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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영화 파해치기]


끝나지 않을 매국賣國의 문제

-암살이 제기하는 친일에 관한 새로운 관점에 대하여-


*이 글에는 암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전병석



 

How?; 암살은 어떻게 말하는가


친일파를 처단하라. 그들은 민족의 악적이다.’ 이러한 구호들이 지금-여기의 우리들에게 어떠한 울림을 주는 걸까?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친일파 처단에 대한 구호들은 식상하고 조금은 진부하기까지 하다. 식민지 시대는 오늘날의 우리들이 체감할 수 없기에 흐릿해져가는 역사적 사건들의 배경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일파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이기 때문에 그들은 심판되어야 할 악이라는 통념은 이미 형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영화 암살은 어떠한가? 이 글에서는 이 영화가 친일파에 대한 식상한 구호를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다시 불러내어 친일파들은 죽일 놈들이라는 통념들을 강화시키는지, 아니면 오히려 그러한 통념을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 속에서 결국 암살에 성공한다. 암살 작전의 성공은 매국노를 향한 응보의 처벌이기도 하다. 암살의 마지막 장면이 특히 그렇다. 염석진(이정재)이 안옥윤(전지현)에게 암살당하면서 쓰러질 때, 탁 트인 벌판에서 펄럭이는 백포白布들의 이미지는 그래서 인상적이다. 만일 펄럭이는 백포의 이미지가 인상적이라는 말에 공감한다면, 굳이 매국에 대한 책임은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즉 굳이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보지 않아도 그 맛을 알 수 있듯이, 나라를 판 그들에게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는 당위의 말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또한 암살이 다루고 있는 소재가 뻔하다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암살에 대해 말할 때, 암살이라는 사건을 구성하는 서사의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이 과정은 매국에 대해 암살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진부한 배신의 위장; 어떻게 저를 의심할 수 있습니까


암살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되갚는 피의 보복을 바탕으로 발생한다. 암살에는 이러한 보복의 논리에 충실한 대변자가 등장한다. 그 인물은 바로 상해 임시정부 경무부대장이었다가 일본 제국의 순사가 되는 염석진이다. 그가 애초부터 민족의 죄인은 아니었다. 1911년의 그는 식민지 조선의 제 2대 총독인 데라우치를 향한 폭탄테러를 기도하기도 했으며, 안옥윤과 속사포(조진웅), 그리고 최덕문(황덕삼)을 미라보여관으로 보내 김원봉(조승우)이 암살단을 조직하는데 크게 일조했다. 한편으로 그는 상해 정부의 정보를 일제 기관에 넘기고,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을 고용해 암살단을 처단하려고도 한다. 이와 같이 그가 보여주는 양가적인 행동들은 작품이 가진 중요한 서사의 중심축이다. 그는 ‘A 아니면 B’라는 극단의 선택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작품에서 춤을 춘다.


때문에 민족의 대변자들은 매국노 염석진을 처단했다. 여기서는 이것이 옳다고 일단 전제하자.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는 미묘한 지점이 암살에 존재한다. 그것은 그의 모습이 조직에 대한 배신으로 비춰진다는 점이다. 마치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자신의 소속 집단을 바꾸는 듯 보이는 것은 여타의 조폭 장르의 영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적과 아군의 명백한 구분만이 절대 진리인 그 세계에는 배신의 원칙만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의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것은 자신이 어느 조직에 몸담느냐다. ‘ 조직을 위해 살 것이냐?’ 아니면 조직을 떠나 너는 죽을 것이냐?’조직에 대한 강요된 이분법적인 선택은 매국노에 대한 문제를 흩트려놓는다. 염석진이 김구에게 어떻게 저를 의심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장면이 이질적이었다면 바로 이 때문이다. 의심을 받는 순간 옷을 갈아입는다. 이것이 암살에서 염석진이 보여주는 배신의 위장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위장은 암살을 감싸고 있어 친일의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 시킨다.


그래서 배신이라는 키워드로만 암살을 접근하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작품 속에는 이름 없는 이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즉 조국의 해방을 위해 단 하나의 목숨을 붉은 피로 산화 시킨 어느 누군가들에게, 역사로부터 이름마저도 잊힌 그들에게 해방운동과 친일이라는 이분법적 접근은 진실하지 않다. 작품 속에는 염석진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름 없는 자들이 포진해 있다. 그들의 이름 없음은 역사로부터 그들이 이탈했기 때문에 남길 이름이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A 아니면 B’라는 배신의 원칙 또한 넘어서기 때문에 그들을 배신, 보복 그리고 선택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 그들 때문에 암살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었다.’

