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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학] 20. 비대칭성의 미학

oracle 2022.11.11 20:12 조회 수 : 115

[법보신문 2022-1024]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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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비대칭성의 미학

: 산사는 중심·부차 뒤섞는 놀라운 공간적 다양체

대칭성 통해 구성되는 강력한 통일성은 시각적 희생 동반
중심성·통일성·위계성 중시하는 서원은 강한 대칭성 부여
산사는 별개 중심축 만들어 축의 단일성 깨는 경우도 빈번

 

2022-1111_불교를 미학하다20.jpg
영주 부석사.

양산 통도사.
양산 통도사.

 

기하학은 대칭성을 선호한다. 대칭성은 면을 선으로 환원하고, 선을 점으로 환원한다. 원의 일부인 호는 하나의 중심을 통해 모든 방향으로 대칭성을 이루며 굽은 ‘직선’이다. 직선과 직각에 대한 선호는 대칭성 선호에 기인한다. 원이나 직선 아닌 형태는 대칭성을 갖기 어렵다. 혹시라도 유사성을 통해 대칭성을 얻었다면, 그것은 한가운데 있는 암묵적 직선 덕분이다. 직각은 모든 직선의 ‘만남’에 대칭성을 부여한다. 대칭성은 중심에 있는 선이나 점으로 시선을 모은다. 역으로 중심에 표시해 놓은 선이나 점은 중심에 길든 영혼에 대칭성의 환영을 불어넣는다. 가령 도시에 세로로 세워진 수직의 기둥은 인근에 흩어져 있는 비대칭적인 형태들을 하나의 중심으로 불러들인다. 그래서 절대권력을 과시하려는 군주는 도시나 궁전 인근에 직각으로 교차하는 직선들의 격자를 새겨넣거나, 수직의 기둥 비슷한 것을 세우려 했다.

건축물들의 대칭적인 배치는 어디서 보아도 하나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보는 각도마다 실은 다르겠지만, 대칭의 중심을 통해 포착된 하나의 상의한 변형으로 표상하게 한다. 그렇기에 대칭성은 확고한 통일성을 만들어낸다. 대칭성은 또 대칭의 중심이 되는 축이나 점으로 보는 이를 이동하게 한다. 정면상을 가장 명확하게 얻을 수 있는 중심으로. 거기 가보지 않은 한, 우리는 그 공간을 제대로 본 것이 아니다. 이로써 아무리 다양해도 실은 단일한 통일성이 산출된다.

중심성과 통일성, 위계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대칭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서원이 그렇다. 위계의 중심을 확고하게 드러내고, 공간 전체에 명료한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 서원은 공간 전체에 강력한 대칭성을 부여한다. 이렇게 대칭적으로 배열되면, 마당이 넓고 길이 많아도, 혹은 옆에 부속된 건물이 붙어 있어도, 그것은 독자적 형상을 만들지 않는다. 서원마다 전사청이나 곳간, 문간채, 뒷간이나 불을 때는 아궁이 등이 있지만, 이들은 대칭축을 중심으로 하는 전체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크게 만들어 붙여 놓아도, 덧붙여진 부수공간이기에, 중심 건물들이 만드는 풍경을 바꾸지 못한다. 따라서 대칭성을 통해 구성되는 강력한 통일성은 일종의 시각적 희생을 동반한다. 즉 전사청이나 하인의 공간처럼 필수적이지만 부수적인 것을 보이지 않게 한다. 이는 서원에서의 일상을 떠받치는 종복들의 지위와 동형적이다.

산사들도 건물들의 배열을 규제하는 중심축이 있고, 대웅전이나 무량수전 등과 같은 중심 건물이 있다. 그러한 금당 앞에는 사방을 건물로 둘러치든 두 건물 사이에 석단으로 깎아놓든 사각형의 마당이 있다. 중심축은 이 금당과 그 맞은편에 있는 건물을 잇는 선을 통해 형성되기 마련인데, 금당 앞의 마당은 대개 사각형이기에 본당 옆에 두 건물을 대칭상으로 배열하려는 욕망이 일어나기 쉽다. 그러나 산사들의 경우에는 외려 그런 유혹을 명시적으로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금당을 거점으로 하는 중심축과 별개의 중심축을 만들어 축의 단일성마저 깨는 경우가 빈번하다.

가령 길이로 보면 부석사의 가람 배치 전체의 중심축은 천왕문에서 범종각을 잇는 축이지만, 그 축 좌우의 건물은 대칭을 이루지 않는다. 본당인 무량수전은 앞의 안양루와 이어지는 다른 축을 갖는데, 이는 천왕문-범종각의 축과 삐딱한 각도로 크게 빗겨나 있다. 이로 인해 금당이 아님에도 범종각이 무량수전과 별개의 중심점이 되고, 사찰의 공간 전체는 두 축이 만드는 복합체가 된다.

