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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사건을 해결하는 남성적 연대의 헛된 상상

수유너머웹진 2015.11.03 19:38 조회 수 : 16

[이슈&리뷰]


 사건을 해결하는 남성적 연대의 헛된 상상: 

1000만 관객 돌파 영화 <베테랑>를 보고 



 

수유너머N회원 조지훈




 

 나만 몰랐는지는 모르겠지만 2000년대 이후 1000만 관객을 넘은 영화 중에서 여성이 주인공을 하고 있는 작품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를 손희정은 문화과학 83호에 실린 <페미니즘 리부트>에서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서 보여준다. 명량, 괴물, 7번방의 선물 등등 얼핏만 생각해보아도 그 말이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90년대 흥행작에는 나름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영화들에서 여성은 커리어 우먼으로 남자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사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물론 결국 손희정의 말마따나 영화 막바지에 다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 당당하던 커리어우먼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만 말이다. 그러던 게 2000년대 들어서 싹 사라지고 만다. 여성들은 그냥 조연이나 이름 없는 인물로 부차적으로 등장하거나, 아니면 공포 영화의 귀신으로 등장할 뿐이다. 이를 손희정은 한국의 대중영화에서 여성의 상징적 소멸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제 영화의 네러티브에 여성이 낄 자리는 존재하질 않는 것이다. 90년대의 반쪽자리 커리어우먼조차도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여성은 잉여인간으로 존재하지도 못한다. 잉여인간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 이후 노동력의 시장에서 내몰린 비극적인 남성 노동자에게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여성은 영화의 네러티브 안에서 주인공은 물론이거니와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인물로도 등장하기가 어렵다. 그냥 철저히 추방되거나 무시될 뿐이다. 손희정은 이를 영화 <고지전>에 대한 정밀한 독해로 잘 보여준다(자세한 내용은 문화과학 83호를 참고하자).



 손희정의 진단대로 여성이 스크린의 네러티브에서 추방되고 있는지의 여부는 최근의 1000만 관객을 넘은 영화 <베테랑>에서도 잘 드러난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은 재미있는 영화다. 좀 더 무거운 분위기의 <부당거래>와 비슷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결말은 권선징악+해피앤딩으로 끝나다. 이에 대해 비현실적이니, <부당거래>에 비해서 문제의식이 약해졌느니 말들이 분분하지만, 추측컨대 감독은 굳이 누구나 인식 가능한 이런 암울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걸 다시 꺼내서 확인하기보다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만들어보고 싶어했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문제는 결말의 비현실성이 아니다. 다만 손희정의 지적한 바대로 1000만을 돌파한 이 영화에서도 여성들은 존재하질 않는다. 인간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강력계 형사로 여성이 등장하기도 하고, 주인공의 당당한 아내 혹은 악당의 내연녀들로 여성이 등장하기는 한. 그런데 이들은 말 그대로 아무런 특이점이 없다. 나름 중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강력계 여형사도 그냥 또 하나의 강력계 형사일 뿐, 특별히 여성으로서의 특이점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여성이 철저하게 추방되었다는 느낌은 여성 인물의 등장 여부보다 네러티브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영화 속에서 악당을 처벌하는 집단은 강력계 형사다. 그런데 이 강력계 형사의 주인공을 맡은 황정민은 말 그대로 직선적 캐릭터 그 자체다. 그 어떤 흔들림도 없고 폭력을 쓰는 것에 대해서도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영화에서 너무나도 많이 봐왔던 형사 캐릭터다. 그런데 이 형사가 사건을 해결하다가 막혔을 때 돌파하는 방식이다. 90년대의 <투캅스> 때만 하더라도 과연 형사가 정의로운 인물이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누아르적인 양심은 있었다.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를 막는 것은 다름 아니라 비리로 얼룩진 형사 바로 자신들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2015년도의 영화 <베테랑>은 다르다. <베테랑>의 형사들도 비리로 얼룩진 모습이 나오지만, 이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사건해결을 막는 이들은 더 이상 같은 형사들이 아니다. 오히려 형사들간의 연대가 문제를 해결하게 해준다. 문제를 돌파하는 것은 남성적 연대의 힘인 것이다. 예컨대 영화 속에서 출세와 실적 문제 때문에 사건을 덮으려던 광역수사대 총경이(예전에는 이런 인물들은 끝까지 사건해결에는 관심없는 부패한 형사들이었다) 황정민과 함께 사건을 조사하다가 칼에 맞고 부상을 당하자, 갑자기 조심스러워 하던 모습을 던져버리고 사건 수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마치 조직의 보스가 자신의 부하가 다친 것에 대해서 분개하고 복수하려는 것과 매우 유사한 감정회로가 작동되면서 문제가 풀리는 것이다. 기업의 갑을 관계로 맺어진 구조적인 사회 불평등이 남성적 연대의 힘으로 돌파할 수 있는 출발점을 얻게 된 것이다.



남자를 끼리 문제 일으키고 해결하고 다하는 영화



 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은 광역수사대 형사와 팀장, 그리고 총경의 대화 내용이다. 사건을 수사해야 된다고 불같이 펄펄 뛰는 황정민과 이를 옹호하는 팀장에게 총경은 괜히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딱 잘라서 말한다. 그런데 이를 설득하기 위해서 팀장이 취하는 액션은 총경과의 형사 근무 시절 같이 사건을 수사하다가 칼에 맡은 상처를 보여주는 것이다. 총장을 위해 개고생했는데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에 총경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너만 고생했냐 나도 고생했다는 식으로 자기의 상처를 보여준다. 질세라 이중에서 가장 막내 형사인 황정민도 자기 상처를 보여주면서, 선배들 때문에 자기도 고생을 했다고 외친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험악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외침들이 이들을 하나의 연대로 묶는다. 그리고 그 힘은 한국사회의 갑을 관계 횡포라는 구조적 모순을 뚫어내기까지 한다. 영화 <베테랑>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도 그리고 이를 해결하는 힘도 모두 남성적이다. -남성적인 요소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비현실적인 부분은 바로 남성적 질서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갑을 관계를 남성적 연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지점이다. 영화가 비현실적일 수도 있다. 과장된 희망을 그릴 수도 있다. 왜 안 되겠는가, 영화랑 원래 상상의 산물이니 말이다. 문제는 상상의 방향이다. 이는 <베테랑> 같은 영화에 여성을 더 출현시킨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황정민 대신에 김고은을 넣는다고 갑자기 이 영화가 여성주의적인 영화가 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무늬만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그러나 실재로는 지금까지의 액션영화의 남성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매드맥스>의 여주인공 샤를리즈 테론에게서 이미 확인한 바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크린 속 등장하는 성별이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아니라, 사건을 비-남성적으로 진단하고 풀어가는 섬세한 시선이 아닐까 싶다그런 섬세한 영화들이 나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과연 <베테랑>의 상상력으로 재벌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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