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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2-0404]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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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누군가 들어설, 불상 앞의 빈자리: 사건의 미학(상)

: 불보살은 평화로운 삶과 연관된 비개인적 인물

서양 작품들은 그 주인공이 겪었던 사건·삶 담아내려 노력
불상들은 얼굴·형상 통해 재현해야 할 사건·삶이 따로 없어
개성 뚜렷한 작품 아닌 그게 그거인 상징물로 보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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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 상’(왼쪽). 경주 감산사 미륵보살상.

그림이든 조각이든, 혹은 탑이든 건축물이든 모두 그것을 보는 사람들을 전제로 제작된다. 하지만 보는 사람이 들어갈 자리가 있는가 아닌가는 다른 문제다. 단적으로 말해 관객이 들어갈 여지없이 ‘완결’된 작품이 있다면, 완성되어 있으나 관객이 들어설 자리를 남겨두는 작품이 있다. 서양의 미술작품 안에는 그걸 보는 ‘내’가 들어갈 자리를 따로 남겨두지 않는다. 작품에 필요한 정보나 지식이 필요하지만, 작품은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으며, 나는 단지 그 완결된 작품을 볼 뿐이다. 반면 불상들은, 심지어 산꼭대기 한 구석의 마애불처럼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는 경우에조차 그것을 볼 누군가를 향해 만들어져 있어서, 누군가 그 앞에 마주설 때 비로소 완결된다. 그 자체로는 완결되지 않은 채 완성된 작품이라 하겠다. ‘완결’과 ‘완성’은 이처럼 다른 것이다.

그런 불상들은 예술작품이라기보다는 대중들에게 형상으로 가르침을 전하려는 종교적 목적을 갖기에 그렇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작품과 예술적 작품의 경계는 결코 뚜렷하지 않다. 동일한 목적성을 갖지만 기독교의 작품들, 가령 ‘그리스도의 매장’ ‘수태고지’ 같이 종교적 교의의 요체와 직결된 극적 장면을 묘사한 작품은 그걸 보는 이의 자리를 별도로 갖지 않는다. 인물들이 주고받는 시선들은 서로의 대상에 정확히 가 닿으며 시선에 의해 방향과 형태가 정해지는 신체들은 서로 호응하며 하나의 전체로 완결되어 있다. 그들은 화면 바깥이란 없다는 듯 거기 그렇게 있다. 따라서 그 인물들에게 화면 바깥에 선 우리는 보이지 않으며 어떤 관심사도 아니다.

 불교 미술에서도 인도 스투파의 부조들이나 인도네시아 보로부드르 사원의 부조처럼 석가모니의 본생담이나 경전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재현하는 작품들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건을 재현하려 하는 한, 이는 피하기 힘든 일일 터이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거기서 이탈하는 작품도 있다. 고려불화에서 자주 그려지던 ‘수월관음도’는 서로 마주 보고 있지만 관음보살과 선재동자의 시선이 어긋나게 함으로써 그 사이에 그림을 보는 이를 위한 여백을 만들어 둔다. 어긋난 시선의 틈새 사이로 내가 끼어 들어갈 자리를 그림 안에 그렇게 만들어놓는 것이다.

사실 불교 미술작품은 이런 유형의 작품과 달리 대개 부처나 보살의 상들이다. 이 상들은 홀로 있든 협시한 인물들과 함께 있든 모두 맞은 편 자리에 서서 자신과 마주 볼 사람을 향해 만들어진다. 특히 마주선 이들의 눈을 향해 시선을 주고 있는 불상들은 그 앞에 보는 이의 자리를 만들어놓고 있는 셈이다. 경주 감산사 미륵보살상처럼 반개한 눈의 불상들은 시선을 바깥 세계로부터 거두어들임으로써 스스로 완결되는 듯하기에 보는 이의 자리를 시선을 통해 만든다 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그 불상들은 반개한 시선이 만들어내는 다른 세계의 대기를 바깥으로 풀어놓는다. 슬그머니 퍼지는 은근하지만 강한 매혹의 인력이 그 대기 속으로 보는 이를 불러들인다. 그런 식으로 그 불상들 역시 보는 이의 자리를 불상을 둘러싼 대기 속에 내주고 있는 것이다.

