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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이야기는 지지않는다

밀양구술프로젝트, 『밀양을 살다』(오월의 봄, 2014)




지안/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어딘가를 산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건 어딘가에서산다는 것과 다른 말이다. 나는 서울에 사는데, 사실 내가 사는 곳이 굳이 서울일 필요는 없다. 아마 괜찮은 일자리나 다른 일이 있다면 다른 도시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사는 동네와 나의 삶 자체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이런 입장에서 이 책 제목을 보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밀양산다, 도 아니고 밀양산다는 건 뭐지?




밀양이 가진 의미 

밀양 할매들에게 밀양은 그저 내가 사는 곳으로만 정의될 수 없다. 할매들에게 산다는 것은 장소와 결부되어 있다. 밭을 하나하나 일구고, 곡식을 심고, 그렇게 살다가 살던 곳에 묻히는 삶과 이곳저곳 적당한 집으로 옮겨 다니는 도시의 삶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밀양을 살다>는 어딘가를 살다, 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그런 책이다. 즉 밀양이라는 한 장소에 새겨진 의미가 지워지고, 다른 의미가 다시 새겨지고를 반복하며 쌓여온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건 단순히 그 장소에 대한 추억이 많다는 것과도 다르다. 밀양 할매들에게 밀양이라는 장소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야말로 치열한 삶의 공간이었다. 할매들이 살아온 이야기에는 교과서에서만 보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빨갱이 시절”, IMF가 등장한다. 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역사적 사건으로만 접하던 것들이, 경상도 할매들의 듣도 보도 못한 사투리와 언어로 표현된다. 베트남전이란 역사는 할매에겐 논 다 잡힐 각오로 20만원을 빌려왔는데도 아들을 군대에서 빼내지 못하고 이역만리 보낼 수밖에 없던 기억이고, 일제강점기는 신랑 얼굴도 모른 채 낯선 곳에 시집을 갈 수 밖에 없던 기억이다. 거대 서사의 빈틈에서 그것을 직접 겪어낸 사람들의 삶의 기억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찬가지로 밀양의 이야기 또한 그렇다. 밀양이라는 곳은 할매들 각자에게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누구는 날 때부터 밀양 사람이지만, 누구는 흘러 흘러 들어오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도곡마을 김말해 할머니에게 밀양은 전시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 억척스럽게 아들 둘을 키워온 곳이고, 평밭마을 김사례 할머니에게는 늘그막에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내려온 제 2의 고향이며, 같은 마을 이사라 할머니에게는 다친 몸을 낫게 해준 치유의 공간이자 이웃 간의 정을 알게 해준 공간이다. 위양마을 희경 할머니에게는 시아버지와 밀양을 지키겠다고 했던 약속의 장소다. 할매들은 밀양이 가진 의미의 무게를 알기에 죽어도 밀양을 지키겠다고 9년 째 싸우고 있는 것이고 밀양의 젊은 사람들은 쉽게 몇 푼짜리 보상을 승낙한 것이다.


밀양을 지킬 수 밖에 없는 이유

밀양에 몇 번 내려갔어도 할매들에 대해서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깡 좋고 멋진 할매들, 그냥 항상 거기서 싸우던 사람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뭔가 특별한 할머니들? 물론 할매들 특별한 거 맞다. 그런데 책 한권을 다 읽고 나니 가슴이 되게 답답했다. 책으로 만난 밀양 할매들은 옛날 시절 살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 같기도 하고, 마냥 평범하기도 하고, 어렵게 어렵게 살아온 한국이란 나라의 할머니 같기도 하고 "사람은 이치에 맞게 살아야 해. 순리를 어기면 안돼"라고 할 때는 보수적인 시골 할머니의 모습도 엿보이고, 또 대통령을 임금으로 스스로를 백성이라 표현할 때는 어쩔 수 없는 옛날 할머니구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어느 한 순간 무언가를 지키겠다고 나서며 끝까지 할 거라는, 싸웠으니 후회는 없다는 그녀들에게서 어떤 투사보다 용감한 투사가 보인다.  보통의 할매들이 투사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오만 전쟁 다 봤어도 이렇지는 안했다.” “이건 마 사람을 조지는 거지. 순사들이 지랄병하는 거 보래이. 간이 바짝바짝 마른다. 못본다 카이, 못봐.밀양이 가진 의미의 소중함을 안다는 것이 도시 사람들에겐 그렇게 이해가 안 되고, 무가치한 거였나 보다.





평밭 할매들이 움막 옆에 정원을 만들어 논걸 “10억 줘도 안팔 낀데 빌리는 건 꽁짜다며 정원에서 밥을 먹으라 한 적이 있었다. 난 그걸 농담으로만 들었지, 그게 싸움의 이유라고 생각 못 했다. 근데 그 정원이 그렇게 맘에 들어서 매끼 밥을 거기서만 먹었다. 사람들은 밀양에 갔다 오면 고생했다, 그러는데 난 그 정원에서 밥을 먹고 산도 보고 그런 밀양이 주는 감응 자체를 만끽하고 돌아왔다. 책을 덮고서 생각나는 것도 그 정원이었다. 정원이랑 구불구불한 산길이랑 평밭마을에 엄청 많이 심겨져 있는 소나무들이 생각났다. 돈 때문에 와서 깽판 치는 용역이나, 보상을 받기로 한 사람들은 절대 모를 것이다. 왜 밀양을 살아온 할매들이 8년을 옷을 벗고, 구덩이를 파고, 가스통 옆에서 춥고 더운 잠을 자는 지. 밀양이 어떤 의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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