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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론의 개념들 02]

 

영화가 이데올로기를 살아내는 방식들

 

- -루이 코몰리와 장 나르보니의 <영화/이데올로기/비평>(1969) -

 

 

 

 

이 종 현 / 수유너머N 회원

 

 

 

 

영화는 순수한 것일까?

 

앙드레 바쟁은 영화에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화면에 깊이를 부여하고 그 깊이로부터 다양한 의미를 길어낼 것을 주문했다. 헐리우드 고전영화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설명적 몽타주, 즉 어떤 장면을 하나하나 쪼개서 설명해 주는 것을 바쟁은 가장 싫어했다. 어떤 방에 들어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계단에 오르고, 문손잡이를 잡고 돌려, 방안으로 들어가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거나 총을 쏴 죽이거나 하는 것들을 단계별로 보여주는 것은 현실을 너무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지닐 수 있는 무한한 경우의 수들, 그리고 그 조합들에서 해석해 낼 수 있는 다채로운 의미들은 영화가 예술로 승격되기 위한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런데 영화의 이러한 의미작용은 순수하게, 중립적으로 일어날 수 있을까? 영화를 리얼하게 만드는 사람도, 그 영화의 깊이를 읽어내는 사람도 의미의 판정에 영향을 미치는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196910월호에 실린 장-루이 코몰리와 장 나르보니의 글 「영화/이데올로기/비평」[1]은 이 질문에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우선 한 편의 영화(film)가 아니라 영화 일반(cinéma)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영화라는 예술장르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과정 자체를 추상해 보기 위해서다. 그들에 따르면, 영화도 결국 그것을 제작하고 판매하는 경제체제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된 생산품이자 상품이다.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 모두 노동자이며 관객은 소비자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란 무엇일까? 코몰리와 나르보니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정의를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적으로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말한 루이 알튀세르.

 

 

표상들은(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요소들-필자) 지각되고-수용되고-받아들여진 문화적 대상들이며, 사람들이 포착할 수 없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에 대해 기능적으로 작용한다. [] 사실상 사람들은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조건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조건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를 자신들이 체험하는 방식을 표현한다. 이러한 사실은 실재적 관계와 상상적인 체험된 관계를 동시에 전제한다.[2]

 

원시 공산주의 사회든, 첨단 자본주의 사회든 인간은 특정한 경제체제 속에서만 먹고 살아갈 수 있는데, 그가 이 경제체제를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하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조건에 대해 어떤 태도, 관계를 취하는 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어떻게 체험하고 있는지 만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이데올로기 외부에 있을 수 없으므로 그것을 대상적으로 관계맺을 수 없다. 인간은 다만 이데올로기를 어떤 방식으로든 실재하는 것으로 상상하며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영화도 제작과 배급이라는 생산체제를 벗어날 수 없다. 영화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바로 그 생산체제야말로 무릇 영화의 유일한 기본적 생산형식이라고 믿게 될 수 있다. 코몰리와 나르보니는 영화가 (자기를 만드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되는 한[]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다.(코몰리&나르보니, 252)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이데올로기가 주도적이라고 해서 모든 영화가 그 이데올로기에 동조하여 되는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완전무결한 서사와 논리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 대항해 움직이려는 세력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데올로기 안에서 살면서 나름의 상상체험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 상상과 체험의 양상을 살펴보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따라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대결하려는 영화는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데올로기와 전혀 상관없는 영화는 존재할 수 없다.

 

 

 

영화의 징후적 독해

 

코몰리와 나르보니에 따르면, 중립적으로 보이는 영화들도 자신을 특정 체제에 묶어두려는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살아내며 상상하고 있는지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다. 이 징후를 포착하는 것은 알튀세르가 말한 바대로, 자신들의 존재조건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를 체험하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이데올로기 속에서 읽어낼 때 가능하다. 코몰리와 나르보니는 자신들의 비평적 작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비판적 작업은 삐딱하고 징후적이며 설득력 있는 독해를 통해 한 영화의 외면적인 형식적 일관성을 넘어서 그 간극과 (평범한 영화는 불러일으킬 수 없는) 균열을 밝혀내야만 하는 작업이다.(코몰리&나르보니, 259)

