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_철학.예술 :: 철학과 예술 분야의 칼럼입니다!


[이슈_지안의 난독일기] “유니온 세대”의 불가능성

수유너머웹진 2016.04.03 22:22 조회 수 : 27

지안의 난독일기 


"읽기 어려움이란 뜻의 난독은 굳이 고전이나 어려운 철학책에만 유효한 것은 아니다매일같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읽어내기 어려운 무엇이다. ‘청년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여러 사회 담론을 난잡하게 독서하려 한다그날 그날의 기분에 따라지는 일기처럼 통일된 논점이 아니라 계속 삐끗거리는 이야기들을 연재하고 싶다.



유니온 세대의 불가능성





지안/수유너머N 회원

 

 



포기에 관한 세대는 어떻게 유니온이라는 가치를 딛고 새롭게 명명되는가?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삶과 그 조건들을 조직해나가는 것을 문화적으로 상상할 수 없거나, 그것이 경제적으로 불가능한 빈곤 청년의 이름은 이러한 세대 어디에 존재할 수 있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현재의 청년 운동은 여러 조합적인 방법을 통한 제도정치로의 적극적인 개입 내지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노동·협동조합 등의 활동을 만듦으로써, 청년들이 자기 삶의 다양한 영역들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청년노동에 대한 청년유니온과 알바노조의 운동과 주거권 문제에 대한 민달팽이유니온의 활동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러한 청년운동의 흐름 속에서 이제까지 각자 해결해오던 주거/노동/빈곤 등의 영역들을 공동의 문제로 인식하고 협동함으로써 유니온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번 글을 통해 다뤘던 청년, 난민되다(미스핏츠, 코난북스)의 경우에도 주거권 문제에 있어 청년들이 직접 제도적인 접근을 통해 해결해나가는 방식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지난 연재 글인 <계산이 불가능한 순간, 청년난민들은 어떻게 계산을 빗겨나가는가>의 결론이 가지는 일종의 낙관성에 대해 스스로 다시 질문하고 싶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 청년들은 정해진 수식을 빗겨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정책적인 접근법은 유니온 세대”(진선명 기자, <청년운동, 청년세대 넘어 사회운동의 주인공으로>, 한겨레신문)라는 문화와 주체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동시에 노력의 대상을 포기해야 하는 N번의 경험들 속에서 청년들은 정말 유니온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포기에 관한 이 세대가 정치를 상상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라는 질문들이 남아있다.

 


포기의 이중적인 속박

 

청년세대가 포기하는 혹은 포기해야 하는 것의 숫자는 점점 높아지더니, 결국 현재의 청년세대를 명명하는 이름은 그 개수를 특정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n포 세대가 되었다. 그런데 사실 포기라는 이름은 기만적이다. 포기의 사전적 정의란 하려던 일을 도중에 그만두어 버림이다. 따라서 포기라는 말은 어찌되었든 자기 원인으로 인해 중단하는 일정의 능동적인 의지를 내포한다. 그러나 청년세대가 포기하는 것들은 어떤 특별한 것이라기보다는 취업/연애/결혼/내집마련/출산 등과 같은 일반적인 삶의 단계들이다. 여기에 n포 세대라는 새로운 이름에는 심지어 꿈과 희망마저도 포함된다. 기본적인 삶의 단계들을 박탈당하는데다가 청년의 고유한 특징인 꿈과 희망마저 좌절되는 세대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에 포기라는 수사가 붙는 것이 적절할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재 청년 세대가 경험하고 있는 포기는 사실 배제라고 불려야 마땅한 것이다. 자기의지에 의한 포기가 아니라 사회에 의한 배제이고 박탈에 가까운 배제라는 점에서 말이다. 여기서 피동적으로 배제되는 청년이라는 집단은 정확하게 포기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같은 위치다.


하지만 문제는, 지속적인 피동-포기의 경험이 포기 자체를 낳는 상황이 되었다는 점이다. 노력을 통해서도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성세대는 부단히 노력해야하는 청년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노출시킨다. 우리는 노력함으로써 빛나는 청춘이 되어야만 스스로의 젊음을 긍정할 수 있다. 청춘담론의 유행이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젊은 나이 앞에다 쉽게 빛나는” “푸른” “좋을 때다라는 수식을 붙이기 마련이다. 자신의 젊음을 긍정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청년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노력의 긍정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포기 ()하는 세대가 가진 감성들은 다양한 단어들로 표출된다. 노력이 쉽게 꺾이는 사회를 경험하지 못한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와 어느 순간 노력이 불가능해진 스스로를 자조하는 노오오력과 같은 신조어를 통해서 말이다. 이제 비의지적인 피동-포기라는 경험을 통해서 사소한 노력에 대한 의지마저 사라진다. 결론적으로 청춘 담론의 노력이 낳은 것은 무기력이다.





