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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3.1.9]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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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알 속의 어둠과 석굴의 미학

: 석굴어둠은 빛 내세워 행해지는 분별 이전 어둠


모든 분화된 것을 함축하는 모태로서의 알은 또 다른 어둠
다른 상들로 분화되기 전의 함축적 존재는 어둠 속에 있어
‘알’ ‘자궁’ 의미하는 스투파 자체가 모든 분화될 것을 함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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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뿌네 렌야드리 석굴 제7석굴의 스투파. [법보신문DB]

2) 석굴암 본존불. [문화재청]
2) 석굴암 본존불. [문화재청]

 

알은 성체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 기관으로 분화되지 않은 상태로 함축하고 있다. 즉 알 속에는 성체의 기관들이 수행할 모든 기능이나 능력이, 어떤 형상도 없이 거기에 있다. 나아가 발생조건에 따라 ‘예정’ 없는 형상, 때에 따라선 괴물 같은 형상으로 출현할 형상조차 그로부터 나온다. 알은 스스로 그 모든 상을 지우고 감춘 하나의 상이다. 빛을 비추면 분화될 기관들이 아직 미분화된 어둠 속에 있다.

알이 어둠 속에 있다고, 어둠을 알과 같다 할 순 없다. 어둠은 어둠이다. 덕산이 본 짙은 어둠은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게 가리지만, 어떤 것도 제거하지 않고 잠식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둔 채 보이지 않게 할 뿐이다. 상을 지우지만, 없애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무와 종종 혼동되지만, 무도 유도 아닌 중도, 상 있는 그대로 상 없음인 여래로서 공을 무와 구별한다면, 공은 텅 빈 공허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둔 채 상을 지우는 어둠에 가깝다. 나는 달빛조차 없이 캄캄한 밤, 묵언수행을 하겠다고 들어갔던 강원도 산속 조그만 절에서 화장실을 가기 위해 나섰다가 그저 까맣기만 한 저편 숲을 보며, ‘저기 어둠이 있다!’고 외치는 낯선 감각과 만난 적이 있다. 모든 것을 그대로 품고 있는 어둠의 존재가 거기 있었다. 그것은 상상된 이미지 아닌 현실의 어둠이었다.

빛 없는 어둠, 절대적 어둠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존재자들을 모두 소거한 무가 아니라, 모두를 안고 있는 공을 표현한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존재론적 어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알은 어둠과 인접해 있다. 미분화된 어둠으로서 알의 상, 모든 분화된 것을 함축하는 ‘모태’로서 알은 또 하나의 어둠이다. 이는 감각을 통하지 않고는 다가갈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감각적 형상이 되기도 한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게 되었다.” 빛은 어둠 속에 있는 것에 상을 부여하고, 그 상들을 식별하고 분별하게 한다. “빛이 있으니 신이 보기 좋았더라”는 말은 빛의 신학을 시작한다. 빛이 비추이며 생기는 형상과 분별을 추구하는 사유가 그 말끝에서 시작된다. 빛의 사유는, 어둠이 사라지며 드러나는 형상을, 그 형상의 명료성을 추구한다. 여기서 어둠은 빛의 대립물이며, 빛을 부각시키는 배경이고, 빛에 의해 구축되는 대상이다. 그러나 빛으로 시작하는 신화조차 실은 어둠만 존재하는 세상 속에 빛을 끌어들이며 시작한다. 빛 이전에 어둠이 있다. 빛은 또한 언제나 그림자와 함께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확실히 빛과 어둠은 비대칭적이다. 빛 없는 어둠은 있지만, 어둠 없는 빛은 없다. 빛은 어둠과 대립되는 상대적 개념이지만, 어둠은 빛 없이 존재하는 절대적 개념이다. 빛이 어둠을 몰아낸다 하지만, 어둠 없는 빛이 불가능하다면, 어둠은 빛이 몰아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태초에 어둠이 있었음을 강조하는 신화적 사유와 가까이 있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는 말은 빛 이전에 존재하는 무명의 카오스를 상기시킨다. 빛으로 식별할 수 있는 형상 ‘이전’의 공허를 환기시킨다. ‘태허(太虛)’나 공의 일차성을 강조하는 사유는 빛 이전에 존재하는 어둠이 존재함을 주목하며, 그 무명의 어둠과 혼돈이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배태하고 있음을 알려주려 한다. 상 있는 것 모두에 존재하는 ‘상 없는 것’이란, 빛이 아니라 상 이전의 어둠과 가까이 있다. 다른 상들로 분화되기 이전의, 모든 것을 함축한 존재는 그렇게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 있다. 태허나 혼돈을 단지 ‘태초’라는 시간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것이 불충분한 것은 이 때문이다. 상 있는 것 이전이란 태초가 아니라 ‘항상’ 거기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불교의 석굴사원이 불도를 설한 부처의 주위에 애써 어둠을 끌어들이려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 아니었을까? 어둠의 상을 이용해 미분화된 알로, 존재론적 어둠으로 감각을 당기려는 미감 판단. “빛에서 멀어지면서, 형상 있는 것을 해체하여 암흑으로 돌려놓는 석굴 내부는 마치 모든 존재 심연을 형상화한 공간처럼 느껴진 듯하다.”(이주형 외, ‘동양미술사’, pp.216~217) 알다시피 석굴사원 금당인 차이티야에는 애초 스투파가 조성돼 있었다. 부처 사리를 모신 스투파의 반구형 몸체가 알을 뜻하는 ‘안다’나 자궁을 뜻하는 ‘가르바’라고 불린다. 스투파를 세운 이들에게 그것은 부처의 가르침이 퍼져가며 새로운 부처로 재탄생할 알이자 모태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스투파 자체가 모든 분화될 것들을 함축하고 있는 알이며 모태이니, 그것을 석굴 안에 조성하며 그 주위를 어둠으로 에워싸려 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발상이었다 하겠다.