성당 앞 마리아 상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그렇다. 그렇다면 그건 홀로선 조각상의 특징 아닐까? 확실히 홀로 선 조각상들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가 기다리는 것은 그와 마주 설 내가 아니라, 그에게 닥쳐올 사건이고, 그 사건 속에서 상대할 자이다.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는 조용히 홀로 서 있지만, 괴물(용)과의 격전을 예감하는 긴장감과 단호함을 얼굴에 담고 서 있으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에는 다가올 골리앗과의 대결이 얼굴과 신체에 깃들어 있다. 과거에 현행화된 어떤 사건을 예견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사건은 재현되지 않는 방식으로 재현된다.

그 작품을 볼 누군가를 향해 제작되는 것을 애써 찾는다면, 초상화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서양의 화가들은 초상화를 그릴 때조차 마주 설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홀로선 조각상들처럼 그 얼굴에 깃든 어떤 사건이나 세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초상의 주인공이 겪었던 사건이나 그가 살았던 삶을 담으려 했다. 가령 렘브란트의 많은 자화상들은 같은 인물이지만 아주 다른 얼굴로 그가 당시마다 살았던 삶을 표현한다. 왕이나 교황의 초상이라면 영광이나 권세, 위엄과 성품 등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어했을 어떤 것들이 드러나 있다. 그렇기에 그 작품들에는 의미와 기호가 가득 차 있다. 그림 앞의 빈 자리는 그렇기에 비어 있지 않다. 누군가를 향해 항상-이미 발송되는 기호와 의미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불상이나 불화는 협시한 다른 부처나 보살들과 함께 서 있는 경우에도, 홀로 있는 경우에도 사건을 묘사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불상 또한 얼굴을 갖지만, 렘브란트처럼 어떤 인물이 겪은 어떤 사건을 표현하는 표정이 아니며, 불상들의 인격적 개성을 표현하려 하지도 않는다. 불상으로부터도 무언가 의미 있는 기호가 발송되지만, 어떤 개별적 특정성이 없는 기호들이다. ‘해탈’ ‘구원’처럼 모두 다 알기에 두드러진 의미가 없는 반쯤은 텅 빈 기호들, 그렇기에 수신한 사람이 알아서 채워야 할 기호들이다. 불상들이 각각의 개성이 뚜렷한 ‘작품’이 아니라 ‘그게 그거인’ 상징물로 보임은 이 때문이다.

홀로 있을 때조차 서양의 초상들이나 조각들에서는 어떤 개인이나 순간의 인칭적이고 개체적인 특징이 중요하지만, 불상들에선 구체적 인물의 삶과 개체성이 추상된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이 중요하다. 미륵불도, 아미타불도, 보현보살도, 관세음보살도 특정한 개인적 삶의 궤적을 갖는 인물이 아니라 깨달은 삶, 평화로운 삶과 연관된 비개인적이고 비인칭적인 인물이다. 심지어 ‘부처’로서의 석가모니조차 인도의 특정 시대를 산 구체적 개인에서 ‘깨달은 자’를 뜻하는 인물로 추상된 인물이다. 삶이 어떤 역사적 궤적을 그렸던 간에 누구든 깨달음을 얻는다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비개인적 특이성의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불상들의 얼굴이나 형상을 통해 재현해야 할 구체적 사건은 없으며, 묘사되어야 할 삶의 경험도 따로 없다.

그렇기에 거기 있는 불상이 석가모니불인지, 아미타불인지, 비로자나불인지, 미륵불인지 구별하지만, 사실 개체적 특징을 표현하는 상이한 형상을 갖지 않는다. 그래도 불상을 구별해주는 수인(手印)이나 지물(持物), 그것은 나름의 의미를 전하는 기호들을 방사하지만, 불상 앞에 마주서는 사람이, 가령 수인이 항마촉지인지 무외시인인지에 따라 특정화되는 다른 의미를 얻거나 하지는 않는다. 전법륜인조차 이미 과거 석가모니에 의해 현행화된 어떤 사건의 의미를 전달하려는 게 아니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건, 그 앞의 빈 자리에 들어선 이가 불상 속의 여래와 만나며 발생할 사건을 향해 있다.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려면 가능한 한 정확해야 하지만, 도래할 사건이란 수많은 방향으로 열려 있기에 그것을 기다리는 건 정확한 예측과 상응하는 재현이 불가능하고 그럴 이유도 없다. 불상마다 대응하는 수인이 있지만 엄격하게 ‘지키지’ 않고 만들어지는 일이 빈번함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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