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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2-0207]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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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거대함도, 비장함도 없는 위대함: 현묘와 유현의 미학

: 불상은 압도적인 힘서 오는 경외감과 아예 달라

숭고는 ‘아름다운 것’이 주는 무심한 평정과 달리 두려움 동반
평화로운 세상 아닌 영웅적 저항·죽음의 공포마저 감내하는 곳
불상은 부처의 위대함 표현하지만 평정 깬 불안 야기하지 않아
 
2022-0715_불교를 미학하다3.jpg
서양 예술이나 미학이 천착했던 것이 비극이었으며, 희극이나 웃음에 대한 진지한 저술이 처음 씌어진 게 20세기였다.
벨라스케스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왼쪽)와 ‘석가모니 고행상’(오른쪽).
 
고딕성당은 화려한 ‘기적의 빛’을 수직적인 신의 나라 안으로 끌어들였지만, 그 빛은 보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없음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무한’의 거리가 인간과 신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멀리 절대적 피안의 세계에 있었지만, 인간이 사는 피안의 현세에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며 죽은 신의 아들이 있었고, 그를 낳은 세간의 가족이 있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의 부름에 응답하고 배신하고 다시 되돌아오던 역사적 인물들이 있었다.

초월성의 경험은 이런 이들의 신체를 둘러싸고 가시화된다. 종교적 초월성을 표현하는 ‘숭고’라는 미적 범주가 이로부터 탄생한다. 숭고의 일차적 형상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의 ‘거대함’과 신성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끝을 목적으로, 목적을 원인으로, 원인을 기원으로 치환하는 목적론적 사고 안에서, 더없이 거대한 고통은 인간의 죄를 짐 진 ‘위대한’ 목적이 되고, 그것을 짐 지신 분의 탄생의 이유가 된다. 탄생의 순간으로 옮겨간 이 위대함은 이후 그분 삶의 행적의 모든 순간으로, 심지어 과거에까지 거슬러가며 그와 결부된 인물들로 확장된다. 고통의 형상에서 탈각된 이 성스러움은 숭고의 이차적 형상이다. 이렇게 신으로부터 이탈한 위대함과 성스러움은 세속적인 영역으로 확장되며 신과 무관한 세속적 인물들의 위대함으로 다시 확장된다. 이러한 세속화는 숭고의 개념이 종교로부터 독립될 때 완성된다.

숭고의 개념을 세속화한 이들이 ‘롱기누스’라는 그리스인의 문헌을 찾아낸 건, 신 없이 숭고를 정의하려는 이 세속적 관심이 좀더 먼 기원을 찾고자 하는 근대적 욕망과 손잡은 결과였을 것이다. 롱기누스는 이를 ‘고결한 패배’가 주는 감동으로, 그에 따른 상승의 일체감으로 정의한다. 이는 기독교적 초월성이 지배적 미감으로 자리 잡기 이전의 감각에 속하는 것이었다. 근대인 에드먼드 버크는 숭고란 신의 무한한 힘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감정으로 재정의한다. 롱기누스와 반대로 무한한 것에 참여할 수 없는 유한성의 경험을, 그에 따라 공포와 두려움을 동반하는 불쾌한 쾌감을 숭고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를 ‘거대한 크기’라는 수학적 내지 물리학적 개념으로 정의하며 좀더 확실하게 세속화한다. 너무 거대하여 감각적으로 재현하는 상상력마저 와해시키는 대상, 그러나 무한을 향해 상승하려는 이성의 ‘이념’으로 인해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초감성적 능력을 일깨우는 대상을 통해 숭고를 정의한다. “숭고란 단적으로 큰 것”, 즉 “일체의 비교를 넘어서 큰 것”이다.

산사태나 지진처럼 거대한 힘을 위험에서 벗어난 지점에서 대면할 때 우리는 그 힘에 경탄하고 감동하며 ‘숭고’의 감정을 경험한다. 이러한 감정은 그 거대한 힘과 맞서려 하는 ‘선택’을 통해 그렇게 선택할 수 있는 자에 대한 감동으로 전환된다.

