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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3.2.13]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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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미학적 여래와 여래의 미학

모든 것에서 미를 보며 미추 말하는 게 여래 미학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것은 아무거나 미학이 되기 십상
여래 미학은 각자 아름다움을 보는 긍정만으로는 불충분
모두 아름답지만 무엇을 보려는 지에 따라 정도를 달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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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왼쪽)과 다보탑(오른쪽).

 

조각이나 그림을 통해 석가모니나 ‘여래’의 상을 만들 때, 그 얼굴이나 신체적 형상과는 다른 무엇을 표현하고자 한다. ‘성스러움’이나 ‘장엄’ 같은 말로 표현되는 어떤 감응을 상 속에 담아 넣는다. 이는 불상을 둘러싼 대기 속에 스며드는 어떤 분위기이니, 얼굴이나 신체의 모습을 뜻하는 ‘상’은 아니다. 상 있는 것을 둘러싼, ‘상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성스러움’이나 ‘장엄’ 같은 어떤 분위기인 한, 하나의 상임을 부정할 순 없다. 그래도 그것은 상 없는 상이고, 불상 아닌 ‘여래’다. 상을 넘어선 어떤 것을 표현하는 상이란 점에서 초감각적 감각이고, 성스러움이나 아름다움의 감응을 주는 어떤 것이란 점에서 ‘미학적 여래’다. 미감을 따라다녀야 할 운명 속에서 불교적 미학은 이처럼 미학적 여래 주위를 맴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미학에게 미학적 여래마저 떠날 것을 요구한다. 또 하나의 감각적 상인 미학적 여래를 떠나, 말 그대로 ‘여래’라 하기에 충분한 여래를 보라 한다. 호오의 분별과 짝하는 미추의 구별을 넘어서 어디에나 존재하는 미라는 의미에서 ‘여래’를 보라는 말이다. 그러나 모두 아름답다 한다면, 감각적인 미추를 말하지 않는다면 미학은 과연 가능할까? 미추를 식별하는 게 미학인데. ‘장사의 봄기운(長沙春意)’라고 명명되는 선가의 공안(‘벽암록’ 36칙)에서 우리는 여래의 미학을 위한 핵심적인 두 계기를 찾을 수 있다.

어느날 장사 스님이 산을 유람한 후 돌아오자 수좌가 물었다.

“스님, 어딜 다녀오십니까?”
“산을 유람하고 오는 길이다.”

산을 유람하고 온다 함은, 무언가 따로 볼 것이 있음을 뜻한다. 즉 볼 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별이 있음이다. 미추와 호오의 분별이 있음을 뜻하니, 분별간택을 하지 말라는 선의 종지에서 벗어난 것이다. 눈 밝은 수좌는 이를 감지하고 다시 묻는다.

“어디까지 다녀오셨습니까?”
“처음에는 향기로운 풀을 따라갔다가, 나중엔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느니라.”

여래의 미학의 첫 단서를 담은 멋진 대답이다. 향기로운 풀이나 아름다운 꽃을 따라갔을 뿐이라면, 떨어져 시들고 말라가는 꽃이나 밟혀서 문드러지고 썩어가는 풀은 밀치고 외면하게 된다. 속인과 다를 바 없이 미추와 호오의 분별 속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장사의 대답은 싱싱한 풀은 향기로워 좋고, 지는 꽃은 또 지는 꽃대로 좋다는 말이니, 모든 것이 다 좋다는 말이다. 유람할 것이 분명히 있지만, 모든 것이 다 유람할 것이란 말이다. 싱싱한 것이나 시든 것이나, 깨끗한 것이나 더러운 것이나 모든 것이 다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 함이다. 그러니 추와 대비되는 미, 싫음과 대비되는 좋음은 사라진다. 모든 것이 좋은 것, 아름다운 것으로 긍정된다. 모든 것은 나름의 아름다움을 갖기에 평등하다. 미추와 호오의 분별이 아름다움의 ‘하나됨’ 속에서 사라진다. 석굴암 본존불은 성스럽고 장엄하여 아름답고, 운주사 석불들은 소박하고 고졸하여 아름답다. 값싼 상품이 된 불상은, 돈은 없어도 불상은 하나 가까이 모시려는 가난한 이의 마음으로 아름답고, 쓰레기통 속 불상은 그 더럽고 버려진 것 속에서마저 불법을 설하고 있으니 아름답다.