모든 상 속에서도 상 없는 여래를 보라는 ‘대승불교’ 가르침은 이를 좀더 확장된 의미로 받아들이게 했을 것이다. 의식적으로 그랬을지 모를 일이지만, 바미얀이나 둔황 석굴을 만든 이들이 차이티야에 알이나 스투파 대신 불상을 세울 때, 여래를 표현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상임을 피할 수 없다는 난점을 감각적으로 포착했기에, 그 모면할 길 없는 상 있는 것들을 어둠으로 둘러싸 지우고자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상을 지우는 어둠 속 상으로, 상 없는 여래의 한 자락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 아닐까? 보려고 불을 밝히고 빛을 끌어들이지만, 그 불빛의 위치와 각도, 양상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불상의 변화하는 상들 속에서 상 없는 여래의 단서를 읽어내야 하지 않을까? 누구도 명시한 적 없지만, 어둠을 끌어들인 그토록 많은 석굴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감각이나 감응은 이것 아닐까?

분명한 것인 석굴사원 어둠은 로마네스크 성당의 침투할 수 없는 불투명성의 표상이나 무거운 금욕적 은둔성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좁은 창으로 스며드는 빛을 둘러싸며 그 빛의 성스러움을 드러내주는 검은 배경도 아니고, 빛을 비추어 몰아내야 할 무지나 몽매의 어둠도 아니다. 그 어둠은 빛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분별 이전 어둠이다. 그것은 모든 상을 그저 지우는 어둠이 아니라, 모든 상을 싸안는 미분화된 알의 어둠이다. 여래는 상이 없지만, 모든 상 있는 것에 거하는 상 없음이다. 모든 상이 지워진 어둠은 ‘단멸공(斷滅空)’이나 ‘악취공(惡取空)’처럼 아무것도 없는 공, 하나의 상으로서 어둠이다. 반면 여래의 상 없음이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싸안은 어둠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어둠이고, 해가 ‘돌고’ 구름이 끼며 달라지는 빛의 강도와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어둠이다. 상 없음은 상 없음의 항상성이 아니라, 무상한 변화 자체다. 그 무상한 변화로 포착되는, 자성 없는 실상 속에 가득찬 잠재성이다.

따라서 석굴에는 강박적 어둠도 없고, 무겁게 금욕의 대기를 조성하는 장식화 된 어둠도 없다. 자연적인 어둠이 있을 뿐이다. 그때마다의 일기나 시간, 혹은 등불의 위치 등과 같은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어둠이 있을 뿐이다. 살기 위해, 알기 위해 헤쳐나가야 할 어둠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아무리 없애고자 해도 없앨 수 없는 어둠이고, 익숙해져야 할 어둠이다. 성스러움을 위한 조명으로서의 어둠이 아니라, 빛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떠안고 함께 해야 할 어둠이며, 그렇게 그 안에서 편해져야 할 어둠이다.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많은 상들을 안고 있는 어둠이다. 텅 빈 어둠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들로 가득 찬 어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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