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_철학.예술 :: 철학과 예술 분야의 리뷰입니다!



빛과 법

- 송승언, 『철과 오크』(문학과 지성사, 2015.2.)

 




이 종 현 / 수유너머N 회원







비스마르크, 오크, 참나무

지난 2월에 나온 송승언의 시집 제목은 여러 가지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하나는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를 불러일으킨다. 다른 하나는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종족인 오크(Ork)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참나무(oak)를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다. 이미지들을 나열해 보자면, 비정할 만큼 강력한 통치, 그리고 강력한 규율로 어둠의 왕국을 수립하려는 오크들, 그리고 생뚱맞게도 참나무로 이어진다. 이렇게 시집의 제목은 무언가로 이어질 듯 하다가 그 의미의 연쇄를 깨뜨려 버린다. 그러나 서로 붙지 않는 이미지들은 시집의 여기 저기에서 반복되어 서로가 서로를 비춘다. 그래서 의미의 논리적 연쇄는 없지만 끊긴 부분들을 나름대로 채워볼 여지는 있다.

 

제목의 움직임을 따라 시집을 읽은 감상에도 빛과 법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을 붙여본다. 시인은 빛의 문제가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담장을 넘지 못하고」)라고 말한다. 그의 고백대로 시집 전체에 걸쳐 이 나온다. , 반복되는 말로는 법 앞에서”, “권리”, “합의점”, “유형지”, “명령등 법과 관련된 것들이 있다. ‘철과 오크라는 낯선 말의 묶음이 제목인 시집을 죽 읽다 보면 빛과 법이라는 역시 낯선 말의 쌍이 태어난다. 그런데 빛과 법은 어떻게 이란성 쌍둥이처럼 함께 태어날 수 있었을까? 시 「법 앞에서」를 읽어보자.


 

법 앞에서

 

그가 문을 열고 나오자, 환자들의 긴 행렬이 보였다 죽을 때까지

돌봐도 다 돌보지 못할 만큼 많았다

 

때로 아픔은 신비로웠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사람들이 많았다 환자들은

높은 언덕을 넘어 그의 병원으로 오고 있었다

 

아침이면 널린 신비를 걷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

붕대를 풀자 벌어진 살점 속으로

빛이 섞여 들었다

 

흔적이 남을 겁니다 누가 파헤친 것처럼

어지러운 화단에 꽃이 없었고

 

미처 예약을 못 한 환자들이 화단에 삼삼오오 모여들며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의사인 것으로 보이는 그는 병원의 문을 열고 나온다. 그의 앞에는 환자들의 긴 행렬이 있다. ‘죽을 때까지라는 말은 매우 막막하다. 그런데 그는 아픔이 신비롭다고 말한다. 환자들이 그에게로 가져오는 아픔이 왜 신비로운 것일까? 이에 대한 설명은 바로 나오지 않는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사람들, 언덕을 넘어 풀린 붕대처럼 길게 행렬을 이루는 사람들, 아침이 되어 문을 열고 나가보면 붕대처럼 늘어선 신비로운 아픔들. 감겨있는 붕대가 환기하는 미궁의 이미지, 그리고 그것에 달라붙는 신비는 최종 목적지인 병원에 들어가지도 못하면서 주위를 맴돌고 있다.

 

의사는 아침이면 신비, 즉 아픔을 감싸고 있는 붕대를 걷고자 한다. 아픔의 속성은 무엇인지, 아픔은 왜 생기는지, 아픔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답들은 알 수 없다. ‘아픔-신비들을 둘러싸고 있는 붕대를 걷어내면 아픔이 지닌 신비의 비밀을 풀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붕대를 걷어내는 순간 살점에는 빛이 스며든다. 빨갛게 벌어진 상처 속에 빛이 들어가면 상처는 더욱 빨갛게 보일 것이다. 신비의 영역에 비추어진 빛은 그 동안 감추어져 왔던 것을 밝힐 것이다. 비록 붕대의 끝과 환자들의 끝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아픔의 속살은 스스로를 빨갛게 드러내고 빛을 통한 소독과 치료를 기대할 수 있다.

