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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사물의 그늘에서 / 박성관

 

 

1. 분열

코로나19가 인간이라는 초거대 종, 지구 생태계의 조폭을 이리저리 찢어놓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나는 이게 미래의 중요한 모습 중 하나가 될 거라 생각한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면 말이다.

 

2.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전까지의 생활을 돌아보면, 삶에는 참 많은 만남들이 있었다. 만나는 건 대부분 인간들이었고, 하는 이야기도 대부분 이러저러한 인간사들. 직장이나 학교에서는 거의 매일 같은 사람을 만났다. 다른 동물과 식물들을 먹고 마시고 토하며 끊임없이 만났다. 이제 과도했던 접촉과 대면의 시절로는 돌아갈 수 없다.

 

3. 섬들

2020년 4월 15일, 우리나라의 총선을 많은 지구인들이 주목했다. 1~2미터씩 거리를 둔 채 마스크를 끼고 말없이 서 있는 사람들. 각자가 작은 섬들처럼 떨어져서, 서로 말도 하지 않은 채 같은 행동을 했다. 이 기이한 연극은 한나절 동안 계속되었다. 박터지게 으르렁거리던 진보와 보수 유권자들이 이 퍼포먼스에서만큼은 혼연일체였다. 한 외신은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 무엇이 가능한지 또 증명”. 서로 말없이 떨어져 있다가 간간이 전진하여 도장찍고 오기. 이게 그토록 대단한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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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회복?

사회적 거리두기의 단계가 격상될 때마다 이런 소릴 들었다. “이번에 합심하여 잘 이겨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과연 그럴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올 상반기만 해도 회복 불가능성을 확신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현실은? 여전히 격상에서 격하를 오가는 중이다. 다른 질문을 해보자. 우리에게 돌아갈 일상이나 회복되어야 할 정상이란 뭐지? 이전이 그리 좋았었나?

또 이런 소리도 들었다. “만남과 모임의 기회가 대폭 줄어든 만큼, 꼭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자.” 코로나19 사태에서도 깨달아야 할 것은 인간과의 소중한 만남일까? 만남, 관계, 전체.... 이게 그토록 이나 좋은 것인가?

 

5. 함께하면 좋아.....요?

돌아보면 관계와 전체는 곧 선(善)이었다. 완전히 성취될 순 없어도 늘 이상으로 삼아야 할 상태. 그래서 큰 무리를 이상으로 삼는 사람도, 체제도, 시대도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근대 혹은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파편화시켜 개인들로 처박아버렸다. 마치 물질계의 근본 단위가 원자이듯이, 사회의 근본 단위는 개인이어야 마땅하기라도 하다는 듯. 사람들을 무력화하여 예속시키기 위한 정신적, 물질적 장치였다. 그에 대한 대안은 개인에 갇히지 말고 더 넓은 세상으로 튀어나와 함께 어우러져 넘실대는 것이었다. ‘밀실에서 광장으로’ 혹은 ‘여럿이 함께’

 

6. 전체, 무리들, 개체, 지대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급진이나 생태쪽에서도 그렇다. 이 역시 그럴 만은 하다. 촛불 군중을 이루어 서로에 대해 경이로워하던 사람들, 그렇게나 생기로운 존재와 사건은 참으로 드물고 귀한 거니까.

맞는 말이야, 전체는 부분의 합으로 환원되지 않아. 부분들이 크게 모였을 때, 새로운 무엇이 창발되는 것도 맞아. 하지만 부분들도 전체로 환원되지 않아. 큰 무리에서 더 작은 무리로, 혹은 나 개인으로 빠져나왔을 때 역시 무엇이 창발되지 않나? 또는 큰 무리 속에 있을 때의 부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짐과 갑갑함으로부터 해방되기도 하잖아? 그러니까 전체와 부분(들)은, 관계와 개체는 어느 한쪽이 크거나 우월하기보다는, 다르다고 해야 좋잖을까?

랑시에르를 읽다보니 부분이 때로는 전체보다 크다고 하고, 100년도 더 전에 칸토르는 무한보다 더 큰 것“들”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냥 ‘전체’라는 이름의 무엇이 one of them이라고 생각한다. 원한다면 김전체나 최전체라 불러도 좋겠다. 그런 내게 여러 종류의 무한“들”이 있다는 칸토르의 이야기는 광활하고도 시원해서 대단히 마음에 든다. 유사한 심정이 담긴 책 󰡔너무 움직이지 마라󰡕를 읽으니 편안했다. 모든 것은 객체들로 서로 물러나 있고, 인간도 그중 한 객체라는 그레이엄 하먼의 반(反)인간중심주의가 좋았다. 관계들과 무관할 때도, 하나의 대상은 그 자체로 무한히 깊고 다양하다는 사유는 야만적이고 매혹적이다.

