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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맑스코뮤날레 리뷰]


흰머리 휘날리며

(여성주의와 협동주의의 만남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이미라/수유너머N회원

 

 

 

 

 

 

여성주의는 잘 모르지만 의사 친구는 좋아서

 

아는 의사 한 명 만들어 볼까, 하는 개인적 욕심으로 517일 맑스코뮤날레 메인세션 다섯 번째로 열린 살림의원 사례 발표장을 찾았다. 전날 받은 자료집에 따르면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나이 들면서 두려워하는 질병 중 가장 큰 것이 치매이고, 살림의원에선 치매맞이 학교 수업을 꾸려갈 계획이라고 한다. 이 정보 역시 50대 비혼여성인 나에게 거부하기 힘든 유혹으로 작용했다. 

 

솔직히 살림의원 앞에 붙어 있는 여성주의니 협동주의니 하는 말들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용어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발표장으로 발길을 옮겼던 다른 이유는 살림의원이 은평구에 있기 때문이다. 내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다. 아무리 좋은 의사 친구가 있더라도 너무 멀리 있으면 자주 이용하기 어려울 텐데, 살림의원은 내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남은 조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관상이다. 나는 느낌을 아주 중요시 하는 사람이다. 직접 만나보고 느낌이 괜찮으면 이제 나의 주치의 한 명이 생기는 거야, 그러면 나의 노후는 좀더 건강해지겠지라고 기대를 품으며 맑스꼬뮤날레 3일차가 열리는 성공회대를 향해 달렸다. 흰머리를 휘날리면서!

 

여성주의자가 와서 행복한 구청장

 

의료협동조합은 지역주민들이 각자의 건강, 의료, 생활과 관련된 문제를 이웃과 함께 해결하기 위해 만든 주민 자치 모임이다. 의료 기관을 포함한 건강과 관련된 시설의 설립자금 마련에서부터 그 운영까지, 조합원 주민들 하나하나의 땀과 피가 베어있다. 살림의원도 이러한 협동조합의 원칙에 따라 설립되고 운영되는 주민단체다.



출처: 한겨레(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49489.html)


나는 여성주의자예요라는 첫 마디로 발표가 시작되었다. 발표자 추혜인은 살림의원 의사다. 발표자는 2009년의 준비과정부터 20128월 개원과 홍보과정, 이후의 운영과 진료 과정을 PPT로 보여주면서, 알려지지 않은 그들만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소개해 주었다.

 

살림의원 개원식 때 은평구청장이 와서 은평구에 여성주의자가 와서 행복하다는 축사를 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살림의원의 준비활동과 개원과정이 지역에 뿌리내리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병원 공간을 어떻게 꾸밀지에 관한 조합원 토론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부분에선 객석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젊고 건강한 조합원들이 병원 안에 인공암벽을 설치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래야 그들도 병원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제안의 이유였다. 물론 이 제안은 현명한조합원들에 의해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무한 상상을 통해 만들어가는 살림의원 조합원들의 실험적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의사로서의 추혜인은 처음에 은밀한 왕따(?) 취급을 받은 듯 하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 의사여서 처음에는 출산과 소아 질병 등 진료를 꺼리는 과목이 있었고, 진료를 하더라도 환자가 본인의 상태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지역 의사라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면서 이별의 내밀한 사연까지 털어놓는 레즈비언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약자의 편에서 세상을 보는 것

 

발표자는 여성주의 의료협동조합의 모토를 약자의 편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제시하면서, 이 모토가 갖는 구체적 의미들을 소개했다. 그들 중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다음 두 가지다. 혼자서는 건강해 질 수 없고 서로 돌보는 공동체 안에서만 건강할 수 있기 때문에 계속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것, 조합원에서 시작해서 조합원에 도달하는 공동체를 지향할 것. 전자는 살림의원이 호혜적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삶을 지향하고 있음을, 후자는 살림의원의 운영과 활동의 주체는 항상 조합원이어야 함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발표를 들으면서 계속 의문이 들었다. 사례 발표의 제목이 여성주의와 협동주의의 만남인데 둘이 만나서 도대체 어떤 화학 작용이 일어난 것인지가 궁금했다. 약자의 편, 돌봄, 공동체, 주체로서의 조합원 등은 여성주의와 만나기 전에 이미 의료협동조합운동이 협동주의라는 이름으로 지향하고 실천했던 것이지 않은가. 혹시 발표자는 약자의 편에서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삶의 과정 자체를 여성주의의 실현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여성주의에 대한 별도의 설명 없이 이야기를 진행시켜 간 것인가. 여성주의와의 만남이 협동주의 운동에 어떤 다름을 만들어 놓았는지는 계속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캐나다와 일본의 의료협동조합이 말해주는 것

 

토론자와 청중들로부터 받은 질문은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여성주의 의료협동조합 운동은 담론만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 의료 복지 수준이라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 아닌가. 둘째, 살림의원의 규모가 커지면서 관료제화 같은 문제가 생길 텐데 이에 대한 해결 대안은 있는가. 셋째, 원격진료의 일반화가 미칠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이론가가 아니라 실천가인데라면서 시작된 발표자의 답변은 핵심을 찌르는 명쾌한 것이었다.  첫째 질문에 대해 발표자는 캐나다의 사례를 들어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의료협동조합운동이 사회적 상황의 영향을 받는 것은 맞지만, 운동이 그 영향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캐나다는 의료복지 수준도 높고 의료의 공공성 실현 정도도 높은데도, 그 곳의 의료협동운동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둘째 질문에 대해 발표자는 일본의 미나미의료생협의 사례를 들어 크기에 따른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 규모가 커진다고 반드시 관료제화, 경직화, 형식적 인간관계의 만연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나미의료생협은 조합원 7만 명, 8개의 병원, 80개의 요양시설 등을 갖춘 거대한 조직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이 빛나는 마을 만들기라는 모토 아래 서로 직접 연결 맺는 관계를 창출하고 있다. 세 번째 질문에 대해 발표자는 직접 대면진료가 효과가 크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면 된다고 답변했다.

 

다른 삶을 만들기 위한 최선의 선택

 

나도 좋은 사회에 관한 나만의 그림을 갖고 있다. 내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아픈 사람들이다. 아플 때 돈 걱정 안하고 편안하게 병원에 갈 수 있는 그런 사회에 살고 싶다. 그렇지 못한 지금의 현실 구조를 혁명적으로 바꾸는 것이 힘들다면, 어쩌면 의료협동조합이 해볼 수 있는 최대한의 실험이자 최선의 선택이지 않을까. 또한 일상을 조금씩 바꿔나간다는 일상의 혁명이란 것이 바로 살림의원이 하고 있는 일이지 않을까. 그래서 살림의원 사례가 "맑스주의와 일상의 변혁"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맑스꼬뮤날레에 초청된 것 아닐까.

 

여성주의와 관련한 궁금증들은 앞으로 내 사유의 몫으로 남겨둔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웃음과 따뜻함을 온 몸으로 뿜어내는 의사, 자부심 넘치는 천오백 명의 조합원들, HIV 감염자들도 본인의 상태를 숨김없이 얘기할 수 있는 진료 분위기, 50대를 위한 무료 근력 운동 수업인 흰머리 휘날리며’, 이런 것들이 이미 나를 살림의원으로 끌어당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흰머리 휘날리며 살림의원으로 달려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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