여기에 포기세대의 두 번째 차원이 있다. ‘N포 세대라는 이름은 충분히 노력했으나 그것이 좌절되는 청년이라는 상을 떠올리게 한다. 노량진과 대학가로 점철되는 이런 이미지는 어쩌면 한쪽 편의 안쓰러움과 다른 편의 당연한 분노라는 구도로 이어지며 이러한 구도는 선거철마다 부각된다. 그러나 무기력 자체를 표현하는 청년의 상은 이러한 이미지 외부에도 존재한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런 무기력을 처음 맞닥트린 장소는 알바를 하던 피자집이었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나처럼 고졸이었는데, 하루의 8~10시간을 알바로 보내는 또래 동료들은 고시원으로 돌아가 나머지 시간을 대부분 누워있거나 게임을 하고 가끔 술을 먹는 것으로 보냈다. 그리고 다시 일터로 나오면, 차려입은 손님들이 앉아있는 홀과 주방 사이에 쳐진 지독한 가림막 사이에서 끝없이 피자를 만들고, 나르고, 숨어서 밥을 먹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한 달을 일하고 한 달을 소비하는 삶 어디에 그 자체로 빛나고 푸른 무언가가 있으며, 무기력하지 않을 구석이 있는가? 이러한 종류의 가난은 상태의 표시가 아니라 지속적인 시간이다. 이들은 당장은 대학생 또래보다 가진 현금이 많을 수 있으나 문제의 심각함은 경제적인 것보다 문화적인 경험에 있다. 이러한 지속적인 시간으로서의 가난에는 사람들이 절대 볼 수 없도록 비에 젖은 배달 옷을 입은 몸을 숨겨야 하고, 숨어서 쉬는 시간 30분을 보내는 공간만이 존재한다.


여기서 감성의 차이는 절대적이다. 앞선 관점에서는 청년세대에게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사회는 부당함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한 공간이다. 그러나 포기의 두 번째 차원이란, "나는 노력하지 않은 존재"라는 탈락의 명령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또한 이 공간을 규율하는 것은 단 한 번도 공동으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경험 없이 매니저와 점장이 반복하는 회사규칙이다. 따라서 포기의 두 번째 차원은 노력의 무의미함이 아니라 애초의 거세에 가깝다. 이런 탈락의 명령 앞에서 노력담론의 전복은 불가능하며 역으로 사회는 긍정의 공간이다. 실패한 것은 사회가 아니라 탈락을 자초한 스스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치의 가능성이 있을까? 포기의 두 번째 이미지에서 해결 지점은 갈 곳을 잃어버린다.



청년운동과 <12가지 요구안>

 

한편에서는 청년들이 유니온 세대로 다시 명명되었다. 지난 4년간 서울시에 의해서 청년활동가라는 사회 혁신의 주체들이 호출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스스로 여러 조합을 만들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청년들도 등장했다. 하지만 지속적인 무기력을 경험해야하는 상황에 처해있으며 무기력 자체가 지배적인 감성이 되어버린 청년세대가, ‘유니온 세대라는 새롭고 진취적인 명명으로 다가왔을 때 여기에서 뭔가 설명되지 않은 격차가 느껴진다. 무기력과 유니온이라는 이 간극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포기에 관한 세대인 청년은, 어떻게 이제 유니온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단비뉴스


유니온이라는 가치의 핵심은 무언가에 힘을 합쳐 적극적으로 나서고자하는 행위이자 욕망일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문제들을 말하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기입함으로써 해결하는 조합적인 행동이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최선의 방법처럼 보인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도 청년담론/청년정치가 강도 높게 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청년 문제는 단순히 기존 정치권에서 이야기 되는 것을 넘어서 여러 청년단체들을 통해 해결을 요구받고 있다. 청년단체들은 ‘2016 총선 청년네트워크를 구성하고 4·13 총선에 대해 <12가지 요구안>을 선정했다. 12가지 항목들은 노동/주거/구직/일자리/소득/실업/부채/등록금/대학생활/교육/참여/제도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요구안에서 언어화되는 청년문제는 대학생활을 하고, “등록금으로 인한 부채에도 불구하고 일자리가 없어 실업상태지만 언제나 구직의사를 갖고 있는 청년의 상을 통과한다.


