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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3.3.14]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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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불이의 미학과 와비의 종교

: 차를 마시면서 공적한 탈속의 세계에 든다고?

야나기 무네요시, 미추 이원성 극복 못한 분별의 미학 초래
선과 차가 다르지 않다며 출세간적 ‘와비’로 탈속 세계 지향
파격 통해 일상의 삶 자유롭게 하려는 선사들 시도와 어긋나

일본 다도의 ‘정통파’가 찬미하는 이도 다완.
일본 다도의 ‘정통파’가 찬미하는 이도 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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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초암

 

‘불교미학’의 선구적 시도 속에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미추가 구분되기 이전의 미를 찾고자 한다. 그는 추와 대립하지 않는 불이(不二)의 미를 말하고(‘미의 법문’, 27), 미추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정토를 말하면서 미의 정토를 구하고(42), ‘본래자성 청정열반’을 말하면서(85) 미의 세계에서의 성불이 있어야 한다(43)고 한다. 또 미추상대를 떠나 불미불추(不美不醜), 미추미생(美醜未生)의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며, ‘공(空)’ ‘무(無)’ ‘적(寂)’이라 불리는 불이의 미(62)를 ‘절대미’ ‘구경미’ ‘무주미(無住美)’라 명명하기도 한다(70~71). 이 불이의 미란 “추도 아니고, 미도 아닌 것이며, 미추가 나뉘어지기 이전의 것이고, 미추가 상즉(相卽)하는 것이며, 추가 없는 미 자체”(61~62)이다. 모든 것에서 발견되어야 하는 미, 그렇기에 추 없이 존재하는 미라는 것이다.

그가 무엇보다 탁월한 모범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도(井戶) 다완(茶碗)이나 귀얄문 다완 등 조선의 이름 없는 도공들이 만든 다완들이다. 이는 제작자가 무학의 천민이어서 미추의 구별을 만날 기회도 없었고, ‘다구(茶具)’로서 일부러 만들어진 게 아니라, 싸구려 밥그릇 같은 것으로 만들어졌기에 최대한 빨리 만들어내야 했으며, 그로 인해 다소 삐뚤어지고 가지런하지 않고 상처마저 있게 되었다 한다. 미 개념에 따라 예술품으로 만들려는 생각도 없이 만들어졌으나 후세에 일본 다인들에 의해 최고의 다기로 발견된 이 도기들에서 그는 무위의 미, 자재무애의 미, 미추 이전의 미를 본다(‘미의 법문’, 76~80). 야나기가 예술가 아닌 민초들이 만든, 예술품 아닌 민예품의 미학을 추구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그는 선의 평상심 개념을 사용하여 ‘평상미’라고도 한다. 간소함, 차분함, 적막하고 한가로움 등을 뜻하는 와비(侘び), 사비(寂)의 다도에서 그는 세간의 소란스러움과 집착을 떠난 고요함을 본다(89).

민초들이 예술품이나 다구로 만들 생각도 없이 만든 다완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모든 것에서 미를 발견하는 여래의 미학을 향한 큰 기여라 하겠다. 그러나 민초들의 다구들이 공과 적을 표현하는 불이의 미, 무위의 미, 자재무애의 평상미가 된다면, 예술가들이 애써 만든 다완이나 도기들은 어떻게 될까? 그것이 얼마나 잘 멋지게 만들어졌나와 무관하게, 애써 만든 유위의 작품이 되고, 평상과 먼 작위의 세계에 속하게 된다. 자재무애의 절대미와는 근본에서 다른, 결코 그것이 될 수 없는 하등의 ‘예술품’이 되고 만다. 따라서 그가 꿈꾼 불이의 미학은 의도와 반대로 미추의 이원성을 면할 수 없는 분별의 미학이 되고 만다. 불성의 청정함이 염정의 이원성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길은 얼마나 넓은 것인지!

‘와비’나 ‘사비’ 혹은 야나기가 좀더 민중적인 단어라며 제안하는 시부사(渋さ)-수수함·차분함-가 서양 미학과 다른 일본 고유의 미를 표현하는 개념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요란한 것, 화려한 것, 정교한 것과 반대되는 소박함이나 단순함, 적막함을 미학의 핵심 개념으로 제안한다. 그것은 이전에 없던 미를, 그리고 서양 미학에 없는 어떤 아름다움을 개념화한다는 점에서 독자적 미감의 척도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미의 보편적 개념이 되고, 선이나 무의 미학, 불이의 미학으로 승격되면, 그와 다른 아름다움을 미와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밀어 넣게 된다.