통도사는 대웅전 인근의 상로전(上爐殿), 대광명전 인근의 중로전, 영산전 인근의 하로전 세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세 영역의 축은 각각 독립적이며 상로전, 중로전은 축 자체가 지형에 맞추어 구부러진 곡선이다. 이 세 영역은 일주문에서 천왕문, 불이문을 거쳐 대웅전 앞마당으로 이어지는 주통로를 통해 하나로 ‘통합’되는데, 전체 가람의 중심축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 축 또한 곡선으로 구부러져 있다. 세 축 간 간격도 다르며, 축들이 전제 축과 만나는 각도도 직각적인 엄격성에서 벗어나 있다.

주통로를 축으로 본다면, 세 영역의 중심 전각은 물론 그 앞의 다른 전각들 모두가 올라가는 동선의 오른쪽에 있어 중심축이란 말을 무의미하게 만들 만큼 비대칭적이다. 그건 기하학적 의미의 축이라기보다는 세 노전의 축들을 잇는 하나의 선일 뿐이다. 이 극도의 비대칭성에도 전체 공간은 균형을 잃지 않고 있다. 본당들이 있는 공간의 반대편에 있는 범종각, 화엄전, 곡부, 객실 등의 규모도 있지만, 본당의 공간들이 모두 주통로를 이루는 곡선의 오목한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 각 부분영역을 구성하는 방식 또한 모두 다르다. 하로전은 본당인 영산전과 마주 보는 만세루, 그 좌우에 약사전과 극락보전이 거의 대칭적으로 놓여 있어서, 마당은 직사각형을 이룬다. 그래서 극락보전과 만세루에 인접해 범종각이 있지만 대칭적 통합성을 깨지 않는다. 앞마당의 사각형을 둘러싸고 건물들이 통합되는 이런 배치와 달리, 중로전은 본당인 대광명전 앞에 용화전을 두고, 그 앞에 관음전을 두어, 마당-면이 아니라 전각을 잇는 선에 의해 중로전의 통합성을 형성한다. 세 전각의 배열은 왼쪽으로 볼록하게 구부러져 있다. 그 옆에는 해장보각과 개산조당, 오층탑이 다시 일렬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를 잇는 축선은 오른쪽으로 볼록하게 구부러져 있다. 그렇게 두 축선은 마주 보는 곡선으로 균형을 이루는데, 강한 주축과 약간 곡선의 보조축이 마주보며 만들어내는 비대칭적 균형이 중로전에 역동적이고 유연한 통합성을 제공한다.

상로전이 중심축을 형성하는 방법은 선과 면을 하나로 이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놀랍다. 그 축은 일단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와 대웅전을 잇는 선에 의해 형성되는데, 그건 다시 대웅전과 그 좌우의 두 전각인 응진전과 명부전, 그리고 맞은편의 설법전이 만드는 사각형의 면이 만드는 축과 이어지며 상로전 전체의 축이 만들어진다. 선과 면을 이어서 하나의 축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대웅전 좌우의 전각들은 대칭적이지 않다. 응진전과 맞은편의 명부전은 위치도 서로 어긋나 있고, 건물의 폭도 다르다. 동시에 세 개의 ‘정면’을 갖는 대웅전은 한쪽에는 삼성각과 응진전, 산령각, 금강계단 입구로 구성되는 마당을 만들고, 다른 한쪽에는 금강계단 입구와 담장이 만드는 마당을 만든다. 대웅전 좌우에 두 개의 분절된 부분공간이 있는 셈인데, 전자는 가까이 붙은 건물로 인해 상대적으로 폐쇄적이라면, 후자는 건물 아닌 계단과 담장이 충분히 거리를 두고 있는 데다, 중로전과 이어지는 통로이기도 하여 개방적이다. 두 개의 비대칭적 마당을 대웅전 좌우에 배치한 것이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일주문에서부터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가 도달하게 되는 중심은 대웅전인데, 이 동선에서 보면 대웅전 우측 마당은 대웅전 전체 앞마당의 위상을 갖는다. 상로전에서 보자면 한쪽 측면의 마당이, 전체 사찰의 가장 길고 중심적이라 할 동선에서 보자면 대웅전 앞의 중심공간이 되는 이중성을 갖는 것이다. 부차적 공간이 중심적 공간이 되고, 부차적 공간과 중심적 공간이 중첩되면서 주와 부, 중심/부차의 관계를 뒤섞는 놀라운 공간적 다양체를 여기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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