 




내밀한 욕망의 고백; 매국노 몇 명 죽인다고 독립이 되나


암살에는 이름 없는 자들 즉 하와이 피스톨, 그의 그림자 영감(오달수), 속사포가 등장한다. 이러한 인물들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은 작품 속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작품 속에서의 그들은 역사로부터 호명 받지 못한 이들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름 없는 자들은 작품 속에 처음부터 등장할 때 애국이나 독립 같은 큰 뜻을 세우지는 않는다. 일상이나 생존과 싸우는 그들에게 독립운동은 다음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독립운동도 배가 불러야 하는 거지.’ 이러한 진솔한 고백은 우리에게 매국에 관한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가령 매국노에 대해 떨어져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매국노로서 말하게 된다고나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하와이 피스톨에 주목해야 한다. -하정우는 정말 멋지다.- 그는 매국노 몇 명 죽인다고 조선이 일제로부터 독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영감과 함께 상하이에서 살인 청부업을 생업으로 삼던 그가 점차 변해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피스톨이 겨누는 방향이 달라졌다. 그 까닭은 그가 미라보 여관에서 안옥균과의 만남으로 인해 그녀에게 휘말렸기 때문일 테다. 이러한 휘말림을 흔히 사랑이라고 부른다. 아무튼 그의 피스톨은 조선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안옥윤을 살리기 위해 일제를 겨눈다. 즉 그의 피스톨이 거창한 대의나 겉만 번지르르한 명분에 작동하지 않은 셈이다. 이로 인해 개인적인 욕망, 그 자체로도 얼마든지 대의적일 수가 있음을 그의 피스톨이 증명한다.


하와이 피스톨은 한결같다. 그에게는 ‘A 아니면 B’라는 선택의 문제가 작동하지 않는다. 지극히 그가 가진 욕망은 개인적이기 때문에 안옥윤이 그의 삶에 들어온 순간부터 자연스레 암살 작전에 동참할 수 있었다. 단 그에게는 개인적인 욕망만이 작동했다. 이것은 자신의 외부세계가 달라지는 상황과 발맞춘 것이다. 즉 그의 피스톨이 현상금 걸린 사람을 향할 때 그는 살인청부업자가 되고, 그의 피스톨이 일제의 순사들을 향할 때는 안옥윤을 사랑하는 남자가 될 뿐이다. 이것을 개인적인 욕망과 세계의 관계가 달라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그는 한결같이 자신의 욕망으로 세계를 대면했다. 때문에 그는 일제 순사 염석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내가 너처럼 창녀는 아니잖아?’





문제는 배신이 아니다; ‘삼천불, 우리 잊으면 안 돼.’


매국의 문제는 단순히 배신자에 대한 처단이 아니다. 즉 배신자를 향한 단죄라는 소재는 이제 진부하다. 그러나 욕망의 변주라는 키워드로 암살을 바라본다면 그 영화가 진부하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단 식민지라는 시대의 자장 속에서 어떻게 그들이 솔직한 욕망의 변주를 보여주는가를 주목한다면 말이다. 조국 해방의 문제를 욕망의 문제로 볼 때, 그림자 영감이 안옥윤을 향해 던진 마지막 말은 이 작품의 진정한 결말이다. “삼천불, 우리 잊으면 안 돼.” 영감은 죽음을 대면하기 전까지 도련님을 보필하고자 했으며, 안옥윤을 삼천불로 바라본다. 그럼에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 변주의 결과가 일제로부터 조선의 해방이라는 중심점에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결박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제 친일파를 처단하는 문제로 돌아오자. 매국의 문제를 배신의 틀로 바라볼 경우 그것은 나와 무관한 세계의 일이 된다. 배신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우리는 모두 배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신의 원리는 언제나 풍경이다. 그래서 여기서의 문제는 식민지의 일들을 풍경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이다. 그렇다면 욕망의 틀로서 친일파를 처단해야 한다고 한다면 어떨까? 개인적인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을 바라본다면, 식민지라는 시대를 둘러싼 풍경은 사라진다. 이 때 비로소 우리는 매국에 대해 진실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금-여기라는 세계 속에서 매국노처럼 살아가는 그 누군가를 우리의 눈이 찾아낼 것이다. 그러므로 매국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배신이 아니다. 욕망이야 말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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