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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과 역사유물론을 다시 생각한다

칼 맑스 <철학의 빈곤>(아침, 1988)    




최 진 석/수유너머N 회원





‘맑스주의’를 넘어서

2000년 일본에서 나와 최근 한국서도 간행된 <맑스사전>(도서출판b, 2011)의 ‘철학의 빈곤’ 항목을 보면 ‘깜짝 놀랄 만한’ 내용이 적혀 있다. “상대의 나쁜 머리를 격렬히 비판하는 이 책은 지성을 자랑하는 저자의 질투심과 공명심의 산물로 받아들여질 뿐, 프랑스어로 씌어진 것이면서도 프랑스의 지식인·노동자에게는 거의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했다.” 나아가 “맑스는... 상대의 주장을 제멋대로 왜곡한 다음 그 왜곡된 것을 공격한다.” 이십년 전이라면 ‘불경죄’라도 걸릴 만한 얘기다. 물론 이게 다는 아니다. 글쓴이는 <철학의 빈곤>(1847)이 맑스 개인의 사상적 성장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그것은 철학연구에서 경제학연구로 맑스 사유의 지평이 확장되고 심화된 계기였음을 지적한다. 과연 엥겔스는 1884년의 독일어 1판 서문에서(원문은 프랑스어로 쓰여졌다) 이 책이 집필될 무렵은 맑스의 역사관 및 경제관이 새롭게 윤곽지어지던 때였음을 밝히고 있다. 요컨대 <철학의 빈곤>은 <1844년의 경제학·철학 초고>로부터 <정치경제학 비판>(1859) 및 <자본 1>(1867)로 이행하기 위한 첫 번째 도약대였던 셈이다(노파심에서 말하면 뒷부분이 이 항목의 핵심이자 결론이다).



뒤늦게 일본어판 서문을 읽어보니 일어판 제목은 <신맑스사전>이라 한다. 왜 ‘신’인가? 20세기의 교조화된 맑스주의를 지양하고 맑스 사상의 ‘형성사’를 되밟아 구성했기 때문이다. 사전은 사전인지라 항목별로 찾아보며 판단해야 할 일이지만, “본 사전은 맑스에 관한 사전의 지금까지의 개념을 바꾸게 될 것”이란 글귀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직도 손에 잡히는 맑스 관련 서적들이 그를 젊어서부터 늙어죽을 때까지 마냥 천재였다는 식으로 포장하는데 질려있던 참이라 더 그랬다. 치밀하고 방대하지만 이런 풍조에 한몫 보태던 오이저만의 해석도 다르진 않았다. 지금 맑스를 읽을 때, 우리는 맑스가 자기 공부의 벽에 갇혀, 자기 시대의 에피스테메에 가려 볼 수 없었던 부분들을 찾아 분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물론 맑스에 대한 ‘합당한’ 비판마저 포함해야 한다.


 

<맑스사전>(도서출판b, 2011) 21세기 맑스사상의 집대성을 겨냥해 출판된 책이시다. 무려 8만원!




‘현실주의’의 함정

철학연구에서 경제학연구로 이행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헤겔 법철학 비판>(1843)부터 줄기차게 두들겨패던 헤겔을 내던지고 화폐와 상품이 칼을 휘두르는 경제의 실물로, 시장과 국가의 현실로 옮겨갔다는 말일 게다. 하지만 그냥 ‘철학에서 경제로’라고 뭉뚱그릴 수 없는 게 바로 ‘도약’이다. 그것의 고리를 찾아 읽는 게 우리의 과제일 텐데, 맑스는 몹시 친절하게도 안넨코프에게 보내는 편지(1846.12.28)에서 그 내용을 잘 요약해 주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편지의 내용은 단지 경제학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철학’이나 ‘경제학’의 주문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것, <독일 이데올로기>(1845-46)의 연장선에 놓인 유물론적 역사관의 피력에 다름 아니다. 무슨 말인가?



