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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가치법칙을 넘어서는 관계를 생각해 본다





이 현 옥/수유너머N 철학교실 회원





과거를 공부를 한다는 것은 아마도 현재 나의 정신공간- ‘느끼고 생각하고 행위하는 것으로 드러나는’-을 구성하고 있는 논리적인 공리계를 들여다보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나의 현재의 모습이 애초부터 이렇게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다른 모습의 내가 될 수도 있었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다른 내가 될 수 있음을 아는 것. 하지만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공부를 시작한 초기에는 새로 알게 되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 신통해서 날마다 내가 변하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내가 앎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저 앎의 이미지 조각들 뿐이었고 그건 전혀 나를 바꾸지 못한다는 걸 이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내 몸과 마음에 단단히 새겨진 무의식적인 것들과 오랜 습관을 넘어서서 사유의 다른 길을 낸다는 것은, 단단한 돌에 무언가를 새로 새기는 것과 똑같다는 것, 아주 많은 힘과 공을 들여 분명하게 새 길을 새기지 않는 한, 언제라도 내 사유는 원래의 길을 따라가고 만다는 것을 말이다.


똑같은 의미에서 이번 학기의 수업을 통해 내게 선명하게 남는 명제는 자본의 외부란 자본의 논리 내지 정치경제학의 논리로 환원불가능한 어떤 것을 표시한다(자넘자 p461)"는 것, 다시 말해 가치화를 넘어서는 관계가 가치법칙을 통해서는 도출될 수 없다“(p465)는 것이다. ‘자본의 논리라는 길을 따라가는 한 자본의 외부라는 결과에는 절대로 이를 수 없다는 얘기는 물이 저절로 술로 바뀌지 않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자본의 논리가치법칙이라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내볼 수 있을까? 단번에 길을 내지는 못하겠지만, 내 안에 새겨진 자본의 논리가 어떤 것인지를 들여다봄으로써 외부성으로 향하는 작은 틈이라도 만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1.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기


그동안 나는 가치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왔을까?

가치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사물이 지니고 있는 의의나 중요성, 값어치라고 되어 있다. 이 사전적 정의는 묘하게도 어떤 사물이 태생적으로의의나 중요성을 가진 것처럼 느끼게 하며 우리는 쉽게 그 느낌에 속는다. 그러나 아주 조금만 생각해봐도 가치란 애초부터 어떤 맥락 안에서, 즉 관계 안에서만 성립하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산화탄소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는 별 가치가 없지만, 나무에게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며, 애인이 만들어준 목걸이는 그를 사랑하는 어떤 사람에게는 지고의 가치를 갖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별 가치가 없다. 심한 장애를 가진 어떤 아이가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하찮게 보일 수 있겠지만 그 부모에게는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자식이다. 똑같은 한 그루의 나무도 해와 비, 바람과의 관계 속에서 단 한 순간도 같은 모습이 아니듯이, ‘가치라는 것은 어떤 본질이나 척도가 애초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관계 안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며 비로소 가치있는 어떤 것이 된다는 거다. 가치가 먼저 있고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더불어 비로소 그것이 가치있는 것(valuable)으로 표현된다. 그러니 그 관계의 모습에 따라 제각각 다른 질의 가치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관계만큼의 가치가 존재하는 셈이다. 더구나 동일한 대상과의 관계도 매순간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보면 결국 이 세상에 같은 잣대로 잴 수 있는 가치란 없다는 얘기가 된다. 예를 들어 한 남자와 여자가 부부로 40년을 함께 살아간다고 할 때,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가치가 매 순간 같을 수 없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더 가치있게 느낄 수도 있고, 권태기에 빠졌을 때 혹은 큰 어려움을 함께 겪고 났을 때 서로에 대해 느끼는 가치도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 부부의 결혼생활의 가치는 이 정도다라고 평균을 내서 단정할 수 있을까? 사람뿐 아니라 물건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상대적이고 질적인 차이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가치에 단 하나의 잣대를 들이대어 위계를 정하고 어떤 값을 매길 수가 있을까? 단순하게 여기까지만 생각해봐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애초에 교환가치에는 척도가 없었다. 10냥을 당장 필요한 쌀 한 되와 바꾸어도, 돼지 한 마리를 배추 한 포기와 바꾸어도 그 사용가치가 질적으로 변한 것일 뿐 여기에 어떤 기준을 세울 수 없다. 그런데 위의 예를 드는 순간에 나는 매우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그리고 분명히 나는 금10냥이나 돼지 한 마리가 훨씬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내가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생전 처음 해본다는 것! 그건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는 사용가치만으로 교환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을 테고, 또 내가 태어나서부터 금이 쌀 한 되보다 가치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언제부터 나는 관계를 배제하고 각각의 사물에 대해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을까? 그건 아마도 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가 아닐까?


