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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22-0208] 이진경의 생각의 그늘 https://m.khan.co.kr/series/articles/ao398
“모든 판사는 야해요”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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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우리를 속박함에도 우리는 어디서나 규칙이나 법을 만든다. 서로를 힘들게 하는 일들을 저지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법은 본질적으로 ‘나쁜 짓’에 대해 ‘하지 말라!’라는 명령문의 형식을 취한다. 이런 이중부정을 논리학에선 긍정이라고 가르치지만, 좋은 일을 하는 것과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같지 않다. 그렇기에 법은 가능하면 없거나 적은 편이 좋다. 법이 많고 법이 전면에 드러나는 사회는 힘든 사회다. 가장 힘들고 안 좋은 사회는 준법이 강조되는 사회다. 법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란 말인데, 그것은 사람들이 법이 지키기 힘들거나, 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을 납득하기 힘든 경우임을 뜻한다.

흔히 법이란 선하다고 믿는 덕목을 권장하려고 만들어진다고 믿지만, 칸트는 반대로 법을 지키는 게 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도덕이란 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처럼 법에 무조건 준수해야 할 초월적 지위를 부여했지만, 사실 법을 지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첫째, 우리가 준수해야 할 법을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이 너무 많아서, 법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그걸 다 알지 못한다. 더구나 해마다 국회가 열릴 때마다 새로운 법이 끊임없이 만들어지지 않는가. 둘째, 법을 아는 이들도 법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명확하게 쓴다 해도 법조문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담지 못한다. 더구나 법은 너무 많고 서로 상충되는 것도 있기에 어떤 법을 어떻게 적용할지에 따라 아주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이 때문에 어떤 검사, 어떤 판사를 만나는가에 따라 아주 다른 판결을 얻게 된다. 누구는 표창장 조작 수사한다고 60여군데 압수수색을 하면서도, 주가조작 혐의로 동료들이 모두 구속된 ‘작업’으로 많은 돈을 번 어떤 분은 소환도 하지 않는 검사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법에는 ‘정의’가 필요하다. 모든 법이 스스로 정의를 자처하지만, 어떤 법도 정의가 아니다. 법을 공부하는 이들이 좌우명으로 삼는 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지 “법을 세워라!”가 아니다. 법을 다루는 이들의 규범에서 보아도, 법이란 정의를 세우기 위해 사용하고 필요하다면 다듬거나 바꾸고 변형시킬 재료일 뿐이다. 판결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같은 법도 날을 세우며 날카로워지거나 무디어지면서 포용력이 커진다. 철학자 데리다가 “법관들은 판결할 때마다 입법을 하는 것”이라고 했던 건 이 때문이다. 판결이란 정의를 향해 해석이나 적용의 형식으로 ‘법을 세우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현명한 판결을 자주 보면서 판사들에게 희망을 걸게 되는 사회에서나 설득력을 가질 것 같다. 요양병원 부당이득 같은 똑같은 사안에 똑같은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동료들에겐 모두 죄가 되는 사실이 어떤 한 사람에겐 죄가 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보는 곳에서, 저런 생각에 동의하기는 불가능하다. 개나 소나 남발하는 표창장 위조에 징역 4년을 때리고, 사진 증거까지 확실한 법무차관의 성 상납엔 무죄를 선고하며, 이른바 ‘사법농단’으로 사법부의 공정성 자체를 휘저어놓은 판사들은 벌금과 견책으로 무마하는 판결들을 단 하루에 봐야 했던 날, 나는 판사들을 정의의 주역으로 띄워주는 데리다의 저 멋진 문장을 머리에서 새까맣게 지워버렸다.

이번 대선이 유난히 피곤한 것은
검사 출신 후보로 보게 된 검사의 ‘추한’ 장면과
그에 질세라 끼어드는 판사의 끝없는 ‘야한’ 장면
그리고 극단적 편파성의 기사들을 읽어야 하는 것

 

사적 속내 드러내는 판사는 야하고

우리는 저런 검사들의 행위나 판사들의 판결을 보면서 그것이 정의로운지 판단한다. 정의란 판결로 ‘입법’하는 판사들이 아니라, 차라리 판결하는 판사들을 보고 판단하는 쪽에 있다. 다른 어디보다 법복 입은 이들에게 정의가 중요한 것은, 그들의 행동이야말로 정의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의란 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건 “정의를 세우는” 게 아니라 “법을 세우는” 것이다. 정의란 특정 판결은 물론 법조차 물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그 물음을 통해 때론 있는 법도 부수고 없는 법도 만들게 하는 것, 그것이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법의 편파성과 자의성을 보여주는 검사나 판사들이 무대를 지배한다면, 그때야말로 법을 겨냥한 정의가 절박하게 요청되는 때이다. 법을 다루는 분들이 통치자의 자리를 점하려 할 때만큼 정의가 절박한 때도 없다.