또한 이 요구사항에 담긴 수많은 해결법들은 궁극적으로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의 청년들도 광장이 아닌 투표현장에서 직접 정치에 참여했으면 좋겠다.”(고영득 기자, <총선 정책속에 청년의 삶있습니까>, 경향신문)는 인터뷰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정치에 직접참여할 수 있는 장소는 광장보다는 투표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민주주의가 제도로써 작용하는 형식적인 효과보다는 그 내용을 바꾸는 정치의 실현에 집중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정책화운동을 통해 청년문제와 청년운동의 중요한 요소는 투표소와 입법 요구를 통한 것으로 경험된다. 그렇지만 앞서 보았듯이 포기의 이중적인 속박 속에서, ‘N포세대청년 이미지 외부에 존재하는 청년들의 문제는 어떻게 언어화될 수 있고 의제화 될 수 있는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운동”-광장의 민주주의

 

전반적인 삶에 대한 감성이 무기력한 상황에서 청년이라는 세대가 자신의 문제들을 말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그것이 제도가 포용할 수 있는 범위로 한정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청년정치보다 민주주의 자체다. 민주주의 프로젝트The Democracy Project라는 이상한 제목이 붙은 책은 한국에서 <아무도 모르는 민주주의>라고 번역되었다. 이 책에서 인류학자이자 활동가인 그레이버는 정치체제에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운동으로 2011년 미국 월가점거운동을 바라본다. 이미 11표로 대의정치가 실현되고 있는 미국이라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왜 프로젝트라는 미완성의 관점으로 민주주의를 다시 사고해야 했을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언제 우리는 민주주의를 경험하는가?’ 라고 질문했을 때 우리는 투표/선거/정치인의 연설/정부/체제 따위를 상상한다. 민주주의의 기원을 따져볼 때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테네의 아고라로부터 이어져 오는 서구적 전통 정도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민주주의 또는 민주적인 어떤 것이라는 관념은 이러한 제도적인 전통을 항상 초과한다. 민주주의의 사전적 정의의 요지란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며 스스로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전을 통해 정리한 조금 투박한 정의이지만, 어찌되었든 민주주의란 투표나 선거와 같은 규칙들의 총합이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를 행사하고 개입하는 어떤 감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민주주의적 감성이 발생하는 장 역시도 제도와 무관하게 그것의 안팎에 위치할 것이다. 그레이버는 이렇게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상상되어왔던 전통적인 민주주의 개념을 기획된 이야기로 평가한다.

 

우리가 찾은 이러한 민주적 감성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아주 힘든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이야기를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하곤 했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형태를 갖춘 이야기다.” “이 판본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실제로 제도적 구조의 합의이고, 투표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고대 아테네에서 처음 발명되었고, 어찌된 이유에선지 거대한 서구의 전통 안에서 내부화된 것으로 남아있다.” (아무도 모르는 민주주의, 데이비드 그레이버, 2015)

 

이러한 인류학적인 탐사 끝에 발견되는 것은, 민주주의란 아테네부터 이어지는 정치에 대한 서구적 관념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적/공간적으로 복수적인 장소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감성들이자 문화들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제도일 수도 있지만 어떤 문화적인 차원에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은 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레이버는 월가점령운동을 청년운동의 맥락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여기서 미국 2008년 대선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미국 청년들은 이미 갖가지 부채와 빈곤을 경험하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이들은 모두 오바마가 세웠던 새로운 민주적인 가치들에 열광했다. 2008년 청년들의 선거 투표율은 그 직전의 대선에 비해 3배나 높았다. 뿐만 아니라 오바마 캠프 전략의 독특성은 많은 일반적인 청년들이 풀뿌리운동의 일환으로 캠프에 참가했다는 점이다. 캠페인을 통해 그들은 어쨌든 무언가 기존과 다른 것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고 그것이 대선까지 이어지며 운동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 당선 이후 리먼 사태가 야기한 세계적 수준의 경제위기에서 오바마는, 그레이버의 표현을 빌자면, “역사적 재앙에 응답하는 사악한 영웅적 노력을 기울인다. 경제위기를 만든 원인들인 금융업과 금융법 및 기타 산업들은 그대로 존속했고, “체제의 어떤 부분도 흔들리지 않았다.” 체제 내에서 진보적 변화가 사실상 제거된 것이다. 그 결과 청년들의 투표율은 다시 감소한다.


