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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만 남고 곁은 없는 사회! 이것을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 엄기호, 『단속사회』(창비, 2014)





                                                               전성현/수유너머N 회원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슈가 되는 정치적 사안이나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친구들과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는 게 불편하게 됐다. 각자의 가치관이 판이하게 달랐던 나와 친구들이었기에 정치,경제,사회에 대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대개는 갈등으로 이어졌고, 결국 우리들은 이 주제에 관련된 이야기를 서로 삼가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몇몇 친구들이 여기저기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들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던 것은. 그런데 그들이 선택했던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들이 당시 내게는 굉장히 생소해보였다. 그곳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공론장으로서의 인터넷이 아닌 당파성으로 짙게 채색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편’에 익숙한 우리

   자신에게 낯선, 다시 말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가득 찬 공간에서 지내며 그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이에 반해 자신의 가치관과 비슷한 이야기들만이 공존하는 공간은 상대적으로 긴장감이 덜하며 익숙하다. 더군다나 그곳이 익명성을 기반으로 작동한다면 자신의 이름을 걸 필요조차 없으므로 책임감과 신중함은 크게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가볍고 편하고 익숙한 게 과연 옳은 것일까?

   엄기호는 『단속사회』에서 이러한 익숙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게 비슷한 것끼리만 뭉치고 얘기하게 되면 각자는 스스로에게 이질적인 것들에 대해서 점점 배타적으로 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사회는 적대로만 가득 차게 되고 소통은 점점 요원해진다. 그렇다면 그 사회를 과연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 공간이 정말로 사회로 작동하고 있을까? 엄기호는 지금의 사회가 더 이상 사회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초래된 가장 큰 원인을 이 사회가 ‘편’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엄기호는 이 사회 같지 않은 사회를 ‘단속사회’라고 명명한다.

 

 

소통이 불가능한 사회

   이 ‘단속사회’라는 개념을 구체화하기 위해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들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자.

 

                                         

 

   이 도표에서 언급된 사이트가 정말 보수인지 진보인지 중도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인터넷이 처음 보급되던 시기에 우리가 꿈꾸던 ‘인터넷을 통한 진정한 공론장의 실현’은 오히려 무색해졌고, 도리어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강화시켜줄 사이트를 찾아서 그곳에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서유럽에서 근대 공론장이 최초로 설립되던 시절, 부르주아 시민들은 하나의 공론장에서 정치적 소통을 함으로써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넘어설 수 있었다. 타인에게 논박을 당함으로써 자신의 세계관이 얼마나 협소한 것이지 알게 되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상대화함으로써 더 넓은 ‘나’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그 도약을 바탕으로 성장함으로써 당시의 부르주아 시민들은 하나의 정치적 주권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파적인 이해로 갈기갈기 찢어진 채널들만이 존재하고, 누리꾼들 또한 그러한 채널들 중에서 자신의 호불호에 걸맞은 사이트만을 찾아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 합의나 소통, 성장이라는 말은 무색해진다.

 

이제 사람들과의 유대와 교류는 같거나 비슷한 취향의 모임들에서만 활발할 뿐이다. 간혹 등장하는 다름과 차이에 대해서는 ‘거의 취향일 뿐’이라는 말로 무관심한 듯 존중하는 제스처로 해결한다. 이로써 자신의 고통에서 자신의 주변 혹은 사회의 모순이든 고통이든 무엇인가 ‘자기’를 넘어서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이야기를 나누며 ‘곁’을 만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9)

 

   많은 사람들은 같고 비슷한 것에는 끊임없이 접속해 있지만, 타인의 고통과 같이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것들은 철저하게 ‘단속(斷續)’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때 ‘단속’은 개인화, 원자화가 아니다. 개인화, 원자화는 타인과의 유대를 아예 끊어버리는 사태를 일컫는 것이지만 ‘단속’하는 사람들은 타인과의 유대를 아예 끊어버리지는 않는다. 이들은 어떤 공동체에 속해있다. 하지만 그 공동체는 이질적인 것에 철저하게 배타적이다. 그 공동체 내에서 소통은 매우 활발하다. 하지만 그 소통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표현만 다를 뿐 내용은 거기서 거기다. 그 사이트를 들어갈 때 우리는 그 사이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어느 정도의 기대를 한다. 거기서 이루어지는 소통들은 우리들의 기대를 거의 저버리지 않는다.