 

코몰리와 나르보니는 이 비평적 작업을 통해 영화가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데올로기의 재현이라는 문제 자체에 의문을 던지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영화들을 일곱 가지로 분류한다. 이데올로기 안에서 자신들의 존재조건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를 체험하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은 자신의 체험과 상상에 대해 아무런 질문도 갖지 않는 것이다. 그 체험을 모방하지 않고 반성적으로 성찰해서 도대체 그것이 정당한 것인지 따져 보려는 영화들이 코몰리와 나르보니에게 소중하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재현 여부도 중요한 가늠자가 된다. 그 일곱 가지 범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a) 이데올로기에 맹목적으로 충실한 영화들(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는 대부분의 상업영화들) b)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정치적 기의를 띄면서 재현 자체를 문제 삼는 영화들(-마리 스트로브의 <화해불가>(1965) c) 정치적 기의는 명시적이지 않지만 재현 에 비판적인 영화들(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1966)), d) 재현을 문제삼지 않으면서 이데올로기에만 반대하는 영화들(코스타-가브라스의 <제트>(1969), (필자) 생각엔 반파시스트와 반자본주의를 목청껏 부르짖는 소비에트의 대부분 영화들도 여기에 속할 수 있겠다.) e)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재현의 형식을 문제 삼는 영화들(할리우드의 몇몇 영화들) f)이데올로기나 재현과는 상관없이 정치적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현실의 질료에 대한 투명성을 강조하는 영화들, 그러니까 무조건 대상을 순수하고 중립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된다는 영화들(드니 드 라 파텔리에의 <대가족>(1958)) g) 현실의 영화적 질료가 곧바로 의미를 생산하는 것으로 기능하게 함으로써 재현의 문제를 전유하는 영화들, 그러니까 영화적 질료는 순수하게 주체에 의해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영화들.(피에르 페로의 <낮의 지배>(1967))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페르소나>(1966) 아이는 여인의 재현되 얼굴을 만지며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코몰리와 나르보니가 그물처럼 촘촘한 범주들과 함께 제시하는 예들에 동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코몰리와 나르보니가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었다고 보는 영화들을 그냥 쳐내며 비평의 작업으로부터 제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에 맹목적이고 재현의 체계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 영화들은 그것의 형식을 따져서 어떤 식으로 이데올로기의 신비화가 일어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 이데올로기와 재현에 반기를 드는 b, c, g의 영화들에 대해서는 영화의 기표와 기의가 서로 엇갈리면서도 어떤 식으로 영화 자신을 반성하는가를 보고자 한다. 그리고 기의만 남아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d, f의 영화들은 형식에 대한 성찰 없이 기의만 존재할 때 그 기의가 얼마나 무력한 것이 되는지 드러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형식 때문에 이데올로기를 내파하는 영화들은 그 이데올로기와 형식 사이의 간극을 지적해야 한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1958) 부인의 우아한 소라 모양 머리카락은

어떻게 재현에 흠집을 내고 있는 것일까?

 

 

코몰리와 나르보니의 징후적 독해 방식은 영화를 체험하는 우리에게 어떤 이점과 재미를 줄까? <트랜스포머>, <투머로우> 같은 영화들이 재현하는 미국 중심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지적하는 일은 이미 오래 전에 너무 손쉬운 것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전혀 무해한 것으로 보이는 다큐멘터리(예를 들면, <동물의 왕국>!)나 노골적으로 반체제적인 영화를 이데올로기와 그 형식의 차원에서 다시 따져 보는 것이야말로 징후적 독해를 연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1] 이 글에서는 『사유 속의 영화』, -루이 코몰리&장 나르보니, 「영화/이데올로기/비평」(이윤영 편역, 문학과 지성사, 2011)을 기본 텍스트로 인용하지만, 알튀세르의 글은 보다 정확한 번역으로 보이는 각주 2의 이종영 역을 인용한다.

[2] 루이 알뛰세르, 『맑스를 위하여』, 「맑스주의와 인간주의」, 이종영 역, 백의, 1997, 2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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