청년 헤겔주의자들은 이념이 아닌 현실 자체에서 역사를 보도록 종용했다. 거창한 관념이나 정신이 아니라 지금-여기서 발딛는 현실이 문제다. 옳다. 그런데 현실에 현미경을 들이댈 경우 우리는 곧장 실정성(positivity)의 그물에 빠지게 된다.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움직이는 엄연한 현실성이 과거와 미래의 기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유물론자는 지금-여기 주어진 조건에서 사고하며, 그 논리적 연장에서 과거와 미래를 구상한다 할 때 현실이 불가결한 출발점이 되면 우리는 현실의 구속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실증주의(positivism)다. 근대 국민국가, 국민경제학의 조건에서 경제를 사고하는 것은 이러한 실증주의를 ‘객관’이자 ‘과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런 현실로부터 달리 빠져나갈 길이 없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현실주의(=실증주의)를 벗어나 이념적 현실(사회주의)에 도달하려 할 때 초월적 실체가 요청된다. 엥겔스가 비판을 퍼붓는 로드베르투스의 입장이 그러한데, <철학의 빈곤> 독어판 서문에 기술된대로 경제학적 현실주의에 매달린 그가 바라볼 수 있는 미래는 가치와 가격을 사회주의 국가의 수중에 온전히 맡기는 것이었다.



엥겔스가 그린 청년헤겔주의자들



 

프루동, 포이에르바흐, 헤겔

<철학의 빈곤>에서 맑스는 어떤 주장을 하고 싶어한 걸까? 지식과 패기가 넘치는 청년이 ‘자신이 읽은대로’ 선배를 치고나가고 싶어했을 수 있다. 안넨코프에게 보낸 편지에도 자기가 쓴 책자들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 걸 보면 분명 그도 자신에 대해 말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PR 욕망만은 아니었을 게다. 역으로 내게는 청년의 분방함을 넘어 보다 진중해진 그의 시선이 읽혀진다. 어떻게?



프루동은 무지하다. 무지할 뿐 아니라 어리석다. 어떤 점이? 헤겔처럼 이념의 역사를, 그 역사의 지배를 받는 경제를 서술하는 탓이다. 이게 왜 문제인가? 그 경제가 현실 자체로, 실정적 현실로, 바꿀 수 없고 그 자체가 진리가 된 기준점이 되어 있는 탓이다. 현실의 실정화는 역사를 실정화하고 그대로 이념으로 투사된다. 이에 따를 때 분업은 유사 이래로 항구불면하는 경제적 범주이자 현실의 지표가 되며 카스트와 매뉴팩처, 공장제 대공업의 분업은 동일한 기제의 상이한(그러나 크게 다르지는 않은) 용법일 뿐이다. 기계도 마찬가지다. 분업과 아울러 진화하는 기계는 망치나 물레방아나 제니방적기나 똑같다. 경쟁은 언제나 있어오지 않았을까? 나아가 소유! 지금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소유는 사회의 역사, 역사의 역사, 역사의 이념에 걸쳐 영구불변한 범주가 아닐까? 그럼 이 현실의 ‘조건’에서 해방은 어떻게 전망될 수 있을까? 간단하다. ‘올바른’ 평형관계와 종합을 발견함으로써!



현실을 실정화해서 과거와 미래로, 이상으로 투사하는 것은 헤겔을 그대로 거울에 비추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가? 포이에르바흐 선생께서 기독교를 뒤집어 인간교를 세운 것을 상기해 보라! 뒤집기는 했는데 노른자는 아직 익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놀랍게도’ 맑스는 이제 헤겔을 옹호한다. “헤겔과 비교해 보았을 때 포이에르바흐는 그보다 한층 뒤떨어진다”(1865.1.24. 슈바이처에게 보낸 편지). 프루동이라고 다르겠는가? 이념을 던져버리고 현실을 내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런데 그게 또하나의 관념론이고, ‘구체에서 추상으로’를 반복하는 일이라면?



