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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21-1123] 이진경의 생각의 그늘  https://m.khan.co.kr/series/articles/ao398
공감의 폭력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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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감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공감이란 어떤 대상에 ‘감정이입’을 하는 심리적 작용이다. 감정을 이입하는 작용인 만큼 공감은 대개 나와 유사한 면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나와 유사한 대상들과 집단을 이루며 살아야 하는 한 필수적인 감각이고 능력이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공감은 대개 ‘약자’들, 피해자나 핍박받는 이들에 대한 공감을 뜻한다. 개를 학대하는 인간을 보면, 같은 종인 인간에겐 분노하고, 종을 달리하는 개에게 공감한다. 공감의 요구는 대개 고통을 향한다. 남들의 기쁨에 공감하지 않는다고 비난받지는 않는다.

감정의 작용 자체가 실은 그러하다. 신경과학자 이나스에 따르면, 감정이란 적으로 보이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상대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식별하기 이전에 재빨리 몸을 움직이도록 반응하는 ‘증폭장치’다. 그래서 감정은 신속성을 위해 정확성을 포기한다. ‘저게 어제 내 동료를 잡아먹은 놈 맞나?’를 정확하게 판단하려 하던 것들은 대개 잡아먹혀 죽고, 오인이든 아니든 일단 도망부터 치고 본 것들이 살아남아 진화한 능력이 감정이다. 따라서 감정은 나쁜 일에 민감하다. 기억도 그렇다. 먹이나 친구에 대한 기억은 ‘다음’이 있지만, 적에 대한 기억은 ‘다음’이 없다. 한 번의 오판이면 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일에 대해선 대충 넘기지만 나쁜 일에 대해선 아주 민감하다. 좋은 일은 쉽게 잊지만, 나쁜 일은 잊지 못한다. 그래서 행복하기 어렵다. 엔간하면 좋은 일로 판단해야 기쁠 텐데, 나쁜 일은 빨리 잊고 좋은 일을 오래 기억해야 행복할 텐데 그렇지 못하니 말이다.

공감이란 미리 온 감정이다. 상대방의 처지에 나를 이입하는 능력이다. 남들의 고통에서 내게 언젠가 도래할 고통을 예감하고, 그걸 피하기 위해 준비하는 능력이다. 공감이란 미래시제의 감정이다. 이는 언제나 적에게 잡아먹힐 위협 속에서 살아야 하는 동물적 삶에서 매우 중요한 능력이다. 그렇기에 공감능력은 쉽게 ‘본성(nature)’을 뜻하는 자연(nature)과 동일시된다.

"공감의 시대라고 하지만 / 지금은 공감의 힘으로 / 적을 향해 칼을 겨누는 / 무서운 공감의 시대 같다"

그러나 약자에 대한 공감은 그를 핍박하는 강자에 대한 반감과 분노를 짝으로 한다. 하여, 반감 없는 공감은 없다. 그런 분노를 드러내는 것도 공감의 한 형식이다. ‘공감의 시대’인 지금,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보편적 덕목으로 예찬된다. 역으로 그것이 없다고 보이는 이들은 ‘사람도 아닌 자’로 비난받는다. 또 공감능력이 이처럼 ‘자연’이란 말로 ‘전체’가 되고 ‘모두’라는 말로 인간의 ‘보편성’이 될 때, 거기에는 ‘반감’이 동반되어 있음이 망각된다. 그 반감이 추동하는 분노가 어떤 대상을 겨냥할 때 공감은 더없이 가혹한 폭력이 된다. ‘자연’이나 ‘인간’의 바깥으로 대상을 추방하는 폭력이 된다.

더구나 공감은 ‘감정’이기에 논리나 이유를 묻지 않는다. 로봇개발자가 자신이 만든 로봇을 발로 차는 걸 보면 이유를 묻지 않고 학대라 단정하며, 로봇 박람회에서 로봇을 밀어 쓰러뜨리는 것이면 이유를 말해도 듣지 않는다. 공감의 테두리를 벗어났음을 비난하는 말 하나면 충분하다: “어떻게 저럴 수가!” 전문가로서의 확신을 갖고 단언하기도 한다: “소시오패스!” 이유를 묻지 않는 이런 비난이 전파되며 공감의 폭과 강도를 얻으면, 이제 이 비난은 강력한 폭력이 된다. 이유를 묻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묻지마 폭력’이 된다.

 

미국의 늑대·나치, 공감 폭력 흑역사

미국의 늑대를 덮친 참혹한 역사는 반감의 칼을 든 공감의 폭력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늑대는 멸종을 향해 떠밀려간, 공감하기 충분한 약자라 하겠지만 1900년대 초 미국에서 늑대는 그렇지 않았다. 약자인 선한 양들을 잡아먹는 ‘강자’, 즉 악한 동물이었다. 1901년 취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해로운 들짐승 박멸’을 위한 공공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1905년 설립된 미국 농업부 생물조사국(BBS)과 그해 기포드 핀쇼가 창설한 산림청은 늑대를 겨냥한 대대적인 ‘자연보호운동’을 벌인다. 늑대는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정화’되어야 할 적, ‘자연’의 바깥에 있는 처분대상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 200만마리에 이르던 늑대는 1920년경이 되면 대부분의 주에서 찾아보기 힘든 동물이 된다. 그다음은 코요테였다. 1915~1947년 200만마리가 죽어나갔다. 늑대와 코요테는 “도덕적인 열정에 집착하던 미국인들의 분노의 대상”이었던 “범법자들”이었던 것이다(워스터, <생태학, 그 열림과 닫힘의 역사>)

"약자에 대한 공감 근거로 / 사실과 이유 따지지 않는 / 반감과 분노가
여성과 남성, 보혁·빈부 등 / 여러 범주를 넘나들며 / 반감 선동하고 분노 증폭"

