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_철학.예술 :: 철학과 예술 분야의 칼럼입니다!


 

 

 지금 현상학을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김충한/수유너머N 회원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친구와 함께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연구실에서 공부하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전제다. 허나 각자 공부하는 분야가 관련성이 적은 경우, 우리는 친구와 함께 책상에는 앉아 있지만 솔직히 어떤 공부를 하는지 잘 모른다. 

 이 코너는 이런 문제 의식 속에서 만들었다. 서로 상이한 공부(철학, 과학)를 하는 두 필진이 편지 형식으로 질문과 답을 주고 받는다. 주로 과학을 공부하는 K군이 철학을 공부하는 M군에게 사사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M군은 사사로운 질문에 대해 대답할 예정이다.





 M군에게

 맞은편 책상에 앉아 있는 형에게 편지를 쓴다는 게 어색하네. 그래도 어쩌겠어. 어깨를 툭툭 치며 “형, 21c에 현상학을 하는 건 어떤 의미가 있어?” 라고 물어보는 건 더 어색하잖아. 술이라도 마시면 어쩌다 기회가 날 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그렇질 못해서 이렇게 대낮에 맞은편에 앉아서 편지를 쓰게 되네.

 며칠 전 형이 쓴 강의록 [코기토의 귀환] 읽어 봤어. 현상학이 무엇인지에서 시작해서 후설, 메를로퐁티의 살의 존재론까지. 현상학이 이런 걸 하는 거구나란 감을 잡게 해준 것 같아. 일단 서로가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을 맞추기 위해 내가 이해한 대로 요약을 해볼게.

 

 

 


 

 

[코기토의 귀환] 후기1, 후기2, 후기3, 후기4

-후기들을 읽어보시면 강의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

 


 


 현상학의 요지는 ‘내게’ 주어진 것에 충실하려는 철학이야. 대상을 파악하려는 의지에서 벗어나 ‘나의 의식’에 대상들이 어떤 식으로 비춰지는지에 주목하지. 다시 말하면 현상에 주목해. 현상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그 자체로 기술하려는 것이 현상학의 목표야. 이를 달성하기 위해 현재의 활동이나 판단을 보류하고 정지하는 것이 이른바 현상학적 에포케지. 일단 중지시켜놓은 이후, 내 의식에 비춰지는 것을 파악해가려는 과정은 현상학적 환원이야. 후설은 현상학적 에포케 내지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순수의식에 도달하려고 해. 그 과정에서 제안한 개념이 그 유명한 ‘지향성’이지. 과거지향(retention), 미래지향(protention) 같은 과정으로 우리 의식은 세계를 구성해.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음을 하나 하나씩 듣지 않는다-



 하지만 후기에 이르면 입장을 바꿔. 우리 의식이 말 그래도 순수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식으로. 가령 후설은 ‘생활세계’ 란 개념을 얘기하는데, 이는 “우리의 생활 전체가 실제로 거기서 영위되는 바”의 것이며, “현실에서 직관되고 현실에서 또한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이고, “언제나 물어질 필요도 없는 자명성 속에서 미리 주어져 있는 감각적 경험의 세계”야. 후설은 순수의식에서 구체적인 생활세계로 귀환해.


-모리스 메를로퐁티(1908~1961)-


 메를로퐁티는 후설이 도달한 지점에서 출발하지. 메를로퐁티는 칸트의 초월적 주관의 비판을 통해 자신의 경험적 주관을 주장해. 칸트는 모든 표상에 있어 ‘나는 생각한다’는 의식이 항상 존재하고 이를 통해 통일된 것으로서의 경험이 주체에게 주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지. 항상 존재하고 있는 그 의식을 칸트는 "초월적 주관"이라고 불러. 메를로퐁티는 칸트의 초월적 주관은 불가능하다고 말해.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은 항상 ...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이지. 우리의 의식은 세계와의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고 그래서 우리는 그저 한 명의 경험적 주관으로서 세계와 만날 뿐이야.


 그래서 얘기는 자연스럽게 경험적 주관이 어떻게 세계와 만나는 지로 흘러가. 그것이 ‘지각의 현상학‘이야. 쵤너의 착시 현상을 두고, 수학적 사실에 따라 ’착시’라고 단정할 게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지각하게 되는가를 탐구하는 거지. 


-평행선들에 빗금을 그어 평행하지 않은 듯 보이게 하는 쵤너의 착시 현상-


-어떤 선분이 더 길까요?-




 “객관적 관계에 앞서 그 자신의 규칙에 따라 분절하는 지각의 구문론”을 만드는 것이 [지각의 현상학]의 목표라고 나는 이해해.


 지각에 대한 탐구에서 메를로퐁티는 무엇을 찾아냈을까? 첫째는 "애매성"이야. 세잔의 그림처럼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는 방식은 애매해. 경계도 흐릿하고 사물의 곧은 직선은 곡선으로 구부러지지. 