카프카의 <소송>에는 잊기 힘든 인상적인 문장이 있다. “모든 피고는 아름다워요”라는 말이 그것이다. 변호사 사무실 직원인 레니의 말이다. 정의가 법과 다르며 법조차 물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면, 정의를 세우는 것은 법과 충돌하며 물음을 던지는 이들이라 해야 한다. 판사들이 판결할 때마다 입법한다고 추켜올리는 말조차 법과 충돌하며 물음을 던지는 자가 없다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법에 따라 판결하는 자보다는 차라리 법과 충돌하는 자로서의 피고가 정의의 주역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모든 피고는 아름다워요”라고 할 때 레니는 이런 의미에서 정의의 주역인 피고의 매력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카프카의 레니라면, 최소한의 균형감마저 상실한 법적 판결들을 지켜보며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모든 판사는 야해요.” ‘야하다’는 말은 단지 성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다. 공공성의 영역, 아니 공정성이 의무인 영역에서 자신의 사적인 속내를 드러내는 분이 있다면, ‘야하다’는 말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자신이 사적인 친분이나 그로부터 연원하는 개인적 판단, 그리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감정이나 이해관계 등에 따라 특정인에 대해, 심지어 그 공범들과 상반되는 판결을 하는 판사만큼 자기 속내를 내놓고 드러내는 이는 찾기 힘들다. 그렇다고 모든 판사가 다 그렇다 할 수 있나? 맞다, 지금처럼 법이 편파성을 주도하는 시대에도 종종 뜻밖의 공정한 판결을 하는 분들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사실 포르노처럼 그저 속살을 온통 까놓을 뿐이라면 유혹의 힘을 갖지 못한다. 그건 야하다기보다는 추하다. 속살이 드러나면서 가려질 때 우리는 유혹의 힘에 이끌린다. ‘야하다’는 말은 그때 비로소 제 의미를 갖는다. 저렇게 속내를 까놓는 판사들은 아마 저런 동료들을 믿고 그걸로 자신을 가릴 수 있다고 믿는 것 아닐까? 그렇게 그들은 동료들이 실행해주는 공정성의 베일 아래 자신의 욕망을 법의 이름으로 드러냄으로써, 법을 유혹적인 물음의 대상으로 밀어넣는 것이다.

포르노나 범죄영화에 아무리 환장한 사람도
몇 달째 그걸 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사적 이익 까놓고 쫓는 검사는 추해

검사들에 대해서라면 레니는 뭐라 말할까? 법이 요구하는 형식적 공평성도, 사람들이 요구하는 물리적 균형감도 전혀 갖지 못한 채, 사적인 이익을 위한 행위를 노골적으로 까놓고 하는 장면은 과다노출의 포르노에 가깝다. 자신들의 집단적 이익을 위해, 수사권을 가진 자에게 요구되는 최소 규범마저 어기며 비밀을 캐거나 그걸로 얻은 비밀을 특정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당연히 수사해야 할 사람은 묵인하고 사소한 죄는 먼지 털듯 털어 죄명을 최대한 증폭시키는 장면은 할리우드 범죄영화를 닮았다. 거기에도 팬티 정도는 입어야 한다고 하는 분들이 있지만, 이런 분들은 ‘따 당하고’ 배제된다. 노골적으로 까놓고 공적 폭력을 이용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이런 장면을 본다면 레니는 말할 것이다. “모든 검사는 추해요.”

더불어 이런 분들이 모두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며 그들의 스피커가 되어주면서도, ‘진영논리’나 ‘공정성’ 같은 말을 남발함으로써 독점하고, 이로써 그들이 멋진 옷을 입고 있다며 우리를 설득하려는 분들도 있다. 물론 그런 편파적 공평성과 일방적 공정성에 불편해하며 그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의 목소리는 작아서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레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기자들은 다들 웃겨요.”

대통령 선거가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 벌써 몇 번이나 치르는 선거지만, 이번 대선만큼 피곤한 선거는 없었던 것 같다. 네거티브가 지배하는 선거라서? 그게 없던 대선이 어디 있었나? 네거티브가 문제라면, 그보다는 오히려 ‘남혐’ ‘여혐’ ‘외국인 혐오’ 같은 대중의 네거티브한 혐오감에 왔다 갔다 편승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걸 부추기는 네거티브가 더 문제다. 이번 선거가 유난히 피곤한 것은, 검사 출신 후보 때문에 보게 되는 검사들의 ‘추한’ 장면과 그에 질세라 옆에서 끼어드는 판사들의 ‘야한’ 장면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인물이 어떻든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전의를 다지며 ‘웃기는’ 공평성으로 극단의 편파성을 응원하는 기사들을 매일 읽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무리 포르노나 범죄영화에 환장을 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몇 달째 그걸 계속 보고 있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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