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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맑스코뮤날레 리뷰]

 

 

 

"사회적"영성이 만들어내는 공동체적 사건

정경일,「불안의 안개와 사회적 영성」

 

 

 

 

 

심아정/수유너머N회원

 

 

 

 

신자유주의가 흩뿌려놓은 불안의 안개

 

맑스 코뮤날레 첫 날. 여러 섹션들 가운데 내가 선택한 것은 <일상적 변혁으로서의 사회적 영성>이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사회적 영성세월호 이후의 삶은 가능한가』의 저자들 중 몇몇의 발표이기도 했고,  최근 몇 년 사이에 정치철학 혹은 인문학 전반이 신학을 요청해왔던 이유가 궁금했기도 해서였다.  

 

「불안의 안개와 사회적 영성」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정경일은 고통의 과잉을 경험하는 우리들의 삶을 증언이라도 하듯 갖가지 부정적인 수식어로 가득한 우리 사회의 이름에 "불안사회"라는 이름 하나를 더 얹는다. 그리고 그는 불안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로 기체성과 액체성을 동시에 보유한 "안개"를 말한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The Mist>(2007)의 장면

                                         -이 영화에 있어 불안과 두려움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는 "안개".

 

 

 

 

안개에 익숙한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기형도 <안개> 중에서-

 

 

<안개> 1985년에 쓰여진 시인 기형도의 신춘문예 등단작이다. 정경일은 30년 전에 쓰여진 이 시가 신자유주의의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공모자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을 예리하게 표현한 것이며,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으며, 신자유주의의 주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남과 경쟁해서 이기는 강자만이 홀로 살아남는 강자독생(强者獨生)과, 남이야 어찌됐든 홀로 살아나갈 방법을 꾀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두 가지 규칙 아래 작동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안개와 식구가 된" 사람들은 사회적 고통을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이 되고 말았다.

 

 

 

몇 가지 사소한 일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기형도 <안개> 중에서-

 

 

기형도의 시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1]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겁탈 당한 여직공은 "입이 막히자 그걸로 끝"이었다. 바우만에 따르면, 작동 중인 체계로부터 떨어져나간 사람은 곧 나머지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고, 그들은 종종 말 그대로 말문이 막히게 된다. 30년 전에도, 지금-여기에도 여전히 말문이 막혀버린 사람들이 살고 있다. 과거의 여직공과 현대의 잉여인간들은 사회적 의사소통의 영역에서 배제됨으로써 불평등이 무마되는 방식에 있어서 무척 닮아 있다.

 

바우만은 어떤 대상도 내재적 특성 혹은 내적 논리에 의해 쓰레기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인간의 설계에 의해 쓰레기로 규정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쓰레기가 되어버린 각각의 삶에게 "더 이상 사회가 구원해주기를 바라지 말라"는 계율을 제시한다. 쓰레기로 규정되는 순간은 누군가의 삶이 버려지는 순간이다. 상호 경쟁적인 무수한 설계 프로젝트들 한복판에서는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한다는 바우만의 지적은 신자유주의적 불안사회의 개인화된 사회적 약자들이 놓여져 있는 상황과 포개어진다.[2] 정경일은 약자의 안전에 무관심한 신자유주의를 "참사사회"로 명명하고, 신자유주의의 식구가 된 국가와 자본이 사회적 약자를 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세월호가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사회적영성을 지닌 영적 인간의 불이(不二)적 관계성

                                                   ⼀"타자와 무관한 나는 없다. 관계가 나다."

 

영적 인간은 영적 체험이 깊을수록 일상 속에서 타자를 위한 윤리적 삶을 산다. 그러한 삶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 때문이 아니라,"그렇게 살 수 밖에 없게"되는 자연스러운 발로이다. 그래서 정경일은 영적 인간의 윤리적 삶이 억지로 뽑아내는 "추출"이 아니라, 저절로 차서 흘러넘치는 "유출"이라고 말한다. 신학자 존 밀뱅크는 "기독교에서는 가장 철저하게 윤리적으로 행할 때 이 행위가 유한성을 넘어가 버린다"고 말한 바 있다.[3] 무한한 용기는 모든 덕성의 종합이지 더는 특수한 용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윤리행위가 율법을 넘어선다고 가르친다. 키에르케고르도 제안했듯이, 기독교에서 선한 것은 한 개인의 행위 안에 있다. 이 행위는 완전히 특이하며 일반화할 수 없고 단호하며 자립적이다. 여기서 유한은 무한한 것을 계시할 만큼 중대하다. 인간의 인간됨과 인격은 "인간 개별성의 한계"를 뚫고 나가기 때문이다행위가 그저 일반 원리를 예시하지 않고, 모든 인류에게 "똑같이"중요해질 때, 인간은 비로소 한 명의 구별된 사람이 된다.

 

정경일은 사회적 영성의 "사회적"이라는 형용사에 방점을 찍는다. 명사인 "영성"은 종교의 이타적 윤리를 강조하는 점에 있어서 전통적 영성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명사의 시선과 방향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형용사인 "사회적"이다.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불이(不二), 관계적 감수성으로 사회적 약자와 공존가능한 영성을 말하던 발표자는 단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타자와 무관한 나는 없다. 관계가 나다." 그의 짧은 문장은 선언을 넘어선, 타자로부터의 절대적인 명령과 같은 커다란 울림으로 내게 파고들었다.  