나는 스스로 그래도 비자본주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여겨왔던 것 같은데 그게 얼마나 대단한 착각이었는지.... 자본은 오로지 증식의 욕망만을 가질 뿐이며 양적인 차이로밖에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자본의 프로세스 안에 일단 들어가면, 인격 따위와 아무 상관없이 누구나 자본의 논리를 집행하는 대리인(agent)이 될 수밖에 없다고 쌤이 말씀하실 때조차도 그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고는 차마 생각해보지 않았다. 자본은 모든 가치의 상대적이고 질적인 차이를 양적으로 전화(轉化)한 후에라야 비로소 그 양적인 차이를 마음껏 추구할 수 있으며, 양적인 차이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사람에게나 사물에게나 동일한 척도를 적용할 수밖에 없다는 게 이제야 이해가 된다. 사실 삶이란 결국 차이가 아닐까? 관계에서 비롯하는 질적인 차이-차이, 차이, 또 차이... 그게 곧 우리의 삶이 아닌가? 하지만 관계의 필연적인 인과성을 모르고 가치의 질적인 차이로 드러나는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딱한 자본. 그저 돈의 액수로밖에는, 달리 가치를 표현하는 방식을 알지 못하는 자본은 이처럼, 측정 불가능한 관계는 물론이고 인간의 노동력이나 자연에 까지 척도를 들이대어 그 질적인 차이를 양적인 교환가치(상품)로 모조리 등질화시킨 후에, 화폐를 일체의 관계를 사절하고 유아독존하는 실체로 만든다. 모든 질적인 가치가 싹쓸이되어 양적인 가치로 동일화되는 자본화의 과정! 이건 나에게 19세기 초의 귀족들이 공유지를 사유화하기 위해 사유지를 청소하는 과정을 떠오르게 한다...

 


“1814년부터 1820년까지 이 15000명의 주민, 3000세대의 가족은 체계적으로 축출되고 소탕되었다. 그들의 모든 촌락은 파괴되고 소각되었으며 모든 경작지는 목장으로 전환되었다. 영국 병사들이 이것을 집행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주민들과 싸움까지 벌이게 되었다. 자기의 오두막에서 떠나기를 거부했던 노파는 불길 속에서 타 죽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이 귀부인은 아득한 옛날부터 씨족의 소유에 속했던 794,000에이커의 토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자본,p1003)



이처럼 인간의 삶을 청소하는 과정을 거쳐, 화폐와 그 양적인 축적물로서의 자본을 삶을 주재하는 초월자로서의 신의 자리에 대신 등극시킨 것.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다그동안 내가 돈만 있으면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왔으며, 마트나 백화점의 그 많은 상품과 거기에 붙어있는 가격들을 또한 그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왔다는 사실도 이제야 새삼스럽다! 그렇다면 그 자본의 프로세스 안에서 나는 과연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사유해왔던 것일까?



2. 관계를 생각하는 두 가지의 방식



나는 매우 오랫동안 자아라는 굳건한 실체가 있다고 믿고 살아왔다. 내 몸이 남들과 다른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어떤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내가 먼저 있고, 나의 의지나 선택에 의해 남들과 관계를 맺고 살고 있는 줄만 알았다. 대기압이 없으면 내가 이런 모양으로 존재할 수 없고, 부모가 없이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오롯한 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관계가 있다는 이 굳건한 믿음은 깨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내가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는 이미 수많은 인연의 결과일 뿐이고, 내게서 생겨나는 어떤 감정이나 생각 한 조각까지도 사실은 내가 외부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양을 드러내는 것일 뿐 아닌가? 내 몸은 그저 외부를 느껴서 표현하는 울림통 같은 것일 뿐이고, 나는 내 선택의 여지없이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그 관계 속에서 어떤 태도를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내가 있다고 한다면, 매순간 우연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그 관계 속에서 윤리적인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나, 그게 전부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먼저 있고 그 후에 관계가 있다는 사유방식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게 나다라는 사유가 각각 가치에 대해 어떻게 다른 사유를 낳는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우선 나라는 주체가 먼저 있어서 어떤 사물과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할 때 나는 타자 혹은 사물을 어떤 기준에서 선택하게 될까? 그건 아마도 필요성내지는 효용성이 아닐까? 분명한 경계로서 나와 구분되는 외부는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간에 오로지 나의 결핍된 욕망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효용성으로서만 그 가치를 가지게 될 거라는걸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다.