여기서 감소된 것은 투표율뿐만이 아니다. 제도를 통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신뢰 자체가 제거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정의 경험은 정치적 열정의 감소로 이어지지 않았고 아예 다른 방향성을 갖게 된다. 월가점령운동이 그 전환점이었다. 미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거리와 광장으로 나왔고 집단적인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단일하고 매끄러운 구호들이 아니라 광장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투박하고 난잡했던 토론들이다. “1천 개 혹은 2천 개의 그룹을 지켜본 경험, 민중의 지도구조 없이 집단적 결정을 내리는 것, 원칙과 연대만으로 동기부여를 받는 것은 그들의 정치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추정을 바꿀 수 있다.”

 


수식의 다양화, “광장들의 시공간을 위하여

 

따라서 오히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수많은 광장들의 정치다. 이전의 사회운동의 주체들이 삶의 현장에서 정체화되었다면, 현재 정치의 주체로서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광장의 시간이다. 일해서 잘 살 수 있는 세상의 믿음은, 굳이 여기서 반복하지 않더라도 깨졌다. 이 균열의 표현이 노오력이다. 제도에 적극적으로 편입되고, 편입되어 잘 살 수 있는 세상이라는 수식은 불가능해 보인다. 오히려 이 노오력이라는 비웃음을 끝까지 밀고 가서 일정한 수식에 편입되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필요할 것이다. 수식의 다양화가 가능한 세상 말이다. 그래서 정치의 시간이 쌓여야 하는 장소는, 제도의 최댓값이 아니라 그것과 무관한 외부에 있어야 한다. 무기력의 흐름을 단절시킬 수 있는 장소가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저 낙관적일까? 여기서 그레이버의 질문이 한국 사회에 다시 던져져야 한다. 정치 체제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운동이 왜 그토록 열광적인 민주주의적인 흐름을 만들었는가?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87 [불교미학] 9. 형상의 완결성을 파고드는 재료의 힘 : 공-산(共-産)의 미학(1) file oracle 2022.08.26 84
186 [불교미학] 8. 도래할 사건을 기다리며: 사건의 미학(하) file oracle 2022.08.19 104
185 [불교미학] 7. 누군가 들어설, 불상 앞의 빈자리: 사건의 미학(상) file oracle 2022.08.12 140
184 [중앙일보 2022-0810] 즉석에서 괴담 만들고 시도 써… 'AI 창작예술' 시대 열렸다 file oracle 2022.08.10 156
183 [불교미학] 6. 친근한 불상과 친원한 불상: 친원감의 미학(하) file oracle 2022.08.05 114
182 [불교미학] 5. 반개한 눈, 적정 속의 붓다: 친원감의 미학(상) file oracle 2022.07.29 124
181 [불교미학] 4. 어둠의 대기가 불상을 둘러쌀 때: 현묘의 미학 file oracle 2022.07.22 137
180 [불교미학] 3. 거대함도, 비장함도 없는 위대함: 현묘와 유현의 미학 [1] file oracle 2022.07.15 140
179 [불교미학] 2. 신의 나라 저편의 신과 바위 속에 숨은 부처 : 내재성의 미학 file oracle 2022.07.08 122
178 [불교미학] 1. 초월적 신성서 기원한 ‘성(聖)’ 불교예술개념 적절한가 file oracle 2022.07.01 310
177 [오영진 인터뷰] 에란겔: 다크투어_해방된 관객 file oracle 2022.06.11 251
176 [경향신문 2022-0524] 휴머니스트의 인질극 / 이진경 file oracle 2022.05.24 212
175 [경향신문 2022-0419] 우리 체르노빌의 늑대들은 ... / 이진경 file oracle 2022.04.19 162
174 [경향신문 2022-0315] 세 개의 특이점 사이에서 / 이진경 file oracle 2022.03.20 179
173 [오영진의 테크노컬처 리포트] EBS라디오 윤고은의 북카페 file oracle 2022.03.16 154
172 [경향신문 2022-0208] “모든 판사는 야해요” / 이진경 [3] file oracle 2022.02.08 517
171 [경향신문 2021-1228] 상식 이하의 실언과 상식 이상의 실언 / 이진경 [1] file oracle 2021.12.28 283
170 [경향신문 2021-1123] 공감의 폭력 / 이진경 file oracle 2021.11.23 225
169 [경향신문 2021-1019] 그늘 속의 기념비 / 이진경 file oracle 2021.10.19 149
168 [학술발표_오영진] 이주시대의 언어 :: 10.9(토) file oracle 2021.10.08 166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