"폭력의 정지 선고 뒤에도 / 반감들은 남아있어 / 날 세운 힘겨운 세상 지속 / 지옥은 멀리 있지 않다"

이런 박멸에 대해 비판적이던 생물학자 스탠리 영마저 늑대란 “피에 굶주려 살인을 하는 100% 죄인”(같은 책, 344)이라고 했다는 사실은 더욱 인상적이다. 자격을 가진 ‘전문가’가 한 말이었지만, 이는 자연에 속한 사실이 아니라 미국인에게 속한 감정을 대변한 것이었을 뿐이다. 생물학자마저 쉽게 공유했던 이러한 반감은 양과 사슴 같은 약자들에 대한 전반적 공감의 뒷면이었다. 잡아먹히는 동물들이 느꼈을 고통에 대한 공감이 ‘자연보호’와 ‘정화’라는 이름 아래 대대적 학살을 낳은 것이다. ‘박멸’을 명시적으로 추구함에도 폭력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이 최대치의 폭력은 반감과 분노를 동반하는 섬뜩한 대중적 공감의 산물이었다. 이솝이나 그림 형제 또한 이 박멸에 책임이 있음이 틀림없다.

우리에게도 유사한 역사가 있다. 1970년 1월26일 시작되어 80년대까지 지속된 ‘전국 쥐잡기 운동’이 그것이다. ‘해로운 집짐승을 박멸하자’며 매년 2회 전 국민이 정부가 나눠준 쥐약을 놓는 대대적인 캠페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쥐를 보기 힘들다. “아니, 그럼 집에 쥐들이 돌아다니는 걸 그냥 두자고?” 동물은 물론 로봇개에 대해서까지 공감하는 시대이니 이런 반문은 없으리라고 믿어도 좋을까? 그럴 거 같지 않다. 로봇을 발로 차거나 뒤집은 걸 비난하는 분들이 쥐나 뱀, 지네, 지렁이가 겪어야 하는 치명적 고통에 공감하리라고 생각하긴 쉽지 않다. 무서운 ‘종차별주의’가 우리의 동물적 공감 뒤에 숨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공감은 자연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으며 공평하지도 않고 본능적이지도 않다.

이러한 사태는 단지 동물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동물보호법, 사냥금지법, 자연보호법을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제정한 것은 히틀러의 나치정부였다. 동물의 고통에 공감하여 최초의 동물보호법을 만든 나치가 엄청난 수의 사람을 학살한 아우슈비츠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곤혹스러워 한다. 그러나 고통의 감각이 없는 로봇개에게 공감하면서 고통의 감각을 확실하게 표현하는 쥐나 뱀, 지네에게 기겁하는 우리의 반감 또한 곤혹스럽긴 마찬가지다. ‘자연’ ‘생명’ ‘동물’ ‘인간’이란 집단에, 즉 우리가 속한 집단에 해가 된다고 느끼는 한, 어떤 것도 그 집단적 반감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우리’의 공감이 사람에 속하는 어떤 개체를 ‘인간’ 바깥으로 내치는 모습을 우리는 근자에도 얼마나 많이 보았는가.

한국의 대선 덮은 공감 - 반감의힘

극단적 사례를 빌려 공감 자체를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감정을 갖고 살고, 많은 경우 공감을 느끼며, 그 덕분에 하나의 사회, 집단을 무난히 이루며 산다. 공감능력은 그 자체론 분명 긍정적이고 소중한 능력이다. 그러니 공감능력을 요구하는 것도 나름 이해할 만한 일이다. 문제는 그 공감이 들고 있는 반감의 칼이다. ‘자연스럽다’ 느끼는 공감에서 벗어났다 싶으면 이유도 묻지 않고 내치는 감정이다. 그런 점에서 ‘공감의 시대’란 공감이 의무가 된 시대라 하겠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공감을 요구할 때면 어떤 반감의 칼을 들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공감능력의 결여를 비난하기 전에, 반드시 사실을 확인하고, 이유를 묻고, 상대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공감의 눈빛들이 빠른(!) 반감으로 번뜩일 때, 그리고 거기에 분노의 감정이 더해질 때, 그것은 폭력인 줄 모르는 폭력을, 때론 죽음으로 밀고 가는 극단의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사실을 정확히 따지지도 않고, 맥락이나 이유도 묻지 않은 채, 단언하고 비난하고 단죄하는 폭력이 거대한 공감의 힘에 실려 행사된다. 약자나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 어떤 대상을 죽음으로 밀고 가서도 멈추지 않는 경우조차 있지 않은가?

공감의 시대라 하지만, 지금은 공감의 힘으로 적을 향해 칼을 겨누는 무서운 공감의 시대 같다. ‘약자’에 대한 공감을 ‘근거’ 삼아 사실을 확인하거나 이유를 따지지 않는 반감과 분노가 인간과 ‘동물’, 여성과 남성, 진보와 보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등 여러 범주들을 넘나들며 대중의 반감을 선동하고 분노를 증폭시키고 있다고 보인다. 신문들마저 사실을 따지거나 이유를 묻지 않는 반감의 전위가 된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특히 지금은 공감을 요구하며 반감을 자극하는 말과 글, 행동이, 승패를 가려야 하는 선거로 인해 정치적 장 전체를 덮어버리고 있다. 더 불행한 것은, 시간의 신이 이 대결하는 폭력들에게 정지를 선고한 뒤에도, 신체에 달라붙은 반감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남으리라는 점이다. 그렇게 공감-반감의 힘으로 충돌하며 서로에게 날을 세운 힘겨운 세상이 이후에도 지속될 것이다. 지옥은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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