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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저당 잡힌 노동자들: 새로운 코너 [사회와 인간 형성]을 시작하며

 

 

 

 

수유너머N 회원 / 만세

 

 

 

 

얼마 전 친한 친구가 결혼을 했다. 함께 철없이 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번듯한 직장을 잡고 연애를 하고 또 결혼까지 이르게 된 친구가 자랑스러웠다. 결혼 기념으로 밥 한 끼 사겠다는 말에 오랜만에 얼굴을 봐야겠다 싶어서 약속장소로 나갔다. 간만에 만난 친구들과 십여 년 전 추억을 안주 삼아 술을 돌리다보니 어느 새 밤이 깊었다. 방향이 비슷했던 친구와 나는 비틀거리며 택시에 올라탔다. 둘만 남아 이런 저런 남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이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너무 좋지만 세상이 참 무섭다고 고백을 한다.


 

.....내가 참...생전 구경도 못해본 일억 얼마가 내 손을 그냥 거쳐서 집주인 손으로 들어가데......내가 그걸 언제 다 갚을지.”

 


아직 직장 생활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평사원이 전세 17천만 원이 넘어가는, 어이없게도 서울에서 싸다고 분류되는 신혼집을 구하기 위해서는, 대출 밖에는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대출금은 적어도 십 수 년 동안은 이 친구가 끊임없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야만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십 수 년 이후에 이 상황을 끝내고 자유로워 질 수 있다면, 그것도 해볼 만한 일 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처럼 부동산 경기 부양으로 전체 경기를 일으키려는 정책이 반복된다면, 집값은 여간해서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이 빚을 다 갚고 난 다음에는 또 빚을 져야 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런 우울한 전망을 공유하던 나와 친구는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자는 위로인지 다짐인지 모를 말을 주고받고 비틀비틀 헤어졌다.


비단 내 친구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빚을 지고, 그것을 갚아 나가기 위해 힘들지만 참고 일하는 모습을 보며, 오늘날 우리에게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은, ‘부채상대적 결핍 창출 메커니즘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새롭고 그럴듯한 상품을 만들어내어 욕망을 자극하고, 그 욕망을 미래를 팔아 실현하게 만듦으로써, 사람들이 계속해서 노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말이다.


과거 맑스나 폴라니 같은 이들은 국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절대적 결핍 상황이 노동자를 만들어낸다고 지적했다. 사실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 그러니까 매일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가며 오랜 시간 동안 정해진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월급을 받아 시장에서 생필품을 구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200년 전까지만 해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당장 중세의 농민만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노동자가 된 것일까? 맑스의 논지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노동자는 국가가 기존의 사회 구조를 파괴하고 억지로 절대적 빈곤을 창출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엔클로져나 교회개혁 혹은 공유지 정리 등을 통해 농민들은 대대로 사용권을 가져왔던 토지로부터 쫓겨났다. 이렇게 몸뚱이 밖에 남지 않은 사람들은 노동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빈곤은 사람들을 노동자로 만든다. 폴라니 역시 비슷한 사태를 지적하며, 노동이 상품화되는 것은 기존 사회구조를 해체하는 폭력을 통해서라고 지적한다.


이런 일이 오늘날에도 발생한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 자본주의가 안착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결핍을 창출하여 노동하게 만드는 것이 이들이 말한 핵심 취지라면,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비록 그것이 생존을 위협하는 절대적 결핍이 아니라, 끊임없이 욕망을 자극하는 기업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상대적 결핍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제는 그럴 듯한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라고 유혹하는 손짓으로부터 잠시나마도 자유롭기 어려운 시절이 되었다. 최신형 스마트폰이 쏟아지고, 고급형 아파트가 지어진다. 핸드폰을 손에 들고 아파트에서 우아하게 살고 있는 연예인들의 모습이 전파를 탄다. 누가 아파트를 샀다더라, 누구는 부모님이 강남에 오피스텔을 해줬다더라 하는 소리가 풍문을 타고 들려온다. 사실 먹고 사는 일에 큰 문제가 없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보면 괜히 내 삶이 불쌍해진다. 계속해서 새로운 욕망을 부추기는 기업의 마케팅은, 채워지기 힘든 상대적 빈곤과 결핍을 만들어낸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대적 빈곤과 결핍을 미래를 팔아 메우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정부는 LTV, DTI 규제를 완화하면서 집을 사라고, 대출을 받으라고 부추긴다. 미래의 활동을 팔아서 꿈을 이루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림 1> 한국 가계 대출 통계 (자료: 한국은행) 




