가능성이 주어졌을 때 오히려 만족감이 떨어지는 현상을 여러 재미있는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강연 전반에서 지적하듯이, 더 많은 선택이 더 많은 자유를 의미하며 더 큰 행복을 낳는다는 믿음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습니다. 하지만 슈워츠가 보기에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너무 많은 선택 가능성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낳습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결정은 비용을 수반합니다. 즉, 힘이 듭니다. (2) 수많은 선택 가능성은 심리적 기회비용을 과장하여 만족을 떨어트리고 후회를 불러옵니다




 여러 옵션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선택지들을 면밀히 비교하고 그것에서 기인하는 효용을 예상하는 고도의 정신 작업입니다. 휴가 여행지를 고르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주요한 경력을 선택하는 것에까지,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이런 상황에 처합니다. 선택에서 ‘최적의 결과’를 얻어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의 척도로 모든 선택지를 일렬로 세울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마치 예전에 CPU를 최대 클럭이라는 지표 하나로 일렬로 세울 수 있었듯), 각자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복잡한 평가와 예측을 필요로 합니다. 예를 들어 이 노트북은 가벼운 대신 하드가 크지 않고, 저 노트북은 무거운 대신 하드가 크다고 해보죠. 각자 나름의 특성이 있다 보니 어느 하나가 확실히 우위에 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이 두 상품이 가져다 줄 효용을 예측하고 비교하는 건 여러 상황을 상상하고 자신의 근력과 작업 패턴을 고려하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저처럼 물건 하나 고르다가 2주의 시간을 쏟아버리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심심찮게 생기는 겁니다. 이런 작업은 선택지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힘들어집니다. 더 많은 선택의 가능성이, 더 많은 비용을 만들어내는 셈입니다. 


 이렇게 많은 비용을 들여서 어렵게 선택했을 때 만족감이 크다면, 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고려와 숙고의 과정이 정작 결과에 대한 만족감을 떨어트린다는 점에 있습니다. 슈바르츠는 이 신기한 일을 비교와 선택의 과정에서 기회비용이 심리적으로 과장된다는 말로 설명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기회비용은 여러 옵션 중 하나를 선택했을 때 이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가치를 의미합니다. 노트북A와 B를 고민하다가 A를 선택하면, 노트북B가 주는 즐거움이 기회비용이 됩니다. 원칙적으로, 고려하는 상품이 늘어난다고 기회비용이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10종류의 노트북 중에 A를 골랐건 2종류의 노트북 중에 A를 골랐건, 기회비용은 내가 2순위로 고려한 B뿐입니다. 경제학에서 기회비용을 계산할 때에도 차 순위 선호 옵션만을 고려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은 경제학 교과서처럼 작동하지 않습니다. 슈워츠는 사람들이 많은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택할 때, 차 순위 선택지만이 아니라 자신이 본 모든 상품을 포기하는 듯한 심리적 긴장을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상황에 따라 다양한 옵션의 장점들이 아쉬워지기 때문입니다. 노트북으로 돌아가 봅시다. 가벼움만을 고려하면 A노트북이 최고입니다. 넉넉한 저장 공간이라는 측면에서는 B가 더 좋은 대안일 수 있으며, 3D그래픽의 안정적 구현을 고려한다면 C가 그렇고, A/S를 생각하면 D가 적절합니다. 이런 치밀한 비교 끝에 A를 선택한 구매자는 차 순위 선택지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B의 저장 공간과 C의 그래픽과 D의 A/S를 포기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쉽게 말해, 저장 공간이 모자라면 ‘아 그때 B를 살 걸’ 하면서 후회하고, 3D게임을 해야 하면 C를, A/S가 불편하면 D를 떠올린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선택의 가능성이 클수록 선택 이후 실망이 커지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더 많은 옵션을 고려했다는 말은, 여러 옵션들의 다양한 장점을 많이 살폈다는 말이고, 선택 이후에는 내가 포기해야 했던 그 무수한 장점이 시시때때로 떠오를 테니까요. 더 많은 선택지를 고려할수록, 심리적 기회비용은 커집니다. 