 


장미를 앗아간 빛

아픔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의사의 말처럼 흔적이 남는다. 그런데 흔적의 양상이 독특하다. 흔적이 남는다는 것은 누가 지나간 자리에 그가 남겨 놓은 것이 보임을 뜻한다. 그는 자신의 소지품을 깜박 놓고 갈 수도 있고, 자신의 발자국을 남겨놓을 수도 있다. 아픔은 상처를 떠나면서 그 병력(病歷)을 남겨 놓는다. 그런데 여기서 흔적은 원래 있어야 할 것이 사라졌음을 알려준다. 그 흔적은 무언가 남겨진 것이 아니라, 무언가 사라졌음을 대놓고 드러낸다. 병원의 화단은 화단이기 위해서 필요한 꽃이 사라졌음을 호소한다. 의사는 상처가 아물어도 남게 될 치료의 흔적을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화단은 훼손된 자신의 몸을 보여주고 있다. 의사가 예언한 흔적이 결핍을 메운 봉합의 결과를 보여준다면, 화단의 흔적은 결핍을 메우면서 동시에 무엇을 상실하는지 보여준다. 빛은 이렇게 아픔의 신비들을 거두어 상처를 낫게 하지만, 무언가 중요한 것을 앗아가 아픔이 있어야 할 자리에 어정쩡한 흉터만 남겨 놓는다.

 

오늘 예약 리스트에 미처 이름을 올리지 못한 환자들은 끝없이 풀린 붕대처럼 계속 넘어온다. 그리고 꽃들이 사라진 화단의 자리에 모여든다. 살점 속으로 들어온 빛은 흉터라는 흔적을 남기면서, 동시에 꽃과 같은 아픔의 신비를 뽑아가 버렸다. 그러자 오늘 치료받을 자격 없는환자들이 모여들어 그늘을 만들고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신비가 상실된 자리에 들어오는 것은 또 다른 아픔들이다. 아직 치료받지 못한 것들은 꽃들이 뽑힌 자리를 가려주며 빛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붕대를 함부로 걷을 수 없게 만든다.

 

무한한 아픔이 지니는 신비와 그것을 치료하고 밝혀내려는 시도, 그리고 그것의 실패를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시는 도대체 법과 무슨 상관이길래 법 앞에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을까? 이 모든 상황이 병원의 문 앞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제목의 은 병원을 가리키고 있고, 그 법의 작용이 빛의 치료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제목이 이라는 이유로 빛과 법을 간단히 이어 붙이는 것은 순진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순진함은 다른 시들에서 변주된다. 이 시에서 도출된 -이라는 정식은 빛과 법 사이의 간극을 유지하면서 다른 시에서 발전된다. 그 시는 바로 시집의 표제작인 「철과 오크」다.


 

장작불과 옷가지

시 「법 앞에서」는 붕대의 하얀색, 상처와 꽃의 붉은 색을 내놓는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환자들의 수를 강조한다. 시 「철과 오크」도 마찬가지다. 엄청나게 많은 나무들, 새들, 잎들, 아이들, 나무꾼들, 도끼질이 줄지어 나온다. 다만 이 시는 병원 앞에서 나타났던 밝은 색들을 밀어내고 어두운 녹색과 갈색으로 문제를 더 깊이 가져간다.  다음은 시 「철과 오크」의 전문이다.


 

철과 오크

 

숲의 나무보다 많은 새들이 있고 부리에 침묵을 물고 있고

그보다 많은 잎들이 새를 가리고 있고

 

수십 명의 아이들이 지거나 이기지 않고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숲을 통과하고 있고

끝도 모른 채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수십 명의 나무꾼들은 수백 번의 도끼질을 할 수 있고 수천 그루 나무를 수만 더미 장작으로 만들 수 있고

빛은 영원하다는 듯이 장작을 태울 수 있고

장작은 열 개비가 적당하고 그 불이면 영원도 밝힐 수 있고

 

아이들이 영원을 지나가고 있고 별들이 치찰음을 내고 있고

밤과 낮은 서로에게 이기지도 지지도 못하고 있고

불 앞에서 나무꾼들은 수십 개의 그림자를 벗으며 농담을 하고 있고

인간의 맛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불그림자가 불의 주변을 배회하며 불그림자를 만들고 있고

새들은 여전히 침묵을 부리에 물고 있고

 

나무 위에서 열쇠들이 쏟아지고 있다

나부라진 옷가지들이 발자국을 가리고 있고

나무꾼들은 횃불을 나눠 들고 더 어두운 곳으로 움직이고 있고

잎이 풍경을 가리며 무성해지고 있고

 