-세잔의 생 빅투아르산-


둘째는 "초월성"이야. 지각은 본성적으로 애매하게 지각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대상에 대한 완벽한 파악이란 불가능하지. 역으로 얘기하면, 대상과 구분되는 확실한 ‘나’란 것을 주장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거야. 가장 근원적 차원으로 들어가 보니 대상과 ‘나‘가 구분 불가능한 상태로 존재하더라. 이를 메를로퐁티는 ’초월‘이라고 불러. 따라서 초월적 존재인 우리는 고정불변한 존재가 아니라, 시시각각 바뀌는 지각의 장 속에서 해체되고 재형성되지.  


 우리가 생각하는 ‘객관적 사고‘ 라는 건 사실 알고 보면, 애매한 지각의 결과물들의 이념적 형태일 뿐이야. 실재하는 건 오직 애매하기 짝이 없는 지각들이지.


"자, 이제 질문 들어갑니다."


 이 지각에서 첫 질문을 시작해볼까해. 모든 앎의 시작을 지각에 놓을 경우, 지각되지 않는 앎은 어떻게 해야 할까? 가령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을 보자. 특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운동할 경우 시간은 늘어나고, 길이는 수축하게 되지. 

-빛의 속도에 가깝게 운동하면 시간은 위의 식대로 길어진다. 다르게 말해서 상대적으로 천천히 흐른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지각에 근거한 앎이라고 보기 힘들어. 당시(1905년)나 지금이나 빛의 속도에 가깝게 운동하는 기술은 없으니까. 빛의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는 실험 결과를 가지고 수학적 추론을 통해 도달한 결론인 셈이지. 우리는 이를 그저 이념의 형태로 응고된 ‘객관적 사고’이고, 따라서 여전히 지각할 수 있는 것 보다 덜 참되다고 생각해야 할까? 우리의 상식에 반하는 현대 과학의 놀라운 주장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추론을 통해 구성되는데, 이를 두고 그저 ‘현상의 배후에 있는 지어낸 이야기’로 규정할 수 있을까? 오직 우리 오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더 정확히는 지각되는 것만이 참되다 해야 할까? 그렇다면, 너무 작기 때문에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양자역학과 너무 거대한 에너지를 다루기 때문에 역시나 지각할 수 없는 상대성 이론은 모두 기각되어야 옳겠지. 그러나 그런 ‘지어낸 이야기‘ 덕택에 우리는 반도체를 만들고 컴퓨터를 만들어, 그 컴퓨터로 이렇게 형에게 글을 쓰고 있잖아?  



-현대 과학에서 지각에 직접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이론이 얼마나 될까?-



요지는 이거야. 매를로퐁티는 지각할 수 있음에서 확실한 앎 그리고 우리의 존재를 기초 짓지만, 그것이 야기하는 효과는 상식과 일상적 감각으로 회귀하는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네. 

 두 번째 질문은 ‘지금’ 현상학을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야. 메를로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을 박사논문으로 제출했을 때가 1945년이지. 지각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최대한 선입견 없이 기술하려 한 노력 덕분에, 우리는 스스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을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fMRI가 있고 뇌과학이 있고 인지과학이 있지. 쵤너 착시 현상에 대해서도 우리의 뇌가 어떤 이유로 그런 착시를 할 수 밖에 없는지를 뇌과학은 설명하려고 해.


-손을 움직일 때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



 더 나아가 그 매커니즘까지 규명하고자 하지. 쓸 수 있는 도구가 아무것도 없었을 시절엔 어쩔 수 없이 직관과 추측으로 전개한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의 노력 덕에 도구들이 축적된 지금 현상학을 하는 건 어떤 의미이지? 의사, 뇌과학자, 인지과학자, 언어학자 수백명이 모여 인간의 지각 매커니즘에 대해 실험을 하고 논문을 축적해 가는 것은 그저 현상 배후에 있는 지어낸 이야기들이고, 오직 메를로퐁티가 일체의 선입견 없이 종이위에 손으로 써내려가는 문장들만이 진정한 ‘지각의 구문론’ 일까? 물론 그렇다고 하진 않겠지. 허나 더 공격적으로 물어본다면, 메를로퐁티가 다시 살아나서 [지각의 현상학 2]를 쓴다한들, 인지과학 논문들만큼의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두 번째 질문의 요지는 이거야. ‘인지과학의 발달 이후 현상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렇게 두 개의 질문을 보내. 그래도 질문 만든다고 형 강의록 읽어보고 요약까지 했으니, 고마워 할 형의 모습이 그려지는군. 고마운 마음은 성실한 답변으로 표현해주면 돼. 그리고 기왕이면 일주일 안에 해주면 좋겠다.  


늘 많은 것을 배우는 M군에게

K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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