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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21-1228] 이진경의 생각의 그늘  https://m.khan.co.kr/series/articles/ao398

상식 이하의 실언과 상식 이상의 실언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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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분들이 많지만, 철학을 하는 사람은 사실 그런 바람을 깨며 살고자 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들 믿지만, 사실 우리는 많은 경우 생각 없이 산다. 상식 덕분이다. 상식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상식이 생각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들 하지만, 실은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동물이다. 가령 ‘숙련’이란 생각 없이 어떤 일을 잘할 수 있게 된 상태를 뜻한다. 영어를 잘한다 함은 하려는 말이 아무 생각 없이 영어로 튀어나옴을 뜻한다. 하나하나 집중하여 생각하며 못을 박는 사람은 숙련된 목수가 아니라 초보자다. 축구나 탁구도 그렇다. 상식이 있다 함은 이런저런 것을 보았을 때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를 앎이다.

준비된 답들의 집합이 상식이다. 준비된 답이 있으니 생각할 것도 없다. 이처럼 패턴화된 판단은 패턴화된 행동으로 이어진다. 별 다른 생각 없이 ‘정상적’ 행동을 하게 된다. 상식이 통하지 않게 될 때, 그러나 상식으로 내칠 수 없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사유를 업으로 삼으며 다른 이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촉발하려는 게 철학자라면, 상식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거슬러가야 마땅하다. 상식으로 쉽게 내칠 수 없는 것을 불러내 상식이나 통념이 깨지는 지점으로 밀고 가야 한다. 상식이 어떤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한 관념이란 점에서 ‘시대정신’(헤겔)에 속한다면, 상식에 반하는 종류의 사태나 생각은 그 시대정신에 반한다는 점에서, 나아가 그것에 균열을 야기하려 한다는 점에서 ‘반시대성’(니체)을 갖는다.

상식이나 양식을 깨는 언행이라고 언제나 사유를 촉발하는 것은 아니다. 상식을 압도하는 힘이 있는 것만이 사유를 촉발한다. 상식이 밀고 가는 기관차를 정지시킬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기차에서 내려 보이지 않던 세상에 눈을 돌리게 된다. 베냐민 식으로 말하자면, 철학이란 상식의 기관차를 세우는 ‘비상정지 브레이크’다. 상식 이하의 언행은 상식의 기관차를 정지시키지 못한다. 상식에 부딪혀 부서지고 깨어진다. 상식의 중요성을 역으로 정당화해준다.

그러나 상식 이하의 언행도 생각도 때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아니,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 싶은 경우가 그러하다. 이 또한 시대정신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반시대적’이라 할까? 아니다. 이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생각이 아니라 이미 지나가 버린 지 오래인 것이니 ‘시대착오’라 해야 한다. 상식의 바깥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너무 낡은 상식이어서 잊혀진 통념이다. 그처럼 과거에 속한 생각들이, 유령처럼 과거의 모습 그대로 되돌아올 때 우리는 놀란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과의 조우에서 놀라는 게 아니라, 무덤 속에 묻혀 있다고 믿었던 것의 부활에 놀라는 것이다.

미래 이끌겠단 분의 입에서 시대착오적 발언이 반복되는 것은
결코 실수가 아니고 앞으로도 반복될 것

지식이 많아 그렇다고 일부선 옹호하지만 그 지식은
현재를 감당하기엔 너무 모자란 지식, 과소한 지식이다

 

반복된 실언에 숨겨진 욕망은 뭘까

향수 어린 기억의 황혼 속에서 사는, 인생의 대부분이 이미 과거에 속하는 분에게서 이런 언행을 본다면, 우리는 놀랄 때조차 이해하려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런데 나라와 국민의 미래를 이끌고 책임지겠다는 분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튀어나올 때, 우리는 놀라는 걸 지나쳐 경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단단한 과거의 상자 속에 갇힌 영혼과 손을 잡게 될 때, 우리의 미래를 시간의 무덤 속에 묻게 되는 건 아닌가 불안해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경악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음에 눈 돌리게 하고 근본으로 돌아가 사유하게 한다고 말한 적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경악이 있음을 그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이란 도달점을 알 수 없는 가능성의 검은 심연 앞에서 느끼는 현기증이라고 한 적이 있지만, 머리가 부딪칠 듯 바닥이 뻔히 보이는 얕은 풀을 바라보며 떠밀려 올라간 다이빙대에서 느끼는 불안이 있음을 그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민주화운동’을 하는 이들을 외국에서 수입된 이념의 포로라고 비난하는 것은 한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한 시대의 상식이었다. 최저임금이 과도하다는 말도, 주 52시간 노동이 과도하다는 말도 다르지 않다. 손발노동은 아프리카에서나 하는 것이라는 말은 노동의 미래에 속한 얘기라 해야 할까? 그게 아니라 아프리카에 대한 과거의 천한 통념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 얘기를 하면서 가사나 노동에 매인 자들은 자유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으므로 정치에 참여하게 해선 안 된다고 하던 정치철학자도 있었으니,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은 자유가 무언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 모른다”는 말은 그나마 좀 낫다고 해야 할까? 반대일 것이다. 정치의 중심에 있는 대통령 후보의 그 말이 놀라운 것만큼이나, 그 정치사상가의 생각 또한, 아무리 그리스 타령을 한다고 해도, 놀라울 만큼 낡은 시대착오라고 해야 한다.