시집의 해설을 쓴 강동호의 말처럼, 이 시는 리듬으로 충만하다. 반복되는 말 ‘~있고는 리듬을 만들어 낼 뿐 아니라, 끝이 없던 붕대와 환자들처럼, 그리고 수많은 새들, 나무들, 나무꾼들처럼 무언가 계속 있으리라는 것을 예견한다. 이렇게 많음을 시적 배경으로 제시하는 두 편의 시가 갈라지는 지점은 바로 빛이 생겨나는 방식에 있다. 시 「법 앞에서」에서는 빛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상처에 스며들지만, 이 시에서는 나무와 잎사귀로 새들을 가리고, 나무를 베어서 꾸역꾸역 빛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빛의 진정한 희생자는 나무가 아니다. 오크들처럼 일사분란하게 작업을 진행하는 나무꾼들과 더불어 눈에 띄는 것은 같은 색의 옷을 입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 흔적만으로 알 수 있다. 어두운 숲 한 가운데 장작불이 타오르고, 아이들은 발자국을 남기면서 숲을 지나간다. 그때, 별들도 치찰음, 즉 이빨 사이로 ’, ‘’, ‘소리를 내며 음산한 분위기를 만든다. 여전히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장작불 곁에서 인간의 맛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나무꾼들, 아이들의 것으로 보이는 나부라진 옷가지들을 염두에 두면 아이들이 희생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런 흔적들 역시 아이들이 지나갔음을 의미하지만, 결국에는 그들이 없어졌음을 뜻한다. 앞의 시에서 빛이 장미꽃들을 앗아간 흔적을 남긴 것처럼 말이다.

 

장작불의 빛이 아이들을 삼키고 난 뒤에, 열쇠들이 쏟아진다. 이 시에서 철의 이미지를 지닌 것은 두 가지다. 바로 나무꾼들이 하는 도끼질과 이 열쇠. 도끼질의 결과로 나무가 베어졌고, 아이들은 그 나무로 밝힌 빛에 희생되었고, 그 결과 열쇠가 하늘에서 쏟아진다. 도끼의 작업은 열쇠라는 철제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열쇠는 마치 시의 답답한 상황을 타개해 줄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모든 것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끝없는 붕대의 행렬처럼, 길게 이어진 옷가지들이 발자국을 가리며 늘어져 있고, 잎들은 풍경을 가려 나무꾼들을 보호해 준다. 덕분에 나무꾼들이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갈수록 그들의 불빛은 더욱 밝게 타오를 것이다.

 


출구 없음

이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과 관련된 말이 시집의 주요 모티프인데도 둘의 관계는 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 것일까? 그럼에도 시집을 다 읽고 나면, 빛과 법, 이 두 단어만 머릿속에 남는다. 심지어 이라는 말을 제목에서 명시하는 첫 번째 시는 철과 오크라는 전혀 다른 제목의 시와 겹쳐 읽힌다. 두 번째 시는 이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지만, 왠지 첫 번째 시를 참고문헌으로 삼게 한다. 첫 번째 시가 제목에서 드러내듯, 치료의 빛과 법을 같은 것이라고 제시한다면 그 -은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결핍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 그리고 첫 번째 시에서 확립된 -의 쌍은 두 번째 시의 침묵하는 숲 한 가운데서 아이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하필 법은 빛과 연결될까? 한번 공표되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은 빛과 무엇을 공유하는 것일까? 빛도 한번 비추어지면 순식간에 지구를 몇 바퀴라도 돌아 모든 것에 이르려 하기 때문일까?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명쾌하게 지시하는 법, 그리고 어두운 곳을 들추어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는 빛.

 

이 둘은 형태 없던 것에 형상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지만 송승언의 시집에서만큼은 전혀 그렇지 못한 듯 하다. -법의 작용은 나무꾼들이 침묵을 은근히 강요하면서까지 만들어 낸 하늘에서 내려온 열쇠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 것도 열지도, 낳지도 못한다. -법은 화단에서 장미꽃을 숨기고, 아이들을 잡아먹을 뿐이다. 또 다른 시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하는 빛과 법의 명징함을 역설적으로 말한다. “아무것도 없는 명징한 공원이었다”(「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빛이 공원의 형태를 비추어 눈에 들어오고, 법이 빈터를 공원이라고 인정하였지만 그 공원은 송승언에게 ()’원일 뿐이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사물들이 너무나도 명징하게 보이지만 왜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시집의 마지막 시는 명석판명의 해변에서 겪는 시인의 서글픈 상황을 보여준다.