 

 

"곁"을 밀어내는 우리

   그렇다면 서로 정치적인 성향이 다른 커뮤니티들끼리 소통을 하면 되지 않는가? 표면상으로는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위 도표에 나와 있는 대표적 극우 사이트인 일간베스트와 대표적 진보성향의 사이트인 오늘의 유머는 매우 자주 관계를 맺고 있다. 문제는 그 관계맺음이 매우 적대적이라는 점이다. 인터넷상이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에게 물질적인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또한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는 과정은 사뭇 실증적이다. 각자는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수많은 사실적 근거(팩트)들을 가져오고, 이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의견이 포괄하고 있지 못하는 실재적 사실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기 자신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이 근거를 가지고 오는 이유는 오직 자신들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그들은 ‘나’라는 울타리에 끊임없이 매몰된 채 나를 넘어서지 못한다.


   내가 변하지 않으므로 나의 세계관이 아닌 다른 세계관을 바탕으로 구성된 사실(fact)들 또한 이해할 수가 없다. 나의 척도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귀찮거나 짜증나는 것들이 된다. 가뜩이나 짜증나는데 그들이 계속 나의 의견을 무시하고 폄하하니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결국 서로는 서로를 적대적으로 대한다. 이러한 적대성을 통해 적과 나의 경계는 명확해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으니 소통이라는 말은 점점 무색해지며, 그렇게 사람들은 ‘편’ 속에서만 존재할 뿐 ‘곁’을 만들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소통이란 서로의 차이 안에서 공통의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공통의 것이 없어도 소통은 일어나지 않으며, 차이가 없어도 소통은 일어나지 않는다.(169)

 

                                                      

 

‘곁’으로 다가가기

   ‘편’으로만 가득 찬 사회이지만 ‘편’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최근에 발생한 세 모녀 자살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죽음을 통해서만이 자신들의 고통을 세상에 호소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쪽 ‘편’이나 저쪽 ‘편’에서 세상을 한 방향으로만 바라보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곁’은커녕 ‘편’조차 갖지 못하여 결국 삶은 포기하곤 한다. 우리가 “각자의 취향을 인정하자”라는 식으로 이질적인 것과의 관계 맺기를 포기하거나 혹은 강력한 적대성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존재증명을 위해 ‘닥치고 정치’를 외칠 때, 어떤 이들은 그 ‘정치’로부터도 소외된 채 고립 속에서 죽어간다.


   ‘곁’으로 다가가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내려놓은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 자신을 내려놓을 때 진정한 소통과 성장이 가능해진다. 무엇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여 그렇게 망각이라는 2차 죽음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때, 이 사회는 ‘곁’으로 풍성해지고 각각의 기록들은 하나의 사건이 된다. 그러한 경청을 통하여 그들과 나를 지탱하고 있는 공통의 토대를 발견하고, 그 위에서 서로를 평등하게 세울 때, 사회는 비로소 사회가 된다.

 

경청이란 남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다. 그것도 건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듣는 것이며 자신이 모르는 것,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는 것을 말한다. … 경청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자기도 모르던 자기의 삶, 즉 자기 삶에 내재되어 있는 타자성이다. … 타자성을 발견하고 그것에 기초할 때 비로소 너와 내가 공유한 ‘공통의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너와 이야기를 나날 수 있게 된다. … 외면할 수 없게 된 목소리, 배제할 수 없게 된 얼굴로 떠오른 남, 그 남이 ‘너’가 아닌가. 환원되지 않는 존재, 대체되지 않는 관계, 이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대체 가능하게 만드는 ‘수의 정치’에 맞서는 일이 아니겠는가?(269 -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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