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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2-1205]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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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석굴사원, 혹은 어둠의 건축과 빛의 건축

: 석굴사원 어둠은 무능이라기보다 의도된 것

아잔타에서 석굴암까지…불교역사는 석굴 번져간 역사
어둠으로 둘러싸여 잘 보이지 않게 한 것이 석굴 특징
‘비례’ ‘빛’ 개념으로 압축되는 서구 중세 미학과 딴판

인도 아잔타 석굴.
인도 아잔타 석굴.

2022-1209_불교를 미학하다23.jpg
프랑스 생드니 성당.

 

어느 종교든 사원을 짓기 마련이다. 후대에 미술작품이라 불리게 될 대부분의 유물들은 사원 인근에 모여 있다. 그런데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사원 가운데는 석굴사원이 유달리 많다. 나식, 베드사, 칼리 등에서 아잔타, 엘로라 등 인도 전역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수많은 석굴들, 바미얀 등 아프가니스탄 인근의 석굴들, 둔황이나 윈강, 롱먼 등의 중국의 석굴들, 그리고 석굴암이나 군위, 골굴암 등 한국의 석굴들을 보면, 불교의 역사는 석굴이 번져간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서구 음악가들이 당시 악기, 편성대로 ‘당대연주’를 하듯이, 당대의 조명을 재현한다면, 석굴사원은 어떤 모습일까? 당시 석굴사원에 사용했을 조명이란 게 활활 타는 횃불이었을 리는 없으니, 기껏해야 촛불이나 등잔불 비슷한 정도의 불이었을 터이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어두웠을 것이고, 불빛에서 먼 곳은 희미하여 거의 보이지 않았을 것 같다. 깊숙하지 않은 문가의 전실(前室)은, 낮이라면 햇빛 덕에 밝았겠지만, 안쪽 깊숙이 자리 잡은 불탑이나 불상은, 잘해야 희미하고 모호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지금 같으면 정작 조명이 필요하리라 생각되는 곳이 오히려 빛에서 멀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잔타 석굴의 벽화나, 둔황 석굴의 천정이나 한쪽 구석의 벽화를 제대로 보기는 쉽지 않았을 게다.

스투파든 불상이든 애써 만든 조상(造像)들을 이처럼 어둠으로 둘러싸 잘 보이지 않게 했다는 것, 이것이 석굴사원을 지상의 사원과 구별해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이는 초기의 인도석굴로 국한되지 않는다. 가령 석굴문화권의 끝자락이라 해야 할 석굴암도 그렇다. 후실의 본존불도 그렇지만, 그 주위를 둘러싼 부조들을 ‘명료하고 뚜렷하게’ 보기는 더욱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불을 가까이 들이대고 볼 수도 있었겠지만, 불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어두운 대기가 형상들을 지워버렸을 테니, 불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보이는 것이 끊임없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처럼 빛에 의한 마모나 손상이 우려할 정도가 아니라면 작품을 빛내고 작품을 명료하게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조명에 익숙한 감각으론 낯설 뿐 아니라 불편하고 부적절하다 느낄 것이 분명하다.

석굴암처럼 치밀하게 기획된 축조석굴에 채광창을 따로 내지 않은 것을 보면, 실내의 어두움은 무능이라기보다는 의도된 것이라 해야 한다. 즉 빛을 안쪽 깊숙이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대낮에도 어둡게 하기 위해 애써 석굴사원을 조성했으리라는 것이다. 사실 빛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 굳이 굴을 파서 사원을 지을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지상에 짓는 것보다 결코 쉽지 않았을 테니, 석굴사원을 만든 것은 짓기 쉬워서가 아니라 짓기 어려움에도 그리 한 것이다. 빛 아닌 어둠으로 실내를 채우기 위해 애써 석굴사원을 조성했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애써 만든 스투파나 불상, 벽화를 왜 어둠으로 둘러싸려 했던 것일까?

