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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는 데 실패했는가?

그렉 램버트,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 최진석 옮김, 자음과모음




*이 글은 계간 [자음과 모음]에 2014년 봄호에 실린 글입니다. 





꽁꽁이/수유너머N 회원






여기 하나의 소송이 진행 중이다. 사건 제목은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 


이 법정에는 따져 물을 두 가지 죄가 있다. 첫째, 들뢰즈․가타리를 부당하게 두렵다고 신고함으로써 성립하는 무고죄.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줄 알면서도 세상에 나와 사람들을 두렵게 한 들뢰즈․가타리의 미필적고의 죄다. 우선 저자 그렉 램버트는 프렉드릭 제임슨, 슬라보예 지젝 등을 각각 기소한다. 




제임슨의 말을 들어보자. 들뢰즈․가타리는 1970~1980년대 그나마 간신히 아카데미즘에 안착한 미국 마르크스주의를 와해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초월성과 오이디푸스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어떤 계급적 이해관계에서 유발된 것인데, 이 프랑스인들의 사상이 미국으로 수입될 경우 미국 좌파 지식인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지 못한 채 그저 파괴적인 힘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즉 총체성 개념에 대한 어떤 공격이라도 당시 미국적 구조에서는 순수한 좌파가 이 나라에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현실적 전망마저 약화시키는 위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임슨은 비록 제도화되긴 했지만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의 응전력을 마지막 보루로서 지켜내려 했던 것이다(이른바 “봉쇄의 전략”). 이어서 제임슨은 들뢰즈․가타리가 라캉을 표적 삼은 것처럼 데리다를 표적 삼아 『정치적 무의식』을 출간한다. 그렇다면 제임슨의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무고죄는 과연 성립하는가? 결론은 성립한다. 그는 너무 성급히 들뢰즈․가타리를 해체주의적 경향과 등치시켰고, 제도로 잡히지 않는 낯선 언어의 신체성을 감지하지 못했으며, 대학이라는 요새에 너무 의지하여 그 스스로의 비판력이 고립되게끔 했다. 그렉 램버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대학의 문학부는 초상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p. 102) “오랜 세월 동안 제도화되고 신학과 결탁했으며 지시대상적 장르에 머물러 있던 해석에 과연 어떤 희망이 남아 있을까? 이제 그와 반대되는 꿈을 꾸어보자”(p. 105) 


반면 지젝의 입장은 어떠한가? 그는 두려움을 넘어 적극적인 모욕 주기에 혈안이다. 그중 필자가 기억하는 조롱에는 이런 것이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이 붕괴된 이후 불법 통행을 막기 위해 훈련된 6백여 마리의 순찰견이 죄다 자폐적 증상을 보인 사건을 두고 지젝은 비밀경찰 시스템과 리좀의 유사함을 지적하며 “전체주의적” 정치공간의 구조와 탈-오이디푸스적 구조의 상동성을 지적함으로써 들뢰즈를 욕보였다.1) 하지만 이러한 지젝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그렉 램버트의 말처럼 “대부분 들뢰즈주의자들은 ‘농담’을 잘 이해하는 편”[p. 206]이다. 오히려 그렉 램버트는 분열분석의 탈주선을 도착이라고 부르는 정신분석의 입장을 비판한다. 지젝에 의하면 도착증자는 끊임없이 유예하며 탈주선을 타고 있는 것 같지만 죽음충동의 보편적 폐쇄 회로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시적인 종결점을 가지지 못하고 역사적 기입을 위한 어떤 잠재적 공간도 갖지 못하는 후기 자본주의는 도착증자들의 세계이다. 이에 대하여 그렉 램버트는 이런 논리야말로 “히스테리증자가 갖는 위협감의 반응이자 강박신경증자의 우주에 대해 느끼는 위협감의 반응”[p. 231]일 뿐이라고 응수한다. 들뢰즈주의자들의 탈주적 공간과 병치된 도착적 우주는 기실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은 일종의 환상으로서 강박증자들의 보충적 이미지에 가깝다는 것이다. 결국 도착적 우주는 자본 자체의 장을 위한 부품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즉 지젝의 논평은 그 스스로를 묶어두는 말일 뿐이라는 것이다. 




제임슨의 두려움이 다소 납득할 만한 피해망상에서 기인한다면, 지젝의 두려움은 오해에서 비롯된다. 그렉 램버트는 이 두 이론가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이 어떤 지점에서 들뢰즈주의와 오인충돌하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한편 이들이 정말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죄는 없는지에 대해 따져 물어볼 차례다.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핵심은 자본주의가 분열증을 양산해낸다는 것, “새로운 존재를 생산하는 특수한 소외형식이 자본주의”[p. 282]라는 것인데, 이는 실은 마르크스의 주장을 새롭게 변용한 것으로, 네그리․하트는 이를 『제국』에서 이어받아 전개했다. 제임슨이 봉쇄의 전략에 힘썼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미국 땅에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마쳤던 것이다. “모두가 제국에 대항하지만 다중 각자는 그들 자신의 특이성의 이름으로 저항한다!”[p. 285]라는 망상의 노래를 부르며. 이를 망상으로 보는 일은 비난이 아니라 찬사이다. 망상이야말로 창조적이기 때문이다. 즉 『안티 오이디푸스』는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욕망의 분산된 형식들을 한데 끌어모으”[p. 286]려는 ‘기계’에 가까운 것이다. 그렉 램버트는 이렇게 말한다. “『제국』은 정확히 우리가 사는 특수한 시점에 쓰인 『안티 오이디푸스』”[p. 286]다. 이것이야말로 막아도 막아도 결과적으로 되돌아온다는 점에서 ‘두려운 낯설음’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탈주의 욕망은 신비화되고 저 너머의 것으로 간주된 ‘관념-무의식’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문제로 진격해 곧장 작동하는 ‘힘-무의식’인 것이다. 