1000개가 넘어서는 노트북을 면밀히 비교하고 연구하면서 시간을 쏟으면, 우리는 만족스러운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사진 출처: danawa.com) 슈워츠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한국에 [선택의 심리학]이라고 번역된 책에서, 슈워츠는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원제는 강연과 동일합니다.(The paradox of choice)



 물론, 이런 생각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모든 장점을 가진 옵션을 선택하지 못해 안달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쉽게 이런 심리적 함정에 빠집니다. 무수한 선택지를 면밀히 검토하여 애써 여행지를 골라놨으면서, 정작 가서는 가지 않은 무수한 장소를 떠올리며 실망합니다. ‘여기는 경치는 좋은데 숙소가 별로야. 숙소는 그때 살펴본 거기가 짱이었는데. 음식은 그 전에 본 거기가 더 나았고.’ 이런 식입니다. 직업을 선택할 때, 살 곳을 선택할 때, 기타 여러 무수한 선택을 해야 할 때, 우리는 이와 유사한 긴장을 경험합니다. 온 힘을 들여 더 많은 대안을 살폈을수록 정작 내가 선택한 것이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역설적이지만, 너무 많은 선택의 가능성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게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디에 살고 무엇을 먹고 어떤 일을 할지 전혀 선택할 수 없다면, 그거 참 답답한 일일 겁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슈워츠가 말하는 것은, 선택폭의 증가가 행복을 가져오는 것에는 적절한 수준이 있다는 말입니다. 현대 사회가 그러하듯, 옵션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불편해집니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슈워츠는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여러 옵션을 나열하면서 비교하기보다, 그냥 최초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면 다른 옵션을 돌아보지 않고 선택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Best가 아닌 Good Enough를 기준으로 삼으라는 거죠. 옷 산다고 온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비교하기보다, 그냥 애초에 생각한 기준에 미치면 얼른 사고 나가라는 겁니다.^^;; 그게 훨씬 만족감도 크고 후회도 적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자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선택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살 곳을 선택하고, 할 일을 선택하는 것을 자유라고 여긴다는 말입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면 더 자유로워진다고, 더 행복해질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슈바르트가 지적하듯, 선택의 옵션이 지나치게 많으면 오히려 큰 압박을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유가 위에서 설명한 여러 고민과 실망을 기꺼이 떠안는 변태적 성향이라 보지 않는다면, 자유를 선택의 확장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진경의 근간인 [삶을 위한 철학수업: 자유를 위한 작은 용기]는 ‘억압이나 구속의 부재, 이런 저런 선택의 가능성’에서 벗어나 자유를 정의하려고 시도합니다. 이 시도는 여러 방면에 걸쳐 있습니다. 때로 저자는 매혹을 따라갈 수 있는 용기가 자유라고 이야기하고, 때로는 타인과 세상의 욕망을 벗어나는 움직임을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그에게는 익숙지 않은 음악이나 음식을 통해 자신의 감각을 확장하는 것이 자유이며, 선물을 통해 빈약하기 짝이 없는 거래관계를 넘어서는 것이 자유입니다. 저자는 여러 주제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자유를 이야기하지만, 가만히 읽어가다 보면 여러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 자유의 핵심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저자에게 자유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우리가 통상 능력이라 생각하는 경제력에 한정되지 않았을 따릅니다. 저자에게는 매혹에 이끌리는 용기, 상처와 원한으로부터 벗어나는 망각, 새로운 감각의 획득 같은 것이 오히려 중요한 능력입니다. 






 자유롭다고 하기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자유롭지 않다고 하기도 애매한 삶입니다. 자유롭지 않다고 말하기엔 현대 문명이 제공하는 선택지가 너무나 다양하고 화려합니다. 하지만 자유롭다고 말하기엔 우리 삶이 어딘가 피곤합니다. 슈워츠의 강연과 책, 그리고 이진경의 책은 이런 우리에게 자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해주는 좋은 자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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