이렇듯, 도나 불법이 따로 어디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상’이라 불리는 일상사 하나하나라고 하는 선가(禪家)의 종지는, 도를 미로 바꾸면 선(禪)의 미학이 된다. 선의 미학은 특별한 미의 대상을 따로 설정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미적 대상이다. ‘평상심’이라고 요약되는 선의 가르침은 이처럼 ‘평상심의 미학’이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나름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것, 모든 것 속에서 각각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이는 모든 상들 속에서 여래를 보는 절대적 긍정의 미학이다. 어둠으로 상을 지우지 않고, 빛 속에서 오는 그대로 아름다움을 보는 여래의 미학이다. 
장사의 수좌 또한 이를 정확하게 알아듣는다.

“아주 봄날 같군요.”
“아무렴, 가을날 이슬 망울이 연꽃에 맺힌 때보다야 낫지.”

어쩌면 좀더 놀라운 것은 선의 미학의 두 번째 단서를 담은 이 대답이다. 무릇 선의 미학이라면 모든 것에서, 심지어 죽어가는 것이나 쓰레기에서조차 그 나름의 미와 가치를 알아보아야 하지만, 단지 이것뿐이라면,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아무거나’의 미학이 되기 쉽다. 여래의 미학은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보아야지, 아무것이나 아름답다고 해선 안된다. 그 아름다움의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석굴암 본존불과 운주사 석불들은 모두 아름답지만, 아름답다 할 이유는 아주 다르다. 아름다움의 정도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을 그린 그림이지만, 화사하면서도 격조 있는 미묘한 색감으로 치면 고려불화를 능가할 그림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무거나의 ‘미학’보다 좀더 어려운 관문은 상대주의 미학이다. 각자는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고, 취향은 각자이니, 남의 취향에 뭐라 할 수 없으며, 취향마다 미추가 다르니 미추의 정도나 ‘우열’은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가령 석가탑과 다보탑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운지를 두고 논란을 벌일 때, 이런 주장은 크게 설득력을 얻는다. 석가탑과 운주사 인근 돌탑도 그러하다. 심지어 석가탑이 아니라 어느 절이나 흔히 있는 석탑이 좋다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게 취향이고 자신이 느끼는 미감이라는데 뭐라 할 것인가? 이렇게 되면 미학은 이제 ‘각자의 미학’이 된다. 각자가 갖는 미감을 존중해주자는 주관주의 미학, 각자의 호오는 개인의 취향이라는 자유주의 미학이 된다. 이때 미적 판단은 각자의 주관에 귀속되기에, 미추를 평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평가나 비평이 불가능하다면, 미학은 불가능하다. 각자의 주관적 취향 속으로 미학은 침몰하고 만다.

여래의 미학은 각자의 아름다움을 보는 긍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어디서나 미를 보아야 하지만, 미추의 가치판단을 할 수 있어야 그것은 비로소 미학이 된다. 장사의 두 번째 대답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준다. 꽃이야 가을에도 피고 지지만, 그래도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는 데는 훨씬 많은 꽃이 피고 지는 봄이 더 좋을 것이다. 반면 봄에는 연꽃이 피지 않으니, 이슬망울이 연꽃에 맺히는 아름다운 상을 보려면 가을이 더 좋을 것이다.

석가탑도 다보탑도 다 아름답지만, 화려함과 우아함, 형태적 독창성과 세련된 감각으로는 다보탑이 더 아름답다. 반면 단아하고 힘차면서도 힘을 과시하지 않으며 수많은 변용가능성에 열린 것으로 치면 석가탑이 더 아름답다. 대충 주워 쌓은 것 같은 운주사 돌탑들은 이 탁월한 세련미와 다르지만, 비대칭적이고 고졸하며 자연스러우면서도 의외의 형상으로 치면 앞의 두 탑보다 더 아름답다. 모두가 아름답지만, 무엇을 보려 하고 무엇을 표현하려는가에 따라 아름다움의 정도를 달리한다. 그렇게 각자는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우리는 그 모두를 나름의 기준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 이로써 미추를 떠난 평면에 서면서도, 그때마다 호오미추를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에서 미를 보면서도 미추를 말하는 여래의 미학이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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