또한, 들뢰즈․가타리는 권력담론의 현대의 발명자 ‘푸코’를 전유하고 있다. 단, 권력을 삶과 분리시키지 않는 생성의 관점에서 말이다. 후기 푸코의 ‘삶의 방식으로서 권력’은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는가? 아감벤은 그것을 신비화된 ‘자기관리술’로 이해했다. 하지만 지식과 권력을 넘어서는 이러한 “제3의 면, 체계 내의 제3의 성분”[p. 367]은 낯설고 두려운 것일 수밖에 없다. 권력이 결박해온 힘을 타고 나아가며 동시에 그 외부로 파선을 그리는 생명의 힘은 좀처럼 이해받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분노’와 ‘굴종’이 아닌 그 무엇이 어디에 어떻게 있다는 것이냐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진다. 말년의 푸코가 그 자신의 모순을 지적하는 일련의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일 때, 들뢰즈는 다만 푸코의 초상화를 기민하게 그렸다. 




이 점에서 그렉 램버트는 권력과 욕망의 문제에 관한 들뢰즈․가타리의 입장이 『안티 오이디푸스』 이전으로도 이후로도 이어지는 성좌의 한 점이라고 여긴다. 이것이야말로 들뢰즈․가타리가 사람들을 두렵게 한 죄의 본 모습일 것이다. 이 책의 목차가 배치된 화용론적 맥락에서 볼 때, 그렉 램버트는 네그리․하트와 푸코를 불러옴으로써 각기 정치, 권력의 분야에서 이루어진 들뢰즈․가타리의 리좀적 생산력에 대해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네 개의 영역(표현, 정신분석, 정치, 권력)이 각기 다른 네 명의 사상가(제임슨, 지젝, 네그리․하트, 푸코)와 들뢰즈․가타리와의 관계 속에서 잡다하게 전개되는 책이다. 이러한 구성이 각 철학자 간의 개념비교를 시도한 통상적인 작업과는 어떻게 다를까? 그렉 램버트의 철학적 비평 작업이 다소 흥미로운 이유는 이 작업이 그들 간의 차이에 대해 단순히 지적․정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치 싸움을 붙이듯 텍스트 내에서 육박전을 벌이게 하는 데에 있다. 마치 이종격투기의 해설자처럼 화면으로는 읽어내기 어려운 선수들 간의 눈빛 교환, 교묘한 도발, 다음 동작의 예비에 대해 재빠르게 포착해 설명하고 있다. 고로 두려움에 관한 죄를 놓고 벌어진 이 소송은 거친 주먹을 교환하는 링 위에서 진행되고 있다.


 필자가 이 책을 읽고 든 질문 두 가지를 던지며 이 글을 마친다. 첫째, 한국에서의 『안티 오이디푸스』는 생산적인 망상-기계로서 충분히 작동했는가? 난삽한 내용, 더불어 논쟁이 많았던 한국어 번역본을 통해 탈주의 정치학이라는 것에 대해 모호하고 신비한 이미지 말고는 얻은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즉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는 데 실패한 우리의 제도에 대해 고민해본다. 이 점에서 책의 서두에 『안티 오이디푸스』가 당초 틴에이지를 겨냥해 쓰인 것이라는 풍문은 흥미롭다. 그러니까 철없는 자들을 위한 오독의 책-기계라는 것이다. 철없이 읽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둘째, 이런 철학적 비평은 이제 국내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충분히 전개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역자 최진석은 옮긴이 주를 통해 통상적인 역주를 넘어서 적극적인 해제를 꾀하고 있다(예를 들어 2장 25번 주는 하나의 논문에 가깝다). 역자는 들뢰즈와 지젝, 램버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 한다. 그것은 단순히 번역하는 자를 넘어서 자신의 신체를 부여받기 위해 분투하는 비평적 주체의 욕망을 보여준다. 그러니 1990년 후반부터 전개된 들뢰즈의 사유와 최근 각광받고 있는 지젝의 사유 간의 긴장이 한국 지식인의 논쟁적 싸움터에서 전개될 때, 이론적 논쟁은 보다 생산적인 신체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렉 램버트가 이 책을 통해 결과적으로 드러낸 것은, 미국 좌파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의 몸뚱이인 것처럼 말이다.



1)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옮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4,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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