과거 없는 현재가 없듯이, 과거의 상식에서 자유로운 사람도 없다. 그렇기에 과거를 미래가 있는 방향이라고 오인한 발언을 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해야 한다. 상식이란 믿음 아래 내 입에서 나오는 말에 남들이 놀라는 일이 어찌 없을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반복이다. 반복되어 나오는 언행은 습관대로 움직이는 신체만큼이나 그의 현재에 속한다. 더구나 이미 누차 많은 이들이 놀라고 경악했으며 그런 사실을 알기에 조심했을 텐데도 시대착오적 발언이 반복된다면, ‘실언’은 결코 실수가 아니다. 그는 그 발언이 속한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시대착오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실언에 대해서 유심히 볼 것을 설파한 것은 프로이트였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국회의장이 정기국회 개회선언을 할 자리에서 폐회를 선언했을 때, 그 사소해 보이는 실언에는 국회가 어서 끝났으면 하는 그의 욕망이 함축되어 있었다. 국회가 개회되면 그는 어떤 비리로 인해 국회 윤리위원회에 소환될 예정이었던 것이다. 결혼한 뒤 얼마 안 되어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편을 결혼 전 이름으로 불렀다는 조카의 웃음 섞인 말에서도 그는 어떤 무의식적 욕망을 발견한다. 그의 관찰을 증명하듯, 그 조카는 얼마 뒤 이혼한다. 결혼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 헤어지고 싶다는 욕망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 후보의 반복되는 실언에서 우리는 어떤 숨겨진 욕망을 읽어내야 할까?

상식을 넘나들며 우리의 상식에 아직 없는 세상을 상식 속으로
불러들이느라 실언하는 정치가가 있으면 좋겠다

 

공약에 현실성이 아닌 꿈이 없는 것

물론 우리 대통령 후보의 실언은 반복되는 그의 해명처럼, 맥락을 보고 진의를 따져보면 어떤 식으로든 이해될 수 있는 말들이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가 놓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그가 한 말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해서 경악하는 게 아니라, 그의 말에 함축된 진의를 이해해서 경악했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국가가 도와줘야 한다”는 상식적인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은 자유를 모르고 자유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전제에, 거기 함축된 ‘진의’에 경악한 것이다. 사실 어떤 말도 거기에 함축된 전제나 배경지식을 드러내며 말해진다. 우리는 항상 말하는 것 이상을 말하고, 듣는 것 이상을 듣는다.

나는 이런 반복이 그의 ‘무식’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를 감싸려는 분들 말대로 “지식이 많아서” 그렇다는 생각이다. 그가 과거에 읽었던 책들, 그가 동료들과 둘러앉아 술잔을 돌리며 주고받던 이야기들로부터 형성된 지식들 등등. ‘무식’ 때문이라면 그것이 드러났을 때 부끄러워하며 배우려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자신의 진의를 다시 한 번 말하며 가르치려 한다. ‘꼰대’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리하는 것은 지식이 있고, 그 지식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과도한 지식이다. 지식이 과도하니, 배울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실언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그를 감싸려는 분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그 지식은 현재를 감당하기엔 너무 모자라는 지식, 과소한 지식이란 사실이다. 대중의 상식을 넘어선, 상식을 미래로 인도할 지식이 아니라, 대중의 상식보다 아래에 있는, 상식에 과거의 족쇄를 채우는 지식이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과소 지식과 확신으로 가득한 과도 지식의 기묘한 공존이 거기에 있다.

정치가는 철학자가 아니니, 상식을 정지시키는 브레이크를 그들에게 내줄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상식 이하의 정치가도 싫지만 그 때문에 상식적인 정치가가 득세하는 것도 불행이다. 상식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넘나들며 우리의 상식에 아직 없는 세상을 상식 속으로 불러들이느라 실언하는 정치가가 있으면 좋겠다. 공약(空約)이나 허언이 될 수 있더라도, 상식의 벽에 갇힌 상상력에 작은 날개를 달아줄 분이 있으면 좋겠다. 상식 이하의 실언이 아니라 상식 이상의 실언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과거 시제의 실언이 아니라 미래 시제의 실언을. 미래를 약속하는 정치인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약속에 현실성이 없다는 비판이 아니라 차라리 거기에 꿈이 없다는 비판,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비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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