 

모든 게 흰빛으로 망각되는 해변에서

[…]

이곳에 나를 버린 게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탈출을

꿈꾸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

 

멈추면

 

완성되지 못하는 침묵이 굴속에서 울었다

                                  

                               - 「유형지에서부분

 


빛과 법의 쌍은 시집의 마지막 시에서 다시 한 번 변주된다. 화자는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형지에 보내졌다. 그런데 그 유형지는 모든 게 흰빛으로 망각되는 해변”, 즉 빛만이 머릿속에 남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지는 곳이다. 유형지는 법이 정한 존재의 장소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이 어떻게 유형지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조차 흰빛 때문에 망각한다. 흰빛의 법이 그렇게 있으라 하니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망각된 상태에서 출구에 대해 생각할 것도, 꿈꿀 것도 박탈당한 그는 아무것도 없는 명징한해변을 걸을 뿐이다. 그런데 무의미한 걷기가 이따금 멈출 때면, 해변 어딘가에 있을 굴속에서는 침묵이 운다. 침묵이 운다는 것은 모순적인 말이지만, 그 침묵이 완성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울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철과 오크의 숲 속에서 새들은 부리에 침묵을 가까스로 물고 있었지만, 흰빛의 유형지에 내던져진 시인은 결코 침묵을 완수하지 못한 채 울음을 흘린다. 시인은 명징한 빛과 법이 요구하는 침묵, 완벽한 논리와 근거가 요구하는 침묵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무언가 결핍된 흔적에 대해 울고 있다. 이렇게 빛과 법의 덕목인 침묵을 실천할 줄 모르는 시인은 영원히 유형지에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마 빛이 들지 않는 굴 속에서 이따금 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출구를 찾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시인은 모든 것을 망각하게 하는 흰빛의 법을 마주한 반응으로서 이 시집을 쓴 것은 아닐까 싶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3 [바깥의 문학] 재현의 정치성에서 상상의 정치성으로― 김시종과 김혜순의 시 수유너머웹진 2019.02.24 223
142 [인문학리뷰] 『아픔이 길이 되려면』,『우리는 왜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위험한 정치인』 수유너머웹진 2019.02.24 195
141 [과학기술리뷰] 과학잡지 『에피』 6권 리뷰 - ‘필드 사이언스’와 ‘수능 리뷰’를 중심으로 수유너머웹진 2019.02.24 218
140 [바깥의 문학] 주소 없는 편지― 2018년 신인들의 시적 감응에 대하여 수유너머웹진 2019.01.29 134
139 [시읽는 목요일] 처음 읽는 시집- 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수유너머웹진 2019.01.22 93
138 레비나스&화이트헤드_<타인의 얼굴> 5,6,7장 후기 수유너머웹진 2019.01.21 153
137 <삶을 위한 철학 수업>의 "삶과 자유", "만남과 자유" 후기 수유너머웹진 2019.01.21 146
136 장자세미나_잡편 33.천하편 - 조정현 수유너머웹진 2019.01.16 102
135 장자세미나_인간세 편 - 조정현 수유너머웹진 2019.01.16 166
134 [바깥의 문학] 염려하는 주체와 언어의 형식―김복희와 안태운의 시 수유너머웹진 2019.01.06 203
133 [시읽는 목요일] 처음 읽는 시집- 김혜순, <또 다른 별에서> 수유너머웹진 2019.01.03 104
132 [책리뷰] 공동의 슬픔 -바오 닌, 전쟁의 슬픔을 읽고 file 수유너머104 2017.12.21 1382
131 [영화리뷰] 80년대 오우삼의 영화들은 왜 그렇게 비장했나? (부제:오빠들 왜 그렜어요?) [2] file 마빈 2017.11.25 210
130 [전시리뷰] 수행의 간격- 통상적인 신체와 장소의 전복 [5] file 큰콩쥐 2017.11.12 661
129 [탐방기] 공간탐방기 - 서문 file 장한길 2017.11.06 442
128 [강연리뷰]그들의 1960년대, 대안적 앎의 공간으로서의 전공투2 [7] file 큰콩쥐 2017.10.26 573
127 [강연리뷰]그들의 1960년대, 대안적 앎의 공간으로서의 전공투1 [2] file 큰콩쥐 2017.10.25 871
126 [탐방기] 냉전의 인질로 붙들린 사람들의 이야기2 file 큰콩쥐 2017.10.13 401
125 [탐방기] 냉전의 인질로 붙들린 사람들의 이야기1 [5] file 큰콩쥐 2017.09.28 1394
124 [책리뷰]바흐친에 접근하는 세 가지 키워드 [2] file Edie 2017.09.13 1620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