 

 

 

 

    

     1965년 킹목사와 함께 행진 중인 아브라함 헤셸(오른쪽에서 두번째)  세월호 인양촉구 유가족 도보행진(2015년)

 

 

 

 

개인의 내면을 응시하는 전통적 영성만으로는 고통의 복합적 원인을 이해할 수 없으며, 고통의 종식을 위해서는 사회구조적 모순을 이해하는 사회분석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발표자는 종교와 사회과학 간의 대화를 요청하면서, "사회적" 영성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어서고 일상의 모든 경험을 수행으로 삼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한 일상적 변혁으로서의 사회적 영성의 수행법으로 그가 제안한 것은 저항으로서의 기도이다. 


 

"우리에게 그 행진은 저항이며 기도였습니다.

물론 다리는 입술이 아니고 걷는 것은 무릎 꿇는 것이 아니지요.

하지만 우리의 다리가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말 없이도 우리의 행진은 예배였습니다.

나는 내 다리가 기도하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킹 목사와 함께 흑인 민권운동에 참여했던 랍비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의 고백

(1965 321일 미국 앨러바마)-

 

 

 

"최대"가 아닌 "최소"의 길-신자유주의적 삶을 꿈꾸는 공동체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에서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임을 강조하면서,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의 주요한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이 감성적 인간의 활동으로서,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오직 객체의 혹은 관조의 형식 아래에서만 파악되어 왔음을 비판했다. 인간 본질의 허구성을 간파했던 맑스는 인간의 본질이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ensemble)"이라고까지 역설했다.

 

맑스는 어느 누구보다도 변화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맑스의 마지막 테제(11)는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로 끝난다.[4] 이와 같은 맑스의 관점은 "종교적 심성"이라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회적 산물이라는 점에서, 발표자가 언급한 사회적 영성의 수행법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양자 간에 다른 점이 있다면, 맑스는 자신이 구축한 이론에 근거하여 세계의 변혁을 믿었다면,"관계가 곧 나"인 영적 인간은 어떠한"근거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저없이 불안 속으로 뛰어든다는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정경일은 국가를 한 번에 바꾸는 정치적 변혁은 어려워도 생활공동체를 바꾸는 문화적 변혁은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삶을 꿈꾸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우리 시대의 전복이며, 그러한 상상력이 담긴 수행적 사례로서 "작은 교회"를 예로 든 바 있다. 그는 "최대"가 아닌 "최소"의 길을 제안하면서, "작다는 말은 종래와 같은 기형적(자본화된) 성장을 거부하는 것이자 좀 더 다양해지는 것(카리스마 공동체)이고 역사적 뿌리에 충실한 것(언더그라운드 교회)이며 종국에는 치열하게 대안적 생산양식을 창출하는 것을 함의한다"고 "작음"의 의미를 규정한다.[5] 신자유주의 하에서 다른 삶이 가능한지를 모색했던 맑스 코뮤날레의 주제는 세월호 이후에도 삶은 가능한가를 물으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대안적 생산양식을 모색하는 신학자들의 고민에 덧대어져 우리에게 어떤 ()가능한 명령을 던진다.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안전과 안락의 의자를 포기하고, 탐욕과 경쟁의 항로로부터 "뛰어내리라"고 말이다.

 

 

"뛰어내려라. 그러면 너를 받아줄 그물이 나타날 것이다(?!)"

 

"뛰어내려라. 그러면 너를 받아줄 그물이 나타날 것이다." 나는 세월호 사건을 되돌아보며 정경일이 쓴「애도, 기억, 저항: 세월호"안의" 민중신학」이라는 글에서, 선가(禪家)를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지었던  그의 마지막 문장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질의응답을 통해 그때 그에게 "그물"이라는 것의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물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한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 구명조끼도 없이 컴컴한 망망대해로 뛰어내린 우리를 받아줄 그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라는 기대 자체에 낯선 저항감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정체불명의 "그물"에 대한 발표자의 답변은 아래와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라는 신자유주의적인 명령을 거슬러 뛰어내리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뛰어내리면 누가 우리를 받아줄 것인가에 대한 "믿음의 부재"때문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커다란 배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라 대안적인 삶 혹은 다른 세계를 꿈꾸는 자들과 함께인 것이고, 거기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그물이 되어주는 원리, 즉 서로를 돌보지 말라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으로부터 등을 돌려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원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신자유주의에서 돌아서는 것 자체가 이미 "공동체적 사건"이 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답변을 들은 후에 "믿음으로의 도약"이라는 그의 표현에서 "믿음"이 의미하는 바 혹은 그것의 벡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때의 믿음이라는 것은 신을 향해 도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가능하지만 가능성을 사는 사람들, 즉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고 그물이 되어줄 수 있는 대안적인 삶을 살아내며 서로의 삶을 돌보는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 때 비로소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1] 바우만의 책에서 말하는 쓰레기란 잉여의 인간들을 지칭한다.‘잉여란 여분, 불필요함, 무용함을 의미한다. 유용성과 필수불가결함의 기준을 설정하는 필요와 유용성이 무엇이든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당신 없이도 잘 할 수 있고, 당신이 없으면 더 잘 할 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새물결, 2008) p.32

[2] 위의 책,p.50,84,163.

[3] 존 밀뱅크,「이중의 영광, 또는 패러독스 대 변증법:슬라보예 지젝에게 다소 반대하며」,『예수는 괴물이다』(마티, 2013) p.257~258

[4]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1)(박종철출판사,2010)p.185~189.

[5] 『사회적 영성-세월호 이후에도은 가능한가』(현암사,2015)p.14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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