가령 야나기는 에도 시대의 승려 자쿠안 소타쿠(寂庵宗澤)의 ‘젠차로쿠(禪茶錄)’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선(禪)과 달리 선다(禪茶)는 반드시 기물(器物)을 매개로 하는데, 모든 그릇이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으며 아름다운 기물만이 다기로서의 자격이 주어진다고 한다(‘다도와 일본의 미’ 127~128), 애정을 자아내지 못하는 그릇은 추한 그릇이어서 다기가 될 수 없다(130)고 잘라 말한다. 그가 좋아하는 이도 다완 같은 기물의 아름다움을 그는 그것이 ‘본디부터 갖고 있는 아름다움’이라 하며 ‘자성의 아름다움’이고 ‘본분의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이것이 어떤 그릇에게 다기의 자격을 부여한다(132~133)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본분’이니 ‘자성’이니 하는 것은 공이나 불이란 개념으로 말하던 것과는 반대로 어떤 그릇이나 형태의 자성이 된다. 아름답지 못한 것을 본성이란 사슬에 묶어 추의 늪 속에 던져넣게 된다.

상을 떠나 공을 따로 구하는 순간 공이 하나의 상이 되고, 부처를 따로 구하는 순간 부처가 장애가 되고 티끌이 되는 것과 동일한 궁지가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다. 다도의 ‘정통파’가 와비나 사비, 다실이나 ‘오차유’에 부여하는 의미는 더욱더 지고하다. ‘와비’란 화려함이나 세련됨과 대비되는 고요하고 청아한 아름다움이고, ‘사비’란 속세와 거리를 둔 쓸쓸함과 청적함이라 규정되는데, 다도의 철학을 설파하는 히사마츠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본다. 와비란 ‘무(無)가 유(有) 가운데 표현된 것’이고, 다도란 “와비의 종교”라고 말한다. 이는 “무의 종교”나 “완전한 무에 안주하는 것이 가능한 종교”라는 것이다(히사마츠 신이치, ‘다도의 철학’ 24~25). 여기서 우리는 미감을 표현하는 형용사가 종교화될 수 있음을 본다. 

다도의 철학자는 이를 두고 ‘선(禪)의 구현’이라고 하고, 선과 나란히 ‘선다(禪茶)’ 내지 ‘다선(茶禪)’이라 한다. 선(禪)이란 “일체의 형상을 부정한 본래 자기”를 추구하는 종교인데(‘다도의 철학’ 31), 다도 또한 “무상의 자기를 자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선과 같다는 것이다(45). 다도를 위해 만드는 작고 소박한 다실과 정원을 노지초암(露地草庵)이라 하는데, 다다미 2장 크기의 작은 초암(草庵)은 “명리의 속진을 멀리하고 한가로이 세상을 보내는 와비인이 소박한 초가집”이고, 초암에 이르는 통로 겸 정원인 노지(露地)는 먼지를 털어버리게 하는 “세상 밖의 길”로서 다도의 궁극의 경지를 나타낸다고 한다. 출세간적 ‘와비’로 사람들을 초대하여 탈속의 세계로 이끄는 “불법의 도량”이 노지초암이라는 것이다(‘다도의 철학’ 66, 73~76).

다도의 법칙이자 모랄이라고 하는 화경청적(和敬淸寂)(히사마츠, ‘다도의 철학’, 109)은 문자 그대로 화목함과 공경함, 청정함과 고요함을 뜻하는데, 경(敬)은 사물에 귀의하여 전념함으로 재정의되어 ‘삼매’와 동격의 자리를 얻게 되고, 동작의 원소화를 통해 치밀하게 정해진 차의 예법은 법이나 형식이 되어(야나기, ‘다도와 일본의 미’ 82) ‘영원성’을 얻게 된다(29). 원래 미적 취향을 뜻하는 말이 된 ‘코노미(好み)’ 또한 작위(作爲)와 부작위를 뛰어넘은 현지(玄旨)로 승격된다(히사마츠, 84). 어떤 단어에 지고하고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려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는 이 의미화는 자신이 하는 것에 초월적 지위마저 부여하는 나르시즘적 과대망상 아닌가 싶다. 이 과도한 의미화는 동시에 다기를 다루고 차를 마시는 동작 하나하나마저 세밀하게 규정함으로써 양식화(樣式化)된 틀에 와비가 된 적정열반을 가두어 버린다. 파격을 통해 일상의 삶을 자유롭게 하려는 선사들의 시도가, 치밀하게 짜여진 멋진 틀(格)을 구성하여 일상에서 벗어나 탈속의 아름다움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역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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