칸트가 대비하듯, 숭고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숭고의 감정은 ‘아름다운 것’이 주는 무심한 평정심과는 반대로 두려움마저 동반하는 동요와 짝지어 있다. 칸트는 상상력을 뛰어넘는 그 거대함을 이성의 형식인 ‘이념’이 담아낸다고 본다. 그러한 ‘이념적’ 판단을 통해 그 거대한 것과 맞설 용기를 갖게 된다. 칸트가 ‘자유’라고 명명하는 이 이념을 통해 숭고는 이제 ‘인간’에 속하는 위대함으로 치환된다. 목숨을 걸고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의연하게 들어가는 영웅의 비극이 주는 감동은 이로부터 발생한다. 평정심과 쾌감을 주는 미감과 달리 슬픔과 비감을 동반하는 감동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고통의 거대함을 넘어서 초월적인 것을 향해 상승하는 고양감을 얻게 된다.

‘모나리자’나 ‘성모자상’과 같이 평화롭고 자애로운 그림들에서 광배나 표정으로 표현된 ‘초월성’은 쉽게 종교적 신성을 상기시키지만, 칸트의 개념을 엄밀하게 사용하자면 이는 ‘숭고의 분석학’이 아니라 ‘미의 분석학’에 속한다. 즉 무심한 관심의 평정심 속에서 ‘아름답다’고 느끼게 되는 미적 대상이다. 끼어들 수 없는 무한이나 압도적 거대함으로 정의되는 숭고의 미학이 전형적으로 가동되는 곳은 ‘은총’이 느껴지는 평화로운 세상이 아니라 영웅적 저항이나 희생이 발생하는 참혹한 비극이다. 삶의 기쁨이 피어나는 곳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마저 감내하는 곳이다. 서양의 예술이나 미학이 천착했던 것이 비극이었으며, 희극이나 웃음에 대한 진지한 저술이 처음 씌어진 게 20세기였다는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점에서 보자면 숭고미의 개념에 부합하는 것은 ‘성모자상’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같은 그림이다. 많은 화가들에 의해 빈번히 그려지던 이 그림 가운데서도 벨라스케스의 이 그림은 ’초월성‘의 도상인 광배마저 최소 크기로 축소시킨다. 못 박혀 늘어진 신체에 스며들어 잠식하는 새까만 어둠은 그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크기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함을 보여준다. 이는 또한 그가 짐 지려 했던 인간의 죄의 크기이기도 할 것이다. 이는 보는 이에게도 고통과 비감을 동반하는 감정을 야기한다. 그가 마주해야 했던 고통의 거대함, 그에 대한 놀라움과 두려움, 그로부터 나오는 경외감, 정확하게 이런 것들의 복합체로서의 숭고미의 탁월한 사례를 여기서 본다.

불상에서 이런 숭고의 미학을 찾는다면, 간다라 시대의 유명한 석가모니 고행상을 들어야 할 것이다. 다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듯한 고행의 압도적인 크기가 홀쭉한 배와 앙상한 뼈, 돋아난 핏줄과 움푹 패인 눈두덩으로 탁월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거대한 고통과 맞선 수행자의 용기는 숭고의 감정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부처의 형상 가운데 이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이 불상을 제외하면, 우리가 아는 어떤 불상도 이런 형상을 취하지 않는다. 간다라의 ’그리스적‘ 기원을 상기시키는 얘기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이는 어쩌면 인도나 동양이 아니라 서구적 감수성에 속한 것이라고 해야할 지도 모른다. 반면 예수의 형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달린 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처와 숭고를 연결하려는 시도에 대해 물어야 한다. 석가모니나 일체의 부처들이 위대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중생을 압도하는 거대한 힘, 세간의 우리로선 끼어들 수 없는 무한의 힘은 아니지 않은가? 불상을 통해 부처의 위대함을 표현하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참혹한 죽음마저 감수하는 고결한 패배를 향해 의연히 나아가는 비극적 영웅의 위대함과는 거리가 너무 먼 것 아닌가? 그러한 불상에서 감지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이 주는 쾌감이 아니라 평정한 상태를 깨며 불안과 동요를 야기하는 불쾌감에서 기인하는 쾌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상에 대해 숭배와 구별하기 힘든 존경의 마음을 갖지만 그것은 압도적인 힘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경외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 아닌가?

불상을 보면서 우리는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을 본다. 그러나 ‘금강경’은 거기서 정작 보아야 할 것은 부처의 모습이 아님을 설한다. “모든 상 있는 것에서 상 없는 것을 본다면 여래를 보리라.” 문제는 이 ‘여래’와 숭고를 등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숭고의 미학과 다른 상 없는 ‘여래’의 미학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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