     <철학의 빈곤> 1931년 러시아어판 표지. 상단에 "맑스 엥겔스 연구소, 맑스주의자의 도서관"이라고 쓰여져 있다.



현실로부터의 도약과 변증법

무엇이 역사유물론인가? 요약적으로 진술해보자. 현실의 사회구성체(social formation)는 인간 상호간의 행위의 산물이다. 행위란 특정한 형태의 교통과 소비이며, 그것은 특정한 사회질서, 가족, 신분, 계급의 조직형태 속에 나타나며, 근대 시민사회는 그 중 가장 현재적인 상태이다. 물론 시민사회는 특정한 정치적 조직형태의 일부를 이룬다. 이 모든 것들의 총체로서 사회는 생산력이라는 경제적 현실에 기댄다. 생산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획득된 힘, 과거의 활동이 집약되어 이루어진 산물이다. 그것은 관계의 총량을 포함하기에 생산력의 진화는 관계(사회적 형식)의 진화마저 포함하고 있다. 때문에 생산력의 이행은 이전 사회의 생산관계의 이행을 포함하며, 결국 사회사는 물질적 관계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프루동과 양립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관건은 다음이다. 생산력의 이행, 사회적 관계의 총체의 이행은 그러나 순조롭지 않다. 급격한 전변의 계기가 있으며, 그것은 ‘올바른 평형관계와 종합’을 발견하지 못할 수가 있으며, 격렬한 파열 속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른바 ‘단계론’으로 읽혀졌던 생산양식의 역사는 기실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간들은 그들의 교통방식이 획득된 생산제력에 더 이상 조응하지 않게 되자마자 그들이 물려받은 기존의 모든 사회형태를 변화시키도록 강요받습니다.” 이러한 ‘강요’의 계기는 무엇인가? 인간의 의지도, 자발성도, 노력도, 과학도, 이념도 넘어서는 강요는 날것 자체로서의 역사이자 우리가 유물론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그것은 ‘전화(transformation)’이며, ‘도약’의 순간이다. 변증법은 그 도약을 포착하고 개념화하는 사유의 방법인 셈이다.

    


<독일 이데올로기> 수고본 일부


 

유물론과 역사, 변증법의 새로운 일보

변증법에 역점을 둘 때, 우리는 비로소 현실의 결박으로부터, 경제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유물론으로서의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물론 분업은 유사 이래 존재해 왔다. 그러나 노예제 사회와 중세의 길드, 18세기의 매뉴팩처는 서로다른 방식의 분업이다. 다시 말해 그 시대의 생산력을 담보하는 제한된 생산관계였다. 돌도끼와 뮬방적기는 단지 생산력의 양적 차이가 아니라 거기에 포함된 생산관계의 관계적 차이를 반영한다. 경쟁도 신용도 소유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출발할 때 모든 것은 정당화되지만 변증법에 의거할 때 모든 것은 권리의 토대를 잃는다. 지금-여기의 현실, 당연한듯 현존하는 제관계, 범주들, 구조들은 ‘올바른 평형관계와 종합’이 아니라 연속과 단절의 팽팽한 긴장 속에 이행을 서두르는 지각변동인 셈이다.



현실은 그러한 전화를 촉발하는 모순이지, 단지 현실이 아니다. “모순 자체는 단지 현실에서 작용하고 있는 사회적 모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모순의 끝에 역사의 변형이 모습을 드러내고, 도약이 시작된다. 이렇게 전화(변형)의 관점에서 ‘도약을 향한’ 현실을 읽는 것이 바로 변증법적인 역사유물론이 아닐까? 과학과 역사의 결합으로서, 알튀세르가 정식화하고자 했던 연구(상이한 기원과 과정, 중층결정)도 여기 있지 않을까? 그것은 지금-여기라는 당연한 현실의 테제를 부둥켜 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미래 시점에서 촉발되는 과학이 아닐까?




변증법과 역사유물론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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