이번 학기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자본의 논리가 이렇게나 분명한데도 어째서 세상에는 지금과 같은 방식의 정치경제학의 논리가 그토록 버젓이 존재할 수 있는지가 참으로 궁금했었다. 어떻게 노동이나 부가 생산되는 과정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서 자유거래라는 시장의 교환과정 속에서만 부의 원천을 생각하는 방식의 사고를 할 수가 있는 것인지 말이다. 그런데 경제학사를 읽으면서, 벤담 이래로 개인의 이익이나 쾌락을 오로지 선악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철학이 효용의 원리로 발전했으며, 최대한의 효용을 추구하는 소위 합리성의 개념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합리성이라는 것. 이 역시 그동안 깔끔한 그 느낌에 끌려 막연히 좋은 것으로 여겨왔을 뿐(합리적 소비, 합리적 사고, ‘아 참 사람이 합리적이야!’ 등등..)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개념이다. 대체 무엇을 합리적이라고 할까? ’처음의 목적에 그 결과가 빈틈없이 들어맞는 것, 그 과정에서 어떤 낭비되는 자원도 없는 것‘. 다시 말해 가장 효율적으로, 애초에 목적한 바를 달성하는 최대효용의 상태를 우리는 합리적이라고 얘기한다. 그래서 합리성은 자본주의에 가장 잘 들어맞는 사유방식, 아니 자본주의를 표현하는 개념일 수밖에 없다. 목표를 세우기 위해서는 결과가 예측가능해야 하고, 과정에서 효율성을 따져보기 위해서는 정확한 척도가 필요하므로, 모든 것을 화폐의 양적인 가치척도로 등질화시킨 자본주의야말로 합리성이 작동할 수 있는 유일한 시스템이 아닐까. 이 합리성은 곧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성(이윤)으로 연결되며, 이 합리성의 논리 안에서 자신의 개별적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정당성을 보장받는다. 인간에게 심리적 만족을 줄 수만 있다면 모든 게 이되고, 인간은 모두 서비스의 소유자인 동시에 판매자가 된다.


이제 인간은 그 개개인에게 내재된 위엄과 쓸모가 달라서. 혹은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윤리적 태도가 달라서 평등하지 않은 게 아니다. 오로지 화폐를 소유한 정도의 차이로 평등하지 않다. 인간의 신체는 외부를 만나고 관계를 경험하는 고유한 장소가 아니라, 끊임없이 욕망의 결핍을 느끼고 소비하는 동일한 장소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이처럼 애초부터 일체의 관계가 배제된 채로 최대의 효용을 따지는 과학이라는 이름의 합리성의 논리 속에는 분배의 문제나 약자의 문제 같은 윤리는 아예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인다. 윤리적 태도라는 것 자체가 어차피 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오는 것인데, 무수한 변수들이 작용하는 관계성은 예측불가능하고, 그 관계에서 생성되는 질적인 가치 또한 측정 불가능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는 필요성과 합리성, 생산성이라는 규준에서 과연 자유로운가? 예를 들어 나에게 친절하지 않고 인색하게 느껴지는 어떤 사람, 모임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은 어떤 사람에 대해 나는 어떤 마음을 품어왔을까?


얼마 생각해보지 않고도 나는 효용의 관점에서 그 관계를 생각해왔다는 걸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혹은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더 많은 부담을 짊어져야하는 관계에 대해서 명백하게 나는 원망하는 마음이나 불편한 마음을 품어왔으며, 그들과 더불어 공동체라는 관계를 꾸려갈 수 있는 가능성을 비관해 왔었다. 같은 논리로 내가 더 늙어서 치매 내지 병을 앓게 되거나 스스로 내 몸을 간수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 모든 사고- 합리적 기준에서 내가 준만큼 네게 받아야 하고, 나는 받은 것 이상의 부담을 지거나 누군가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겠다는-내가 먼저 있고 관계가 있다는 방식 이외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런데 부담이란 무엇일까? 따지고 보면 관계 자체, 아니 내 존재 자체가 이미 합리성으로 깔끔하게 설명할 수 없는 부담의 관계가 아닐까? 무수한 것에 기대어 내 존재가 있고, 기대고 기대어지는 효과로서만 드러나는 게 내 존재인 이상 말이다. 그래서 자본의 외부를 사유한다는 것은 관계로서의 나를 사유한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고, 관계 안에서 관계를 통해서만 사유한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나의 외부가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더라도 그건 결코 필요와 합리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나의 일부일 뿐이다! 어떤 짐은 묵묵히 짊어지고, 나는 또 누군가에게 무거운 짐으로 얹히면서 때로는 꾸역꾸역, 그러나 발랄하게 살아가는 것... 그런 관계의 모습을 상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쩌면 자본의 외부성으로 나가는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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