 

 

7. 띄어 있기

벤치에서도 띄어 앉고, 병원이나 극장에서도 떨어진 좌석에 앉는다. 그러라고 하니 그렇게 한다. 근데, 좋지 않은가? 반대로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싫잖아. 돼지나 소를, 닭을 그렇게들 몰아놓고, 크고 작은 병이라도 걸리면 생으로 다 죽여버리잖아. 그거 참혹하게 싫잖아. 지하 몇 층까지 기어들어가 전철칸에 쟁여지는 거, 날마다 싫잖아.

사회적 거리두기 중 많은 흐뭇한 효과들이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떨어져 있는 건 함께 있는 거보다 나쁜 게 아니야. 아담하게 모인 게 많이 모인 거보다 본디 나쁜 게 아니듯이. 사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가까울 때가 많았어. 싫고 힘들고 부담스러울 때조차도. 원래 좋은 건 없어. 좋으면 좋은 거고 나쁘면 나쁜 거지, 원래가 어딨어.

 

8. 얽힘

전체와 개체 사이에 여러 스케일의 무리들이 있다. 무리라는 말을 지대(zone)라 불러보니 그것도 적절한 말이다. 무리나 지대는 개체나 전체보다 더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 당연하지, 그러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숲이 그렇고, 강이 그렇듯이.

더 중요한 얘길 하자면, 이 다양한 무리들이(전체와 개체까지 다 포함하여) 많은 경우 서로 단절되어 있다는 거다. 지대들은 서로 불연속이라는 거다. 이 사이의 무(無) 때문에 우리는 한 단위에서 다른 단위로 옮겨갈 때 두렵거나 설레는 것이리라.

양자역학에 따르면 한번 상관한 입자들은 멀리 떨어져도 계속 얽혀있다. 우주의 양 끝에 헤어져 있어도 그럴 것이라 하니, 관계란 참으로 신비하고도 중요한 거 같다. 그러나 또 양자역학에 따르면 세상 만물은 섬처럼 철저히 떨어져 있다. 물리적 상호작용은 서로 접촉하지 않은 채 이루어진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한다. 심지어 카를로 로벨리의 책에서는 공간도, 시간도 각각 단위로 구분된다. 공간 한 개, 시간 한 개로 각각 말이다. 그러니 “우주 전체가 느낌으로 연대하고 있다”고 했던, 내 오랜 스승 화이트헤드의 말은 반만 맞는 걸로 해두어야겠다.

 

9. 가족

외롭고 무서우면 사람들과 함께 있자. 끌리고 뭐라도 얻을 게 있어 보이면 그들에게 다가가자. 그렇지만 너무 더우면, 나쁜 냄새가 싫고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우면 거리를 두지 뭐. 앞으로는 더 자주 멀어져야 할 거야. 우주에 천억개나 되는 은하들도 가속 이별중이라고 하니, 너무 부자연스럽다고는 생각지 말자. 큰 모임보다는 작은 모임들이 많아질거야. 그런데 그게 의외로 좋은 점도 많을 거 같아. 그런 예감이 들어. “저녁이 있는 삶!” 대선 구호로 역대급이었지. 그분의 숙원을 코로나19가 착실히 이루어주고 있어. 아마 그 분도 잘 쉬고 계실 거야.

 

10. 事物

사람들과의 거리가 벌어지면, 사이가 생길 거야. 좀 더 지나면 다른 것들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할 거고. 다른 사물들이 나타날 거야. 고궁의 오밤중을 무인카메라로 찍은 영상 본 적 있어? 별별 동물들이 다 나와 이리 몰려다니고 저리 몰려다니고 하더라고. 이 낯선 존재들이 벌이는 신기한 일들. 이게 사물들이야. 어떤 일(事)이나 동물, 인물, 식물, 만물할 때의 그 물(物). 그래서 사물! 영어를 어찌나 잘들 하시던지 사물이라 하면 곧장 thing을 떠올리시더만, 事物이라는 것도 생각 좀 해줘. 정 어색하면 사/물이라 불러보든가. 너무 나에게만, 사람들에게만 시선이 갇혀 보이지도 않았던 기타 등등의 사물들. 사람들과의 거리가 벌어지면 그 사이로 하나 둘 사물들이 걸어올 거야. 대낮이 줄어들면 음(陰)의 사물들이 출몰할 거야. 그런데.... 사물과 사물 사이에도 거리가 있어. 나는 사물과 사물 사이, 그 그림자 속에서 쉬고 싶어. 지구의 가을을 기다리면서.

 

11. 사물의 그늘에서

지구의 과열이 문제라고 하니, 인간이 너무 많은 게 문제고, 모든 게 인간중심적으로 되어 가는 게 심각한 문제라고 하니 어쩌면 좋을까. 사물의 그늘 속에서 쉬며 천천히 생각해보자. 지구도 쉬고, 사물들도 쉴 수 있도록

 

 

박성관 (독립연구자, 번역가.『표상 공간의 근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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