<그림 2> 2013년 30대 미만 부채 원인 (자료: 통계청)



<그림 3> 교육 수준별 부채 정도 변화 (자료: 통계청)


 

위의 세 가지 그림은 통계청과 한국은행 자료를 이용하여 내가 작성한 도표이다. 그림 1은 최근 가계부채의 증가 추세를 보여준다. 2013년의 경우 총 가계부채가 962조를 돌파했고, 2014년은 1000조를 돌파할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림 2는 젊은 세대들이 부채를 지는 이유를 보여준다. 빚을 지는 것은 무슨 일확천금을 노릴 사업을 계획해서가 아니다. 대부분 주거비용 때문에 빚이 생긴다. 그리고 그림 3은 교육 수준별 부채 규모를 보여준다. 볼 수 있듯이,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졌을 경우 부채규모가 크다. 이는, 특이하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이 빚을 지는 게 아니라, 교육수준이 높고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빚을 더 많이 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마도 이는 대출 능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요컨대, 한국은 점점 부채를 늘리고, 그것을 갚으면서 살아가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힘들어 때려 치고 싶다가도, 할부나 대출 생각하면 마음을 다잡게 된다. 물론, 이런 변화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면, 적절한 수준에서 상대적 결핍으로부터 해방되어 편안해질 수 있다면, 미래를 저당 잡힌 채 성실하게 노동하며 사는 것도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복과 편안함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기업들은 계속해서 상품과 서비스를 팔기 위해 욕망을 자극할 것이고, 우리 역시 옆의 친구들을 돌아보며 이 정도는 굴려야지 or 살아야지하는 생각을 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상대적 결핍은 좀처럼 메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욕망의 충족을 위해, 어쩌면 우리는 이미 저당 잡힌 미래보다 더 후의 미래까지 팔아넘기게 될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좋을까? 혼자라도 검소하게 살아보자는 식의 도덕적 제안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사회적 압력으로부터 숨어들어가는 고독한 삶은, 미래를 저당 잡히는 삶보다 훨씬 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거창한 욕망은 품어보지도 못한 채 작은 아파트 하나 전세로 마련하려다가 10년을 저당 잡힌 내 친구를 보고 있으면, 그렇게 빚을 질 수 있는 능력조차 부러워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있으면, 어찌해야 할지 모른채 답답한 마음이 들 뿐이다.


이번에 새로 마련한 코너, [사회와 인간형성]은 이런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규명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꿈을 꾸고, 좌절하고, 답답해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이렇게 생겨먹은 것일까? 분명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본능은 아닐 것이다. 마치 상대적 결핍과 부채를 통해 노동자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모습은 외부의 어떤 요소들에 의해 주조되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이 과정을 좀 더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답답함을 조금 덜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맑스/푸코/폴라니/부르디외 등, 우리가 생겨먹은 모습이 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앞서 고민했던 학자들의 말을 듣고 토론해본다면, 그럴 듯한 혜안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해봐야 결과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 매주 월요일 마다, 위에 언급된 학자들의 시선에서 "사회와 인간 형성"이라는 테마로 여러 필자들이 고민하는 바를 글로 풀어낼 것이다. 이 웹진의 독자 분들도, 함께 고민해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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