빛과 어둠은 어떤 철학이나 종교도 피해갈 수 없었던 주제이고, 어떤 미학도 전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관념이다. 그러나 약간의 세세한 차이야 있다고 해도, 대개는 우리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빛이란 우리의 갈 길을 비추어주는 것이고, 우리의 눈을 밝히어 주는 것이니, 빛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 그런 만큼 어둠이란 빛을 비추어 사라지게 하고 빛의 힘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는 관념 말이다. 이런 생각을 가장 명료하게 표명했던 것은 알다시피 서구의 계몽주의 사상이었다. 계몽이란 말 그대로 빛을 비춤(enlightenment) 그 자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 그리고 우리가 통제하기 힘든 충동적 신체 모두가 어둠에 속한다고 보았고, 이성을 뜻하는 빛의 힘으로 그 어둠을 몰아내려 했다. 거기서 빛이 진리이자 선이라면, 어둠은 무지이자 악이었다. 미 또한 감각이니 어둠을 제거하는 빛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을 터이다.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계는 ‘미개’에 속하니, 이성의 빛이 이룬 ‘문명’에 의해 개화’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이로부터 나온다. 어둠의 힘에 사로잡힌 삶의 방식은 ‘야만’이니, 이성의 문명에 의해 ‘문명화’되어야 한다.

‘계몽주의’란 18세기에 등장한 이름이었지만, 이런 발상은 “태초에 빛이 있었느니라”고 선언했던 기독교 창세기의 신화적 사고에, 혹은 그리스 문명의 힘을 받아들여 ‘재탄생시켰다고 생각했던 ‘르네상스’의 환영에 이미 함축된 것이었다. 이미 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두 눈을 뜨고 버젓이 살고 있었음에도, ‘아메리카’가 서구인의 눈에 의해 비로소 ‘발견’되었다며 ‘지리상의 대발견’이라 명명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이들을 사냥하여 노예화하거나 무참하게 살육하는 극도의 야만적 행위들이 ‘인간’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것 또한 이런 발상에 근거했다. 자신이 미개와 야만과 달리 빛의 편에 서 있다는 자찬,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빛의 은유에 기댄 나르시시즘적 환영의 자식이었다. 정복과 식민화를 뜻하는 이런 빛의 은유가 종교의 영역에서는 신의 ‘특명’을 ‘임무’로 하는 ‘선교’, 이 세 단어를 동시에 뜻하는 ‘미션(mission)’의 양상으로 진행되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고 보면 ‘빛’이나 ‘빛을 비춤’ ‘몽매함을 일깨움(啓蒙)’이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빛과 어둠에 대한 이런 생각은, 르네상스나 계몽과 대비되며 ‘어둠의 시대’로 흔히 오인되는 중세의 서구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서구 중세 미학의 두 축은 ‘비례’와 ‘빛’의 개념으로 압축된다. 비례 미학은 조화와 비례를 등치시켰던 아우구스티누스나 보에티우스에게서 기원하는, 카롤링거 유럽 이전의 고대적 전통과 결부된 것이었다. 빛의 미학은 미의 본질이란 비례나 조화가 아니라 광휘 내지 명료성이라고 보았던 위(僞)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에게서 연원한다. 이때 빛이란 진리이자 선, 덕, 사랑 등과 등치된다. 에리우게나는 이러한 빛을 신성이 현현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했고, 이로써 빛은 초월적 신학의 중심개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미의 본질은 “보여짐으로써 즐거움을 주는 것(quae visa placet)”이라고 하면서 미를 진리와 선에 귀속시켰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러한 미의 속성을 무결성(integritas), 비례(propotio), 명료성(claritas)으로 집약한다.

에리우게나나 아퀴나스가 명시한 이러한 빛의 미학은 생드니 성당을 개축하며 시작된 고딕 성당에서 감각적으로 화려하게 개화된다. 여러 가지 면에서 고딕과 대조되는, 화려한 빛과 반대로 무거운 어둠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로마네스크 성당이라면 어떨까? 빛 대신 어둠의 미학이 지배했다고 할 수 있을까? 고딕 성당이 도시 한가운데 있는 대중의 공간이며, 그런 만큼 대중을 신을 증거하는 ‘기적의 빛’으로 설득하는 게 중요했다. 반면 로마네스크 성당은 도시 바깥에 있었을 뿐 아니라, 도시 또한 성벽을 갖추기 이전이었던 지라, 외부의 침공으로부터 신의 신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신의 나라(‘civitas dei’)로서 요새 같은 든든한 벽체가 중요했다. 다른 한편 로마네스크 성당은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곳이었을 뿐 아니라, 수도원으로서 은둔의 공간이었다. 어둠은 그런 든든함과 은둔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석굴의 어둠과 달랐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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